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리(Gili)는 롬복어로 '작은 섬'이라는 뜻이다. 약 2만여 개의 크고 작은 섬으로 이루어진 인도네시아, 그중 한 섬인 롬복에는 지상의 마지막 낙원이라 불리는 3곳의 부속섬이 있다. '섬 속의 섬' 길리 트라왕간, 길리 아이르, 길리 메노. 그중 롬복에서 가장 멀고, 비교적 많은 주민들이 살아가는 곳인 길리 트라왕간(길리 T)에는 어느 곳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그, 3가지가 없다.
긴 시간 꿀렁이는 배를 타고 겨우 섬에 도착. 오는 동안 바닷물까지 머금었는지 여행자의 배낭은 더욱 가혹하게 느껴지는데. 선착장에는 숙소로 당신을 데려다 줄 그 흔한 오토(Auto) 바퀴들이 보이지 않는다. 그때 당신의 눈을 의심케 하는 그것! 네 바퀴로 가는 자동차도, 인도네시아 어디에서든 사람만큼 많이 마주치는 오토바이도 아닌, 오직 두 바퀴로만 가는 마차. 분명 당신은 방금 전까지 비행기로 인근 발리에 도착, 다시 바다를 사정없이 가르는 위력적인 스피드 보트를 경험했는데. 그동안의 행간을 깔끔하게 생략한 느닷없는 마차를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두 바퀴인 자전거와, 대여도 필요 없는 당신의 튼튼한 두 다리가 이 섬을 보행하는 유일한 이동수단이다. 그렇다, 길리 T에는 연료로 움직이는 어떤 교통수단도 없다.
섬은 다행히 크지 않았고, 대부분의 숙소 또한 선착장이 있는 동쪽에 모여 있어서. 당신의 튼튼한 두 바퀴로도 숙소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섬의 모든 길은 비포장으로, 돌이 굴러다니고 흙이 날리지만. 소소하게 자전거만 지나칠 뿐, 위협적인 것이 없어 안심하고 걸을 수 있다. 이따금 길 위를 느릿느릿 유영하는 고양이가 한가로운 오후를 말해줄 뿐. 짐을 부리고, 긴 이동으로 배가 고픈 당신은 아까 봐 둔 바닷가 식당으로 향하고. 익숙한 나시고렝 곱빼기를 주문한다. 그래, 수고했어 스스로를 토닥이며 식사를 하려는 순간. 툭툭. 테이블 아래를 뭔가가 단호하게 두드린다. 이어 사뿐한 점핑으로 금세 내 옆에 자리한 그것은 고양이 1. 어느 새 고양이 2.3도 합석, 마치 처음부터 동행한 듯 제 분량의 식사를 당당히 요구한다. 이 섬에는 유독 고양이들이 많다. 응당 고양이&개의 조합이거늘, 그 흔한 개 한 마리를 종일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렇다! 당신은 훌륭한 관찰력의 소유자다. 이 섬에는 정말 개 한 마리 없다. 길리 T로 지금의 주민들이 이주하기 전, 이곳에 '원주민'이었다는 고양이. 자연스레 사람들 또한 이를 배려해 개를 데려 오지 않게 되었고, 개 한 마리 없는 '고양이들의 천국'이 된 것이다. 실제로 길리 T는 'Cats island'로도 불린다.
대부분의 여행지를 소개하는 문구들은 ~가 있는, ~로 가득한. 여행을 통해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온갖 흥미로운 것들로 여행자를 유혹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섬에 없는 3가지, 이것이 내가 그 섬을 찾은 이유가 되었다.
