프롤로그
‘내가 만약 해외에 살 게 된다면…’ 한두 번이 아니라 자주 생각했었던 일이다.
20대 때는 캐나다 어학연수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철없는 환상이었고 30대 때는 각박한 삶에 제주도 한 달 살기처럼 일상과 여행에 경계에 서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일 년에 한번 일탈을 꿈꾸며 유명한 것들을 보고 일주일 짜리 추억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맛있는 것을 먹고 매일 같은 거리를 걷다가 오늘은 꽃을 사고 내일은 서점에서 책을 읽으며 그곳에 사는 사람들과 수다를 떠는 상상을 하곤 했다. 물론 내가 생각했던 장소는 런던, 파리, 뉴욕처럼 누구나 알고 환상을 품을만한 대도시였다.
‘에밀리 인 파리’의 그녀처럼 이방인이지만 여행자가 아닌 현지인이 되어보는 사치를 원했 던 것 같다. 누군가에게는 명품가방이, 어떤 이에게는 좋은 회사에서의 눈부신 커리어가 동경의 대상이 되듯, 나에게는 그런 삶이 내 인생을 추동 하는 재료였다.
스무 살 초반부터 막연히 바라기만 했던 일이 남편의 주재원 발령으로 갑자기 서른 중반에 실현되었다. 노력없는 소원이 실현되었을 때의 감정은 놀이동산에서 누군가에 의해 갑자기 손에 쥐어진 솜사탕을 보는 마음이었다. 가슴이 뛰기도 하고 이걸 어떻게 먹어야 좋을까 머리를 갸우뚱하게 되는 생소함이 있었다.
물론 해외에서 살 게 된다는 것을 제외하면 다른 것들은 내 상상과는 크게 달랐다. 내가 살 게 될 곳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이집트였으니까. 평범한 한국인에게 이집트는 피라미드, 스핑크스 그리고 미라의 나라일 것이고 거기가 중동인지 아프리카인지를 알기 위해 구글 지도를 검색할 수밖에 없는 지구 반대편의 미스테리 한 국가일 뿐이었으니까.
"엄마, 나 이집트에 가게됐어."
처음 부모님께 이집트 주재원 발령에 관해 이야기 했던 날이 떠올랐다. 남편의 일 때문에 가게 되는 것이니까 세계여행을 떠난다고 했을 때 보다는 훨씬 차분하게 잘 받아들이시는 모양새였다. 다만, 그곳에 대해 아는 것이 없으니 물음표가 계속되는 질문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집트, 카이로? 거기가 얼마나 걸리지? 안전 한 곳인가? 코로나는?"
심지어 코로나 때문에 더 심란한 2020년 하반기였지만 30대에 건강한 성인 두 사람이었기에 그 부분에 대해 너무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여행하며 알게 된 것은 미리 한 걱정이 어려움을 막아주지도, 그렇다고 실현해 주지도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부딪히다 보면 그 걱정과는 다른 것들이 반드시 그 장소에 숨어있기 마련이다.
그것이 보물이든 눈물이든.
생소한 곳에서의 4년을 생각하니 당황스러웠지만 반대로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곳에 살 게 되어 재밌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부부세계여행의 마지막 나라 대만에서 연등을 날리며 썼던 문구가 떠올랐다. '인생은 말하는 대로!! 마로코코 앞으로도 지구산책' 그때와 같은 여행자의 마음은 아닐지라도 우리가 모르는 어딘가로 또 다시 지구산책을 떠날 수 있다는 것에 짜릿함을 느꼈다. 더불어 『처진 달팽이 - 말하는대로』의 가사가 떠올랐다.
말하는 대로 말하는 대로
될 수 있단 걸 눈으로 본 순간
믿어보기로 했지
마음먹은 대로 생각한 대로
할 수 있단 걸 알게 된 순간
고갤 끄덕였지
요즘처럼 세계가 하나의 문화권으로 움직이고 있는 시대에, 대도시라면 그게 어느 나라이든 비슷한 이슈와 삶의 패턴을 공유하고 있다. 어디를 가도 도시화로 인해 여행의 목적지가 주는 새로움이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이집트 카이로도 도시의 모습은 비슷하겠지만 이슬람 국가이기에 돼지고기를 먹지 않고 히잡을 쓰는 것 처럼 확실한 '다름'이 있다는 점에서 기대가 되었다. 누군가의 일생에 미국이나 유럽을 갈 기회는 있을 수 있어도 나일강 물을 먹어 볼 수 있는 삶은 드물테니까.
영어 사용과 새로운 업무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음에도 마로가 주재원에 대해서 부정적이지 않았을 수 있었던 이유가 우리의 세계여행 때문이라고 했을 때, 그 경험으로부터 우리의 삶이 천천히 바뀌어 왔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인생을 여행자의 마음으로 살 때 온 우주가 그렇게 살도록 도와준다는 ‘파울로 코엘료’적 생각이 절실하게 와 닿는 순간이었다.
2015년 그때도 2021년 지금도 우리가 모르는 삶의 보물을 낚으러 미지의 세계로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