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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xperiencer May 22. 2020

나도 조이서처럼 될 줄 알았지

커리어우먼은 있는데 커리어맨은 왜 없죠? 어쨌든 회사가기 싫다는 이야기



커리어우먼에 대한 환상이 있다. 아니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커리어’ ‘우먼’이라는 조합도 이상한 단어에 마음이 동했을까 싶다. ‘커리어 맨’은 없는데, 일하는 여성은 이젠 당연한 세상인데 말이다. 내가 그린 커리어우먼은 <이태원 클라쓰>의 수아나 혹은 조이서처럼 이미 이십 대 후반에 높은 직책을 달고 돈을 많이 번, 예쁘게 화장을 하고 또각거리는 힐을 신고 다니는 모습이었다.

실제로 회사원이 되어보면 공감하겠지만 역시 드라마는 허구였다. 성장이 빠른 회사에 갔으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보통의 회사에서 입사 후 4~5년 만에 임원이 된다? 불가능이다. 예쁜 옷에 화장? 옷은 무조건 편하게, 매일 아침 일어나는 것도 피곤해져 화장은 점차 간소화됐다. 아이라인부터 섀도, 파운데이션까지 바르고 출근했던 때를 비웃듯 퇴사할 때쯤엔 칙칙한 내 모습을 못 견디겠어서 쿠션으로 대충 쓱 두드리고 가는 게 전부가 되었다. 출퇴근 길이 지옥철이니 힐 역시 요원했다. 발도 불편하지만 힐을 신을 날 지하철이 흔들릴 때 뒷사람 발을 밟으면...... 이렇게 커리어우먼의 환상이 잔뜩 깨진 채 퇴사를 했다.


뉴욕





여행을 하며 홍콩, 런던, 뉴욕 같은 메트로폴리탄 도시에 갈 때마다 큰 회사 앞을 일부러 찾아갔다. 회사원들을 관찰하는 게 유명한 관광지를 가는 것보다 재밌었다. 심지어 멕시코시티, 에콰도르 수도 키토 같은 도시에만 가도 많은 회사원을 볼 수 있었다. 예쁜 정장에 구두를 신고 노트북 가방을 메고 걸어가는 여자들을 보면 솔직히 멋있어 보였다. 내가 저랬을 땐 노트북 무거워 어깨 빠지겠다면서 온갖 불평은 다 해댔으면서, 그새 그걸 잊은 간사한 나란 녀석.

출퇴근, 점심시간을 제외하면 사무실에 박혀있기에 점심시간 언저리에 관찰 여행을 했다. 포장음식을 사서 바쁘게 걸어가는 사람들, 목에 사원증을 걸고 레스토랑에 줄을 서있는 사람들, 모두 피곤해 보였다. 정장을 입고 단정하게 꾸민 회사원들을 볼 때마다 대리만족을 느꼈다. 멀리서 보면 희극인데 가까이서 보면 비극인 삶인걸 너무나 잘 알기에. 부럽기보단 해방감이 훨씬 컸다. (런던 타워 브리지 앞 탬즈강변에서 점심시간에 조깅을 하는 사람들은 조금 부러웠다)


뉴욕 직장인들의 사랑방같던 브라이언트파크




그러다 미국에 두 달간 있으며 뉴욕, 시카고에서 일하거나 공부하는 지인들을 만나며 다시 커리어우먼 병이 도졌다. 변호사로 일하는 친구, 회사를 다니고 공부도 병행하는 친구들, 뉴욕으로 출장 온 친구, 유명한 대학원을 다니는 친구까지 저마다 너무도 멋있게 지내고 있었다.

더군다나 포틀랜드에서 일주일 동안 지낸 숙소 호스트 켈리는 재택근무하는 회계사였다. 에어비앤비를 운영하고 싶지만 회사를 다니면 호스팅이 힘들지 않을까 예상한 바를 완전히 비껴갔다. 켈리는 매일 반려견과 산책을 하고 요리를 하고 일도 하면서 게스트인 우리도 살뜰히 챙겼다.


미국에서의 만남은 멀리서 직장인들을 관찰하는 게 아니라 밀접 카메라로 들여본 기분이었다. 한때는 같은 학교에서 공부를 했던 친구들이 타지에서 멋진 커리어를 쌓고 있었다. ‘다시 회사원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굳게 닫혀있던 마음이 잠시 흔들렸다.


평화롭던 켈리의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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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생활에 잔뜩 질린 채 나왔다. 그때의 생활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건 지금도 유효하다. 상사, 사내정치, 싫은 사람과 먹어야 하는 점심, 회식, 1박 2일 워크숍, 내 마음대로 풀리지 않는 커리어, 육아 휴직을 길게 낼 수 있을까, 육아를 하며 일에서도 인정받으며 회사를 다닐 수 있을 것인가, 등등. 끝나지 않는 질문에 보이지 않는 답을 찾는 대신 월급보다 적더라도 재밌는 일을 자유롭게 하고 싶다. 그러다 보니 내 마음속엔 다시 회사에 돌아가게 된다면 그것은 실패라고 간주했다. 그런데 미국에 다녀와 멋지게 살고있는 친구들을 보니 실패를 재정의하게 됐다  다시 회사에 들어가도 괜찮을 것 같은데...?

세계여행이 끝나도 일 년 정도는 내 업을 찾을 수 있는 유예기간을 갖기로 했다. 회사원일 때 해보고 싶었던 다양한 일들의 조합으로 월급 이상을 버는 게 목표다. 그러다 안되면? 내년에 다시 회사로 들어가 일을 하면 된다. 경력이 있으니 신입 취준생보다는 조금은 수월하지 않을까. 다시 시작하면 처음엔 어렵겠지만 금세 또 적응해서 잘 적응할 거다. 그렇지만 아직은 회사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그럴 때마다 작년에 등단하자마자 대박이 난 소설 <일의 기쁨과 슬픔> 장류진 작가의 인터뷰를 떠올린다.

IT회사에서 7년 이상 소설과 전혀 상관없는 일을 했던 작가는 회사에서 일하는 만큼의 보상이 없어 소설을 쓰게 됐다고 했다. 입사 3~5년 차부터 시니어라면서 보상이 없는 일을 하는데 일과 동일시하는 자아를 자각하게 됐다고 했다. 돈 받는 만큼만 일하자는 생각이 들자 회사를 다니며 틈틈이 소설을 쓰다 퇴사를 했다. 1년 동안 제대로 해보고 다시 회사로 돌아가려고 했단다. 퇴사 후 문화센터에서 소설 강좌를 듣고 1년간 대학원에서 소설을 배우고서 데뷔하자마자 이렇게 스타가 됐다. 재취업 준비하고 포트폴리오 만들던 시기에 쓴 소설이라서 정신승리를 위해 이야기를 만들었다고.

세계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지 3일째 되던 날, 전 직장에서 재취업 면접을 보는 꿈을 꿨다. 싫어했던 사람이 면접관으로 들어왔고 무표정하게 앉아있었다. 더욱 최악인 것은 그 앞에서 웃으며 가증스럽게 면접을 보던 나였다. 꿈자리가 뒤숭숭하면 아침 일찍이라도 일어나야 덜 억울한데 늦잠까지 잤다. 줄어든 통장 잔고 때문에 다시 회사로 돌아가지 말자는 경각심이 생겼다. 경종을 울린 악몽 덕분에 마음을 더 독하게 잡을 수 있게 됐다. 쉬운 선택이라고 차악을 택하진 말자.




아직까지도 정장보다 편한 옷이, 가죽백보다 에코백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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