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렌스의 집엔 아무도 없었다

사냥을 떠난 그녀는 우리에게 통째로 집을 맡겼다

by 베르고트

로렌스의 집엔 아무도 없었다. 이 집의 주인만 부재중은 아니었다.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도시 외곽으로 진입할 때도, 거대한 마트와 자동차 판매장이 늘어선 아울렛 같은 거리를 지날 때도, 내비게이션이 목적지가 가까워졌음을 알리며 쓸쓸한 주택가 한 편에 우리를 내려줄 때도 마치 마을 전체가 부재중인 듯한 한적함을 느꼈다. 거실 불은 꺼져 있었지만 로렌스의 집 뒤편 정원에 켜진 전등만은 끈기 있게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미리 알려준 비밀 공간에서 열쇠를 찾았다. 문손잡이를 돌리자 영화에서나 보던 중산층 가정이 눈앞에 나타났다. 사진으로 미리 보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고, 입을 떡 벌린 채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부엌 식탁 위에는 로렌스가 남긴 메모가 있었다. 남자친구와 주말 동안 사냥을 가게 됐고, 아마도 서로 얼굴을 보진 못하겠지만 즐겁게 지내다 가라고. 부엌은 마음껏 써도 된다고. 방만 하나 빌리기로 했는데 얼떨결에 집 전체를 빌리게 된 것이다. 그것도 두 사람도 적적하다 싶을 만큼 엄청나게 큰 집을.


IMG_0634 복사본_ret.jpg
IMG_0636_ret.jpg
IMG_0637 복사본_ret.jpg


에어비앤비를 통해 빌린 집이었으므로 로렌스가 정확히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코일식 전기 오븐 레인지, 냉장고, 식탁, 싱크대, 의자, 접대용 테이블, 텔레비전, 텔레비전에 연결해 둔 오래된 전축과 스피커, 영화 감상을 위한 맥북 프로, 소파, 버티컬, 그 외 감탄을 자아내는 묵직한 식기와 접시, 소스와 향신료 통 등. 그 모든 것이 실용적이면서도 집 주인의 고급스러운 취향을 반영하고 있었다. 솔직히 처음엔 두려웠다. 도대체 이국땅에서 날아온 여행자를 어떻게 믿고 이렇게 좋은 집을 내어준 것일까? 밤사이에 그들이 엽총을 들고 돌아와 사슴 대신 다른 사냥감을 찾는 건 아닐까?


익숙해지는 덴 한두 시간 정도 걸렸다. 숱한 스릴러 영화가 잉태시킨 두려움도 한쪽 구석으로 물러났다. 슬슬 여유가 생기자 내 평생 이런 곳에서 살아볼 기회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는데, 거의 체념에 가까운 낙천성으로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집안의 모든 것이 덜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기대도 안 한 추첨식에서 고급 호텔 숙박권을 따낸 행운아와 다를 게 무엇이냐고, 나도 이틀 밤 정도는 이런 집에서 살 자격이 있다고 믿기로 했다.



숟가락이나 주전자 하나조차도 최고는 아니더라도 최상에 가깝게 소유하려는 누군가의 취향을 본다. 어떤 완벽한 입맛이 느껴진다. 빌린 옷처럼 내게는 없는 그 취향을 양어깨에 걸치고 거울 앞에 선다. 그렇게 이리저리 몸을 돌리며 잠시 황홀한 꿈을 꾸어보기도 한다. 이 집에서도 M은 요리를 한다. 그녀가 원하는 모든 조리기구가 다 갖춰져 있어서 몇 년 전 피렌체에서 요리 유학을 하면서 익혔던 실력을 마음껏 뽐내 본다. 리소토용 쌀을 사서 냄비에 밥을 짓고, 가장 마음에 드는 접시를 골라 볶은 아스파라거스를 올려 장식한다. 나는 어느 작은 로스터리 카페에서 사 왔을 것 같은 원두 가루를 덜어 가정용 에스프레소 머신에 커피를 내리고, 손잡이 안에 세제가 들어있어 바로 거품이 일어나는 수세미로 기분 좋게 설거지를 한다. 마트에서 두 번째로 저렴한 와인을 사서 협탁 위에 올려놓고 노트북을 연결한 대형 텔레비전을 통해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을」 감상한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시애틀이나 볼티모어 같은 도시가 집에서 볼 때보다 훨씬 가까이 있다고 생각하자, 스물두 번쯤 다시 보는 이 영화가 더 실감이 나고 실제로 저런 기적이 우리에게도 벌어질 것만 같다.


IMG_0831_ret.jpg


당시엔 에어비앤비의 광고 문구가 “여행은 살아보는 거야.”까지 발전하진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적확한 표현을 입 밖으로 꺼내진 못했다. 그저 여행 중에 타인의 삶, 타인의 일상을 체험한다는 것은 사람이 많이 모이는 거리나 랜드마크, 또는 유명한 식당이 아닌, 바로 타인의 집에서 가장 근접할 수 있는 경험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이해했을 따름이었다. 반쯤은 (글자 그대로) 남의 안방에 들어온 듯한 불편함과 반쯤은 내 방에 들어온 듯한 편안함을 동시에 느끼면서 말이다.


로렌스의 집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곳은 부엌이었다. 반쯤 비워진 신선식품과 유제품에서 그들의 식습관을 헤아려 보고, 슬쩍 한 칸을 빌려 우리가 사 온 식자재를 채우는 일도 즐거웠다. 특히 ‘오아시스’ 오렌지 주스와 지방 2%의 ‘케봉’ 우유를 나란히 세울 수 있는 공간 만큼은 양보할 수 없었다. 다음엔 (다음이라는 말에서 풍기는 미약한 희망의 기운을 즐기자) 두 연인이 있을 때 머물러 함께 저녁이라도 지어 먹었으면 좋겠다 싶었다. 설거지는 저절로 거품이 이는 수세미를 든 내 몫일 것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