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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희영기행작가 Feb 20. 2023

[영남알프스 전설따라] 신불산 갈산고지

신불산 갈산고지(681고지)

681고지 사방 관측 좋은 천혜의 요새

신불산·간월산·영축산 등 한눈에 보여

군경 사살 1800여명·무기약탈 등 암약

의용경찰대·군경 합동작전으로 소멸

사자평에서 바라본 갈산고지. 산 중간 흰색부분으로 보이는곳이 갈산고지 전망대(일면 681고지)

갈산고지는 태봉산으로도 불리는데, 주봉인 신불산을 배경으로 한 빨치산의 근거지로 알려져 있다. 일명 681고지로 불리는 갈산고지는 배내골이 한눈에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으로 사방을 관측하기 좋은 지정학적 천혜의 요새였기 때문이다. 정상에 서면 사방이 모두 열려있어 적들의 동태를 쉽게 관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도주하기 좋으며, 능선을 따라 다른 지역으로 이동이 쉬운 곳이다. 또한, 멀리 원동과 언양을 오가는 길이 한눈에 들어오고, 신불산, 간월산, 영축산, 시살등, 천황산, 재약산 등도 한눈에 관측된다. 이곳이 남도부 부대의 숙영지이자 지휘소였다. 주변에는 수령 200년이 됨직한 큰 소나무들이 그때의 흔적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정상 20여m 아래에는 둘레 200여m에 이르는 긴 참호를 설치한 흔적들이 있다. 그리고 군데군데 낙엽으로 덮인 참호 같은 큰 웅덩이들도 곳곳에 있다. 지금도 이곳에서는 당시의 흔적을 증명이라 하듯 잉크병, 탄환, 옹기, 그릇 등이 발견된다. 위로 좀 더 올라가면 갈산고지로 알려진 681고지, 그리고 더 위쪽에는 왕봉재(간월재)로 이어지는 995고지 등이 있다.

갈산고지 전망대.

# 6·25전쟁 전후 갈산고지 남도부 지휘소


6·25전쟁을 전후하여 밀명 남도부(南到釜·남도부는 남쪽으로 내려가 부산을 점령하라의 줄임말)는 인민군 중장으로 유격대 사령관이었고, 그가 이끄는 빨치산은 신불산 파래소폭포 위쪽 갈산고지에 본부를 두고 빨치산 활동을 벌였다. 신불산 빨치산은 후방 교란을 목적으로 활동한 게릴라부대였다. 1950년 북한 회령을 출발 6월 25일 새벽 5시 임원항(강원도 삼척시 원덕읍 임원리)에 도착, 호산~죽변~울진~평해~후포~영덕을 거쳐 남하하게 된다. 그들은 칠보산에서 국군을 만나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출발 당시 300여명의 남도부 부대는 한국전쟁을 치르면서 신불산에 도착할 무렵엔 절반 정도로 줄어든다. 그러나 이곳 지방당원 30여명이 참가함으로써 신불산 갈산고지 남도부 사령부 시대의 서막이 열렸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을 신불산 빨치산으로 불렀다. 

공비지휘소가 있었던 681 고지. 

# 공산 게릴라·공비 호칭 많이 사용


빨치산은 파르티잔(Partisan)으로 외국 점령군에 대한 저항운동이나 내전 또는 혁명전쟁에서 비정규적 유격 요원, 게릴라(Guerrilla)를 가리키는 말로 '같은 당파에 속한다'라는 의미를 지닌 이탈리아어 파르티자노(partigiano)에서 유래되었다. 공비(共匪)라고도 하는데 공비(共匪)는 공산 비적(匪賊)을 줄인 말이다. 비적은 무기를 지니고 떼를 지어 다니며 살인과 약탈을 일삼는 도둑을 말한다. 빨치산은 정규군과는 별도로 적의 배후에서 그들의 교통·통신 수단을 파괴하거나 무기와 물자를 탈취하는가 하면 파괴하는 일들을 자행하였으며, 무기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경찰과 군인을 습격했고, 식량을 얻기 위해 수시로 마을로 내려와 가축과 식량을 약탈해갔다. 그러므로 빨치산은 그 지역의 지리나 지형에 밝아야 하는가 하면 지역주민의 협조나 지원이 없이는 수행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6·25 전쟁 전에 각지에서 주동하였던 공산 게릴라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이에 대해서는 빨치산 대신 공비(共匪·공산당 도적)라는 호칭을 많이 사용한다. 

죽림굴앞 표지석(빨치산들의 야전병원으로 사용하였다)

# 제주 4·3항쟁부터 본격 활동 시작 


본격적인 빨치산의 시작은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한국에 대한 연합국의 신탁통치가 결정되자 남한만의 단독선거·단독정부 수립에 맞선 제주 4·3항쟁에서부터였다. 신불산 빨치산은 1948년부터는 남로당 경남도당 동부지구당 소속이었고, 6·25 전쟁이 나면서 동해 남부지구당으로 바뀌었다가 전쟁 중에 남로당 제4지구당 제3지대로 편제되었다. 신불산 서북능선에는 다음과 같은 비문이 새겨져 있다. 이곳은 6·25전쟁 중 북한 남부군 예하 제5지대장 김원팔이 위치하여 신불산 일대의 공비들을 총지휘하였던 공비지휘소였다. 또 태봉산 꼭대기에 있는 갈산고지에도 이와 유사한 내용의 비가 세워져 있었으나 지금은 누군가에 의해 파손되어 흔적만 찾을 수 있을 뿐이다. 남도부는 681고지를 지역을 세 구역으로 나누어 각 중대가 방어하도록 했다. 제1중대는 동남쪽인 백련천 골짜기와 남쪽 배내천 본류를, 2중대는 고지 정상에 기관총을 설치하고 신불산 방향을, 3중대는 영축산 서쪽 능선에서 공격하는 적을 방어하도록 배치하였다.