섬은 해안선을 따라 도보로 2~3시간이면 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작다. 주로 여행자가 묵는 숙소가 자리한 외곽과, 이슬람 사원을 중심으로 주민들이 살아가는 중심부로 나뉜다. 길리 T의 주민은 모두 800여 명 남짓. 주민들은 마을공동체에서 자체적인 규칙을 정해 섬을 관리하고 있다. 매연과 소음이 발생하는 이동 수단을 금지, 마차인 '찌모도(Cimodo)'를 이용하는 것 또한 공동체에서 정한 룰이다. 해안로는 여행자를 태우는 영업용으로 허가받은 찌모도만이, 주민들의 생활용 찌모도는 섬 중심부 길만을 사용하도록 나눠. 서로 혼잡을 피하도록 했다. 주민들의 자치로 만들어 온 '길리법' 으로 섬은 자연스레 치안과 안전 또한 유지하게 되었고, 경찰마저 필요 없는 곳이 되었다. 그렇다. 길리 T는 경찰이 없다. 서로 신뢰하고 협력하는 마을공동체의 역할이 길리 T, 지금의 특별한 모습을 만들어 준 건강한 동력이 되었다.
길리에선 지도도 특별한 계획도 필요하지 않다. 작은 섬은 화려한 휴양지가 가진 여러 가지 요소들은 부족할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그 요소들에 밀려난, 섬 본연의 모습. 그대로를 만날 수도 있다. 해안로를 따라 섬의 서쪽으로 가면 어느덧 인적마저 희미한. 한적한 바다에서 무인도 마냥 혼자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어떤 날은 마을 중심부로 향한 꼬불꼬불한 작은 오솔길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섬을 살아가는 로컬 사람들인 사삭족들을 만나기도.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그들의 일상을 가까이서 지켜보기도 한다. 지도 없이 때때로 길을 잃기도 하는데. 걱정할 건 없다. 파도 소리를 쫒아 걷다 보면 길은 어느새 해안로로 이어지며. 작은 섬에서 여행자의 행로는 오히려 자유롭다.
길리에는 섬을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지키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주민들로 구성된 길리의 환경보호단체인 '길리 에코 트러스트(Gili Eco Trust)'이다. 산호 군락과 바다거북이를 볼 수 있는 다이빙 포인트로 유명한 길리의 바다를 보호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산호초의 훼손을 막기 위한 장치들을 설치, 관리하고 있으며. 이곳을 찾는 여행자를 대상으로 월 1회 '에코데이'를 지정하여 섬 주변에 쓰레기 줍기를 독려하고 있다. 이 운동은 길리의 아름다운 바다에 반해 정착한 다이버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시작되어 더욱 의미가 있다. 다이빙 투어 또한 해양생물을 최대한 보호하는 기준에서 이루어지며, 참가 비용의 일부는 에코 트러스트 단체에 자동으로 적립이 된다. 이 단체는 해양생물뿐 아니라, 길리의 원주민인 고양이를 위한 '캣츠 오브 길리(cats of Gili)'를 운영, 정기적인 케어를 통해 고양이의 건강한 섬 생활을 돕고 있다.
<샤워타임> 길리 대부분의 숙소는 짠물 샤워만이 가능하다. 물이 귀한 섬이다 보니, 바닷물을 그대로 끌어 식수를 제외한 생활 용수로 사용한다. 익숙지 않은 짠물이 괴롭다가도, 지붕이 없는 샤워실 덕에 밤하늘 별빛과 함께하는 샤워는 이 곳 '샤워자'만의 특권이다. 때때로 도마뱀의 응큼한(날것의) 시선이 부담스럽지만, 길리의 샤워타임은 섬에 그대로 젖어드는 특별한 순간이 되어준다.
<빈땅타임> 길리 T에 머무르는 여행자들의 거의 유일한, 공통적인 일과는 선셋 타임. 날이 한풀 꺾이고, 선선한 오후가 되면 여행자는 천천히 자신의 자리를 찾아 모여든다. 섬에 선셋 타임은='빈땅타임', 인도네시아 국민 맥주 빈땅과 함께 맞는 일몰은 아주 천천히, 여행자의 오늘을 고루 비춰주며 저물어 간다. 바닷가에서 예쁜 조개껍데기를 찾듯, 오늘 지나간 찰나의 순간들을 하나하나 고르며 여행자는 자신의 '기억의 창고' 속에 섬세하게 오늘을 주워 모은다.
가장 아름다운 섬은, 찾을 수 없는 섬이지
_ 움베르트 에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