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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미 Oct 19. 2024

책은 생존과 관련되어 있었다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은 주변에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좋은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마침 내 주변에는 콘도 마리에의 교육을 받고 정리 컨설턴트로 활동하는, 신뢰할 수 있고 따스한 분이 계셨다. 그 분께 넌지시 나의 상황에 대해 알리며 조언을 구해보았다.


"저 진짜 책에 파묻혀서 질식사할 것 같아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왜 이렇게 힘든 걸까요?"


보통 '정리'라는 말을 들으면 물건을 갖다 버리는 걸 떠올리기 마련이다. 실제로 가장 빠르고 효과적으로 집을 정리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아닌가. 그래서 나 또한 물건을 버리라는 얘기를 듣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컨설턴트분은 내게 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셨다.


"왜 단미님은 책을 그렇게 많이 사게 된 걸까요? 책은 단미님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책은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 막막하지만 피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책을 싫어하는 편은 아니었다. 오히려 좋아하는 편이었다. 다만 어릴 때는 책 편식을 했다. 급식에서 꼭 양파, 버섯 같이 흐물흐물한 식재료를 먹지 못하고 그대로 남겨 식판을 검사하는 선생님께 맨날 혼나던 아이처럼. 책 또한 좋아하는 책만 읽었던 것이다. 주로 만화책이나 소설책 같은 것들로.


그러다 어느새 책은 학습서 영역으로 넘어왔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야자 시간에 소설책을 읽고 있던 나를 발견한 담임 선생님은 친구들 앞에서 내 머리를 책 모서리로 내려치셨다. 지금 생각하면 학부모 항의 전화까지 받을 수 있는 심각한 행동이었지만 그 당시에는 교사의 폭력이 체벌이라는 이름으로 당위성을 갖던 시기였다. 조용하던 자습 시간에 소설책 안의 세계를 자유롭게 유랑하다 갑자기 정수리에서 느껴지던 짜릿한 아픔. 그리고 모든 반 친구들이 일제히 나를 지켜보던 그 시선까지. 얼굴이 뜨거워지고 눈에 눈물이 치솟던, 지금도 잊을 수 없던 그 기억 이후로 나는 소설책을 끊었다. 읽고 싶은 마음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그 후 대학교와 대학원까지, 내게 책이라는 건 공부와 관련된 거였다. 성공하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성공이란 게 너무 모호해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공부와 그게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는 몰랐지만 어른들 말이 맞을 거니까. 그런 마음으로 무조건 읽고 공부하고, 읽고 공부했다.




"저에게 책은 생존 그 자체에 대한 거에요."


잠깐의 침묵 후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스스로도 놀랄 수밖에 없는 내용이었다. 책과 생존. 언뜻 보면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조합이다. 음식과 생존, 안전과 생존, 빈곤과 생존 이런 거라면 몰라도 책과 생존이라니. 이 부분을 깊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잠깐 다시 고등학생 시절로 돌아가봐야 할 것 같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참 음침했다. 소심하고, 사람들에게 말을 잘 걸지 못하고, 늘 주눅들어 있었던 아이.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참 가난하게 살았다. 살아 생전 술만 마시고 엄마에게 폭력까지 휘두르던 아버지는 빚 말고 남긴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그랬을까. 5학년 때는 왕따를 당했다. 정말 오랫동안, 내가 왜 그 때 왕따를 당했던 건지 이유를 찾으려고 했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남자 아이들과 친해서, 작고 말라서, 옷이 꾀죄죄해서, 그냥 만만해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이유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설령 명확한 이유가 있었다고 해도 내가 받은 상처는 그대로일 수밖에 없었다.