파래소 폭포소 경관(빨치산들의 취사장으로 사용하였다)

# 파래소폭포 취사장·죽림굴 야전병원 이용


빨치산은 식량을 얻기 위해 수시로 인근 마을로 내려와 가축과 식량을 약탈해갔다. 이로 인해 인근 주민들의 피해는 더해갔다. 약탈한 물품에 대해 해방 통일 후 백미로 환산하여 갚아 주겠다는 내용이 담긴 동해남부전빨치산사령관 남도부의 직인이 찍힌 '빨치산 원호증'이라는 증명서를 발행해주기도 하였다. 이들은 약탈한 쌀과 음식으로 파래소폭포 인근에서 은밀히 취사하였다고 한다. 밥을 할 때는 연기가 나지 않는 싸리나무로 밥을 한 뒤 부대별로 짊어지고 깎아지른 베랑을 타고 숙영지까지 식사를 운반한 뒤 고지에서 먹었다고 한다. 파래소 폭포가 취사장인 셈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들이 민가로부터 갈취한 짐승들을 재약산에 풀어 놓고 방목했을 정도로 대담하게 활동하였으며, 많을 때는 소 30여 마리 이상을 방목하였고, 하루에 소 2마리를 잡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 밥 대신 소고기로 배불리 먹기도 했다. 그러나 1950년 12월 국군의 1차 공격으로 많은 부상자를 낸 뒤 남도부 직할대는 681고지를 빼앗기게 된다. 이들은 995고지와 신불산 서북릉선을 따라 이동하면서 부상자를 죽림굴에 숨겨둔 뒤 통도사 뒤 영축산으로 사령부를 옮긴다. 그 후 천황산, 밀양 향로봉 등지로 근거지를 옮기며 유격전을 펼치게 된다. 그 후 국군의 토벌이 뜸해진 1951년 초에는 신불산 681고지를 제2사령부 거점으로 정하고 진지를 구축한다. 681고지는 제2차 국군의 공격이 있기 전까지 남도부 부대의 은거지가 된다.

신불산 빨치산은 북에서 내려온 유격대원을 중심으로 세력을 키워가면서 부산권에서 좌익운동하던 사람들과 지방당원을 받아들여 한때 220여명에 이르게 된다. 이들은 부산 수영비행장을 급습해 각종 총기와 탄약을 탈취하는가 하면 대구 동촌 비행장을 점령하기도 했다. 국군과 UN군 기동로를 매복 공격해 군용트럭을 불태우는 등 활동했다. 자료에 따르면 군경과의 교전 700여회, 군경 사살 1,800여명, 각종 무기 약탈 800여정, 각종 실탄 약탈 2만여발, 민가 방화 100여호, 민가 습격 500여호, 군용열차 전복 20여차량, 군용트럭 소각 또는 파괴가 200여대에 달하는 등 후방 교란 작전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신불산 첩첩산악 손아귀에 거머잡고 / 험악한 태산준령 평지같이 넘나드네 / 지동치듯 부는 바람 우리 호통 외치고 / 깊은 골에 흐르는 물 승리를 노래한다 / 우리는 용감한 신불산 빨치산 / 최후의 승리 위해 목숨 걸고 싸운다. 


이들은 승전 할 때마다 지리산을 신불산으로 개사한 신불산 유격대의 노래를 힘차게 불렀다. 하지만 1953년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국군의 토벌이 시작되자 서서히 소멸해갔다. 이들은 밤낮없이 민가로 내려와 요구 조건을 들어주지 않으면 양민들을 살해 등 온갖 만행을 자행하였으며, 이로 인해 주민들의 원성을 샀다. 참다못한 애국 청년들이 의용경찰대에 자진 입대해 군경과 합동작전을 펼쳐 큰 피해를 보게 되었다. 

가지산자락에 세워져 있는 공비토벌작전 기념비

# 토벌 후 공비토벌작전기념비 세워 전우 넋 기려


1953년 말 김정수, 구연철은 물론 당시 살아있던 장혁, 길토목, 이만용 등이 경찰에 체포되면서 빨치산 투쟁도 끝을 맺었다. 이에 앞서 남도부는 전향한 부하의 밀고로 체포돼 1955년 8월 34세의 젊은 나이로 총살당했다. 당시 빨치산 토벌 작전 과정에서 참여하여 희생당한 경찰관과 의용대, 군인 등 140여명의 넋이 가지산 기슭(석남사 옆)에 신불산 공비토벌작전기념비를 세우고 당시 토벌 작전에 참여하여 전사한 전우들의 넋을 기리고 있다. 한편, 남도부의 호적상 이름은 하준수다. 그는 1921년 11월 14일 경남 함양군 병목면 통천리 지리산 자락에서 태어났다. 조선인민공화국 최고 훈장인 자주독립 훈장을 받은 유일한 빨치산으로 일본에 유학하면서 가라테를 배웠는데 조선인 중 최고의 실력자로 알려져 있다. 전투에서 언제나 앞장섰고 적군들에게는 초조한 빛을 보이는 적이 없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진희영 산악인 : 기행작가


※이 이야기는 필자가 당시 신불산 공비 토벌 작전에 참여한 두서면 내와리에 살았던 고(故) 김익래옹으로부터 채록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쓴 글입니다.


· 참고자료 : 신불산(빨치산 구연철의 생애사)-안재성 지음(출판사:신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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