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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영랑 정원예술가 Feb 21. 2017

아버지의 꽃밭

꽃으로  나눈 아버지의 이야기 

아버지의 꽃 밭                                                                                                                                    

내 어린 시절 나의 아버지는 집안을 뺑뺑 돌며 사계절 꽃이 피도록 꽃밭을 가꾸어 주셨다. 세월이 지나 나도 

아버지의 꽃밭과 같은 정원을 꿈꾸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아버지가 그러셨던 것처럼 내 꽃밭에 

사람들이 찾아오고, 계절이 피고 지는 것을 함께 즐기기를 고대하며 꽃을 가꾸고 나무를 세우곤 한다. 


따스한 햇살에 졸며 봄에 기대어 있다, 퍼뜩 마당에 검불들을 걷어 태우고, 작년에 심어놓은 무늬 억새 사초를 잘라 태우고 야생화들 위에 가득 덮인 낙엽을 긁어 태워 나갔다. 

                                                                   

살짝 아침 안개를 물고 있는 겨울 짚과 이엉이, 

푸시시 푸시시 하얀 연기를 내뿜으며 가는 겨울에 

쿨럭 거렸다.

다시 한 생을 살라고 먼지처럼 바스러지는 재를 

꽃밭에 뿌려주었다. 넓은 마당이 좁다고 천방지축으로 뛰어노는 지니 혀니 강아지들의 똥도 거두어 여기저기 나무 근처에 묻어 주었다. 낙엽을 긁다 보니 

수선화 새싹이 벌써 3센티쯤 고개를 내밀고 올라온다. 신기해라.  다들 춥다고 그렇게 웅크리는데 이 여리고 어린 것들은 벌써 세상을 향해 맨 얼굴을 내밀며 씩씩한 행군이다. 이제 몇 주 후면 노란 수선화를 시작으로 미담재 마당에 꽃들이 아우성일 게다. 그 겨울을 견디고 결국 다시 봄이 온다. 영영 않올 것만 같더니만..

아마도 나의 아버지는 이렇게 어김없이 다시 고운 얼굴로 찾아오는 꽃들과의 사랑을 나누셨나 보다. 

그래서,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그 얼굴이 그리워서,  매해 초봄에서 겨울까지 그렇게 꽃밭에 머무셨나보다


오늘 문득 , 그 아버지의 꽃밭이 그립다.  나를 키워 이런 생각으로 다시 거기를, 아버지를 돌아보게 

하는 그 꽃밭으로 되돌아 가고 싶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어머니 아버지의 품을 대신하여. 


우리 에겐 누구나 그렇게 삶의 기억을 아름답게 채워주는 한 공간이 있다.  내겐 그것이 아버지의 꽃밭이다.


이른 봄 아침, 눈을 뜨면 동창을 핑크색으로 환히 밝히던 커다란 진달래가 있었다. 아침마다 핑크빛으로  

물들었던 유년의 시절이었다. 그리고 좀 커서 사춘기 시절부터 나의 별채처럼 쓰던 사랑채 문을 열고 내다

보면 마당 끝자락의 꽃밭에는 이른봄  복숭아꽃, 노랑 매화, 앵두로 시작하여 늦은 봄 까지 모란, 작약이 피고, 여름의 경계에  백합, 옥잠화, 원추리, 칸나 , 장다리가 피었다. 그리고 다시 가을 경계에 백일홍,  과꽃, 구절초, 노란 국화 등이 피어 찬서리가 내리고, 눈이 내릴 무렵까지 성성히 피어 있었다. 그리고 어떤 지나는 조경업자가 60년대 삼십만원에 팔라고 했던 멋지게 누워 자라던 운용 향나무,  눈속에 묻힌 그 푸른 향나무의 까실한 기운은 지금도 손끝에 알싸하게 느껴진다. 하다 못해  뒤 울타리 행랑채 아래에 꽈리와 족두리 꽃을 둘러 한치도 

빈틈없이 꽃이 피고 지게 해 주었던 아버지의 꽃밭을 겨우 그 꽃나무 높이 만한 키였을 때부터 맘껏 즐기고 

살았다. 이제서야 안다, 그게 얼마나 호사스러운 선물이었던가를...   

그 꽃들을 보며 나는 내 삶의 온갖 색들을 채워 나갔었다. 그리고  동리 오빠들도 그 아버지의 꽃 밭에서 추억과 기억을 남겨 두곤 했다.   어쩌다 사진사가  동리에 들어오는 날이면  꽃밭 한가운데 있던 바나나 나무 아래서 기념 사진을 찍곤했다.  겨울이면  

아버지는 애지중지 그 바나나 나무를 안방 웃목으로 들여놓아 살려 내셨었다. 그 시골에서 온실을 만들 줄 모르던 시절이라  커다란 고무 양동이에 담아 안방을 차지했던 그 나무에선 그다음 해 손가락 만한 바나나가 열려서 계속 삐질 삐질 열매를 밀어냈다. 그런데 다음해 여름  태풍이 불 때 그만 무거운 바나나 열매 덕분에 나무가 뚝 부러져 노란 바나나를    기다리던 나는 새끼 손가락 만한 바나나를 먹겠다고 벗겨 입에 넣었다 뱉아 버렸던 기억이 난다 .

그 사고 전까지는 가장 희안한 우리 동네 나무였던 그 바나나 나무,아버지는 도대체 어떻게 그 나무를 키울 생각을 하셨을까? 

지금은,  내가 아버지처럼 나무와 꽃에 말 못 

                                                                                           할 사랑을 퍼부으며 나누고 있다. 숙명일까?

아버지의 그리움을 그렇게 달래는 것일까?  어려선 그렇게 못되게 싸웠는데. 신여성을 원치 않으셨던 아버지,

언문 떼었으니 조신히 있다 시집가라던 소망에 진저리를 치며 어긋나게 굴었던 나는 이제 아버지의 길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자라고 보니  가장 많은  생각을 덮고 있는 것, 가장 많은 사랑을 나눴던 것이  결국 아버지의 꽃밭이라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생을 살며 그토록 아름다운 것을 그렇게 오래 보고 있을 기회가 바로    거기였으므로. 


나는 내 삶의 가장 아름다운 것을 그것 이상 알지 못한다. 

꽃밭, 정원!

나도  누군가의 꽃밭이 될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사람이 꽃밭이, 정원이 되어주는 꿈     


아버지의   꽃밭처럼 사람들을 불러들이고, 머물게 하고, 자기의 추억을 만들어 조금 덜 외롭게 

살게 해주는 그런  일은 참 행복한 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또한 나를 덜 외롭게도 할 것이라는 살짝의  이기심도  끼워넣어 본다.   


 2017. 02.21 영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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