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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양정 Mar 28. 2016

여행자의 친구

당신의 이름을 불러준 사람

당신의 이름을 불러준 사람


익명의 여행지에선 일상에서 가질 수 없는 한없는 자유로움이 있다. 어떤 날은 숙소 방에 틀어 박혀 최소한의 동선만 유지한 채 있지도 않는 전화가 울릴 일도, 어느 누가 갑자기 나를 찾아올 일 또한 없어 말 한마디 않고 지나가기도 한다. 입에 군내가 날 정도로 혼자 잘 있다가도, 맛있는 식당을 정말 우연히 발견하거나. 좋아하는 비가 오는데 혼자서 마땅히 팔짝팔짝 뛸 수도 없을 때. 정말 이 순간만은 누군가와 나누고 싶은데 주위를 둘러보면 아까 걔, 또 나뿐이라면 정말이지 서운할 때가 있다. 혼자 있는 여행자에게 먼저 말을 건네주던 사람들. 이름을 묻고, 또 그 이름을 잊지 않고 다시 불러주던 친구들. 낯선 여행지에서 그 어느 말보다도 정다운 인사말은 바로 '내 이름'이었다. 그들로 나는 익명의 자유로움을 포기하고, 일상의 다정함을 선택했다.       



내 이름을 불러준 친구들


맛있는 시간, 수만트라하우스 in Ubud, BALI

(사진) 매일 자신의 집과 일터 앞에 공양을 올리고 정성스런 기도를 드리는 발리인들의 일상적인 아침. 수만트라 가족 중 가장 나이가 많은 할머니와, 아직은 잠투정이 있을법한 아홉 살 라띠도 의젓하게 자신의 역할을 다하며, 집안 곳곳에 가족들의 안녕을 기도한다. 계단 아래 난간에, 불을 사용하는 가스레인지 앞에. 그리고 내가 묵고 있는 문 앞 모서리까지, 그들의 기도가 닿지 않는 곳이 없다 (Ubud) 



아침부터 타닥타닥 비가 내린다. 빗소리를 핑계 삼아 늑장을 부리는 오전, 문득 타닥타닥 맛있게 부쳐진 해물파전이 생각났다. 그래, 오늘은 해물파전으로 산책을 가보자. 라띠 가족에게 오늘 저녁은 내가 하겠노라, 미리 예고를 하고. 코리안 피자를 만들기 위한 '공부'에 돌입한다. 우선 가장 중요한 재료인 밀가루가 영어로 뭐였더라?를 찾고, 수만트라의 부인인 일루의 주방에서 오일과 기본 재료를 점검한다. 얼추 장보기 목록을 끝내고, 이곳 말로 '쭈미쭈미(cumi-cumi)'로 불리는 귀여운 이름을 가진 오징어와 새우, 호박같이 생긴 호박과 채소 몇 가지를 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콩가루 색과 비슷한 밀가루도 한참 고민 끝에 유기농인가, 싶어 샀다. 수만트라 가족의 모든 총애를 등에 업고, 요리는 수월했다. 완성된 그 모양도 수월했다. 그리고 기대하던 시식의 시간은 결코 수월하지 못했다. 맛 평가에 정직한 두 아이는 어느새 쭈미쭈미만 골라 먹었고, 일루와 수만트라도 멋쩍은 웃음으로 시식을 무마하려 했다. 원인은 밀가루였다. 그 유기농이라 생각했던 밀가루는 전혀 정제되지 않았던 그야말로 순수한 결정체들. 반죽이 유독 뻣뻣했지만, 기분 탓이겠지라고 넘겼는데 그 맛까지 뻣뻣해질 줄이야. 비 오는 날 한국사람들이 파전을 즐겨 찾는 건 파전을 기름에 부칠 때 나는 타닥타닥, 소리가 비 오는 소리와 비슷해서야. 라는 근사한 요리 설명까지 곁들이고자 했던 여행자의 과욕은 그날 밤 결국 부쳐지지 못한 반죽 덩어리와 함께 냉장고 속으로 숨어야 했다.



어느, 프렌치한 하루 in Bugan, MYANMAR

오늘은 토니 이발하는 날, 예전 방식 그대로 날카로운 칼과 이발가위를 사정없이 쓰는 이발사에게 토니는 간절한 눈빛으로 요청했다. 부디 제 머리까지 자르진 말아주세요. plz! 