공부머리는 있었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게 중학교 때는 공부를 특별히 안 해도 전교 등수가 괜찮았다. 그러나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나서 불행이 시작되었다. 읽고 싶던 만화책을 실컷 읽고, 친구들과 만화 동아리 활동을 하며 자유롭게 살던 나는 고등학교의 권위적이고 통제적인 분위기에 적응을 하지 못했다. 반 친구들이 공부를 할 때 나는 소설책을 읽었고, 결국 성적은 우수수 떨어져 결국 아무도 나를 기억하지 못하게 되었다. 심지어 반 선생님까지도. 결국 야간 자율학습을 신청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밴드를 하며 기타를 치러 다녔다. 기타에 대한 의지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기에 그마저도 엄청 잘하지는 못했지만 지금 생각해봐도 이 부분은 어느 정도 나다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은 결국 튈 수밖에 없다. 어느새 나는 반에서 은따를 당하고 있었다. 몇몇 아이들은 대놓고 나에게 불쾌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집에 가면 비가 새는 낡은 단칸방의 축축한 냄새가 싫어 밖에 나가고 싶고, 학교에 가면 눈에 보이지 않는 서열과 압박감에 시달려 어디에도 내가 있을 곳이 없다고 느껴 자꾸 밖으로 내돌았던 것 같다.


공부라는 걸 다시 시작한 것도 남보다 훨씬 늦은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였다. "이대로는 대학도 못 간다"는 담임 선생님의 말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당시 우리는 매일 "좋은 대학에 가야 잘 살 수 있다", "좋은 대학에 가야 성공한다"라는 말을 들으며 대학 = 성공 포르노에 찌들어 있었다. 똑같은 말을 계속 들으면 자연스럽게 세뇌되는 것처럼 대학에 못 간다는 말은 성공하지 못한다는 말이고, 그 말은 결국 인생을 망친다는 말과 똑같았다. 그래서 다시 공부를 시작했고, 책과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이번엔 읽는 것보다는 문제를 푸는 것 위주로.




정말 가고 싶었던 서울의 한 대학 논술 시험에 떨어지고, 지방 국립대와 사립대 중 결국 사립대를 선택해 들어간 것은 장학금 때문이었다. 내 인생을 가로막는 것은 늘 돈이었다. 재수를 해서라도 서울에 가야한다면 그 과정에서 드는 많은 돈을 어떻게 충당할지에 대해 생각하면 막막했다. 아무도 그게 가능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심지어 친척조차도 "그냥 빨리 취업해서 엄마를 편하게 해주라"고 했다. 내 미래에 대해 생각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스스로 알아내야 했다. 원하던 서울의 대학교와 지방 대학교의 커리큘럼을 다 비교해보았는데 배우는 과목이 거진 다 똑같았다. 그래서 어딜 가든 배울 수 있는 건 다 배우고 실력을 키우자는 생각이었다. 그 때는 환경과 모이는 사람들의 중요성을 몰랐던 것이다. 참 어리고 미숙했다.


이 때부터, 아니면 훨씬 오래 전부터, 나의 머릿속에는 단 한 가지 신념이 굳게 자리잡기 시작했다. "알아서 잘해야 해"라는. 세상에는 아무도 나를 도와줄 수 없다, 엄마도 바쁘고 언니는 자기 문제로 여력이 없고, 교사들은 성적이라는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기 때문에 내가 나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신념, 혹은 다짐 같은 것. 오랫동안 사람들과 어울리기 힘들었던 것도 이 신념으로 인해 진실된 나를 보여주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대학교에 들어가 하고 싶은 공부를 시작하니 성적이 내려올 줄을 몰랐다. 그보다 대학교의 공부 방식이 너무나 잘 맞았다. 4지 선다가 아닌 주관식. 레포트 같이 내 생각을 쓰는 과제도 많았다. 정해진 하나의 답을 맞추는 것보다는 스스로 생각하고 답을 찾아가는 공부 방식이 스스로에게 훨씬 잘 맞았던 것이다. 이 때부터 다시 책을 많이 읽기 시작했다. 공부를 잘하니까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고, 교수님들의 관심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시기의 내게 책은 공부였고, 공부는 나를 인정받게 하는 수단이었고, 나를 인정받게 하는 수단이 결국 나를 지키는 수단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책은 나를 지키는 수단, 즉 생존 그 자체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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