여행 중 즉흥적으로 결정된 미얀마행, 당시 배낭 여행자들 사이에선 신의 허락 없이는 절대 들어갈 수 없는 몇 남지 않는 '미지의 세계'라는 그곳. 방콕 내 미얀마 대사관에서 두 번의 반려 끝에 입국 전 날에서야 어렵게 비자를 받아 미얀마로 들어갈 수 있었다. 버간, 자욱한 모래의 땅 위에 저마다의 기도가 담긴 수많은 파고다는 경이로운 모습으로 이곳을 찾은 여행자를 축복해줬다. 그런데 정말 그 신의 허락이 어려웠던 건지, 이곳엔 탑을 찾는 사람보다도 탑이 월등히 더 많았다. 큰 숙소도 나 혼자 통째로 쓰는 경우가 많았는데, 미얀마에서는 전기가 24시간 들어오는 곳은 축복받은 지역으로 수시로 정전이 되기 일쑤였다. 오늘도 이 숙소엔 나 혼자 뿐이라고 했는데. 깊은 밤 느닷없이 정전(겁이 많은 여행자라 반드시 불을 켜놓고서 잠이 든다)이 되면 순식간에  덮치는 어둠 속의 시간들을 나는 매일 밤 경건하게 받아들여야만 했다. 나의 간절한 기도를 신이 들었던 걸까, 다음 날 맞은편 방에 한 여행자가 도착했다. 토니, 그는 프랑스인으로 중국에서도 오랫동안 일을 한 경험이 있는 프로그래머였다. 여행을 즐겼고, 아시아 지역에 대해서도 깊은 이해가 있었다. 간혹, 한자로 필담을 나누자고 해 나를 당황케 했지만(4개 국어를 두루 쓰던 그는 인근 국가의 언어인 중국어를 못하는 나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는 그날부터 곧잘 잘 맞는 친구가 되었다. 지도를 잘 보는 토니 덕에 곳곳에 숨겨진 파고다들을 찾아갈 수 있었고, 어떤 날은 <인디펜던스 데이>와 같은 헐리우드식 영웅 스토리를 보며 같은 장면에서 피식, 웃음이 나오는 걸 보면 꽤 비슷한 감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무엇보다 감히 '신의 은총'이라 불릴 맛 좋은 미얀마 비어를 같이 먹을 수 있는 친구가 생겨 반가웠다. 다만, 팬룸이었던 그가 더 저렴한 가격에 심지어 에어컨디셔너를 갖춘 투베드의 내 룸을 보고선 자신은 단지, 너무 많은 더위를 타서라며 이 방에서 같이 자면 안 되겠느냐고 간절한 눈빛으로 요청한 밤이 있었지만. 토니, 어차피 곧 정전될 거야. 라고 그를 칼같이 위로해줬다. 다행히 상처는 잘 안 타는지 다음 날에도 토니와의 즐거운 동행을 계속할 수 있었다. 버간의 몇 안 되는 여행자 중에 둘이었던 우리는, 토니는 내가 지나 온 양곤의 위파사나 명상센터로 열흘 간 묵언 수행을. 나는 토니가 친절(?)하게 중국어로 표시해준 그가 지나온 껄로와 인레의 지도를 선물 받아 다음 여행지로 이동했다.

      


이스턴 파라다이스 in Kalaw, MYANMAR

서로 언어가 통하지 않더라도 마음을 전할 수 있는 방법들은 충분히 많다. 온기 가득한 미소와 호의를 전해준 그들은 낯선 이방인에게 ‘이스턴 파라다이스’의 한 켠을 기꺼이 내어주었다


토니가 추천해 준 껄로의 숙소인 이스턴 파라다이스는 정말 그 이름만큼 멋진곳이었다. 다만, 이 멋진 숙소 전체를 또 나 혼자만 차지한다는 것이 못내 과분할 뿐이다. 해발 1,320m에 위치한 껄로의 밤은 일찍 찾아오는데, 홀로 맞을 정전을 피해 다행히 숙소 근처 늦게까지 문을 여는 꼬치 가게를 발견했다. 앉은뱅이 의자가 듬성 놓여 있고, 큰 솥 하나에 풍덩풍덩 양념된 꼬치를 두런두런 모여 앉아 하나씩 건져먹는 방식이다. 유난히 다정해 보이는 부부가 맞아주는 이 가게에 나는 그만 단골이 되고 말았다. 단골의 출연 소식을 들었는지, 다음날부턴 그들의 딸도 혼자 온 여행자와 기꺼이 합석을 자청했다. 비록 많은 이야기를 나누진 못해도 간간이 건네는 소박하지만 정성스러운 음식들이 내게 지금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 그들이 전하고 싶은 마음들이 온기 가득한 음식으로 그대로 전해졌다. 낮에는 같은 장소에서 모힝가(미얀마의 한국식 추어탕과 비슷한 음식)를 팔아 하루도 장사를 거른 적 없다던 부부가 하루는 솥을 잠시 비우고, 여행자에게 껄로를 소개해주고 싶다고 한다. 마을과 멀지 않은 노란 뱀부 숲으로, 인근 대학 캠퍼스를. 또 그들이 삶의 멘토로 삼고 있다는 몽크(monk)를 내게 소개해주었다. 마지막 코스는 부부의 일가 친척이 함께하는 저녁식사와, 한국에서도 미처 못 본 한류 드라마 <아내의 유혹>을 열렬하게 시청하는 것이었다. 특별한 무엇인가를 소개하기 보다는, 그 가족들이 즐겨 찾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나와 나누고 싶었던 것 같다. 평범해서 소중했던 일상으로의 초대를 받은, 미처 줄게 없는 여행자는 껄로의 유일한 사진관을 찾아 함께 찍은 사진을 인화해서 선물했다. 나는 그들이 살고 있는 그곳을 '이스턴 파라다이스'로 추억하게 되었다.       



추억을 꺼내먹는 노트 in Varanasi, INDIA 

노트 속 음식 중에 무엇이 젤 먹고 싶냐는 내 질문에, 두 번 고민도 않고 울 엄니가 말아주던 잔치 국수가 가장 먹고 싶다던 다영. 그녀의 엄니가 말아주는 잔치 국수가 나도 그립다


"난 괜찮은데." "어, 난 다 좋아요." 바라나시에서 만난 다영은 지난 반년 동안 세계여행을 하고 있었다. 자전거를 끌고 인천항에서 배를 타고 시작된 여행은 유럽 전역 내내 페달을 밞았고, 크고 작은 사건과 수많은 노숙의 경험과 함께 이곳에 도착한 여행자. 제법 긴 여정에 이제는 지칠 법도 한데 어떤 순간에도 긍정적인 대사를 읊어 가끔은 모두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더 이상 자전거로 국경을 넘을 수 없어 미련 없이 자전거를 버리고, 밤새 맹수가 지천에 있던 몽골 사막에서 최소한의 보호막이 되어 준 작은 텐트도 필요가 없어져 벼룩시장에 팔고 이곳에 도착했단다. 그리고 이곳 바라나시에선 기타의 신이 되겠노라고, 포부를 밝히더니 덜컥 기타를 사서 숙소로 왔다. 즉흥적이면서 근래 보기 드문 건강한 마음을 가진 다영이 여행 중 손에서 놓지 않던 노트를 보여줬다. "언니, 힘들었을 때 제가 어떻게 버텼는지 아세요? 먹고 싶은 음식을 하나씩, 하루에 딱 하나씩 그렸어요. 그곳에서만 먹을 수 있던 음식, 다정한 누군가가 제게 해줬던 밥들. 그것들을 추억하는 것만으로도 매일 매일 여행을 다시 시작하는 것처럼 힘이 났어요" 다영은 누구나 꺼리던 순간도, 차마 먹기 어렵던 현지 음식과 힘든 상황도 곧잘 즐겁게 받아들였다. 정말 기타의 신이 되었는지, 노트 속 그 음식들은 돌아가서 하나하나 꺼내 먹었을지. 건강한 그녀가 궁금하다.



여행자의 친구


언젠가 다녀왔던 그곳을 다시 찾게 된다면, 그것은 그곳에 살고 있는 내 친구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장소를 온전히  추억할 수 있게 하는 사람들, 그 시간을 다시 나눌 수 있을 친구들. 지금도 가끔 그때를 꺼내보며 내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주던 그 시간을 더듬어 본다. 한국 드라마에 자주 나오는 떡볶이의 맛이 궁금하다고 했던 낭쉐의 동갑친구였던 쭈뿌이. 나는 아직도 떡볶이를 먹으며 이 맛을 그때 어떻게 설명해줬으면 좋았을지, 혼잣말을 해보기도 한다. 언젠가 꼭 다시 찾아야 할 여행지가 있다. 그것은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 내 친구가 그리워서일 것이다.


 

멀리 있는 친구만큼 세상을 넓어 보이게 하는 것은 없다. 그들은 위도와 경도가 된다 _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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