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되어 선물해 준 엄마라는 이름
자궁나이 호르몬 걱정한 게 무색하게 아이는 갑자기 찾아왔다. 모든 걸 포기하고 나서야 오히려 마음이 편해진 게 더 도움이 됐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마지막 기회였을 임신 테스트기에 뜬 두줄.
멍하니 보고 앉아서 그런 생각을 했다.
‘아 누구 하나 쉽게 얻지 못했으니 이 모든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말고 그렇게 사랑으로 키워야 하는 거구나.’
또 하나의 기적으로 나에게 와준 이 아이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마음에 새기고 새겼다.
물론 입덧으로 토를 하다 하다 식도가 긁혀 피를 토하기도 했고, 첫째 공주가 있는 상황에서 임산부의 삶은 녹록지 않았지만.. 그래도 감사하게 생각했다.
이따금씩 친정엄마가 있으면 좋겠다고, 나이가 들어서 이제 어른이니까 더 이상 안 보고 싶을 줄 알았던 엄마가 사무치던 날도 있었다.
그러나 그 야속한 시간은 내 마음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그렇게 36주를 지나던 어느 날.
뭐가 이리 급했는지 이슬이 비쳤다.
예상보다 2주 이르게 만난 아기. 요 녀석을 안 낳았음 어쩔 뻔했나 싶게 예쁘고 사랑스러운 공주님이었다.
내심 총총이 생각에 아들을 바라기도 했었지만, 얼굴을 보는 순간 아들이든 딸이든 중요하지 않았다.
예전에 그런 이야길 들은 적이 있었는데, 자식이 많던 그 시절에 형제들이 퐁당퐁당으로 닮는다는 이야기.
첫째 셋째가 닮고, 둘째 넷째가 닮는다는 말.
나에게는 셋째인 이 아이는 총총이와 판박이었다.
태어난 몸무게, 남편을 닮은 코, 날 닮은 눈썹까지.
사진이 남아있다면, 그대로 보여주도 싶었을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그리고 이 아이의 혈액형도 O형.
내가 우스개 소리로 말했던 이야기가 문득 떠올랐다.
만약에 총총이 이후로 O형 아이가
또 태어난다면 다시 총총이가 온 거라고
생각할 거 같아.
하지만 신기하게도 우리 아이들 모두 O형이었다.
누구도 치우치지 않고 예뻐해 주길 바라는 총총이의 안배같이 느껴졌다.
엄마! 동생들 차별 말고 예뻐해 주세요.라는 사인을 이렇게 남긴 게 아닐까.
친정엄마가 없으니 복숭아를 봐줄 수 없어, 시댁에서 몸조리를 했다.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학을 뗄일일지 모르겠지만 일까지 쉬시면서 며느리를 위해 몸조리를 해주셔서 감사한 마음이 컸다.
어머님 덕에 거의 2주 넘는 시간을 조리하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
그간 힘들고 고된 일이 많지만, 내 인생에 복도 참 많구나 하고 생각했다.
품에 안긴 신생아의 고소한 냄새. 내 손을 꼭 잡은 고사리 손이 있으니 천군만마를 얻은 듯 행복했다.
둘을 키우는 일은 때때로 나 자신을 몹시도 시험하게 하는 일이었다.
둘째 젖을 물린 상태에서 복숭아의 밥을 떠먹이며, 나는 한 끼도 못 먹은 걸 깨달았을 때.
또 사치스러운 불행을 느꼈다.
행복하면서도 불행했고, 기운이 나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주춤할 시간 따위는 허락되지 않았고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커갔다.
복숭아와는 다른 앙칼진 성격에 둘째 공주는 블루베리를 사랑하는 톡톡 튀는 아이였다.
신중하기보단 말괄량이었고, 언니를 기어코 이겨먹으려는 앙칼진 공주님.
웬만한 남자아이 같은 활동력으로 내 혼을 쏙 빼놓은 공주님까지 키우니 또다시 내 몸상태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다시 한약을 지어서 먹고 몸을 챙기려고 노력했지만, 이미 타격을 입은 자궁은 폐업을 자주 했다.
여자에게 자궁이 단순히 임신 출산만을 하는 기관이 아닌지라, 호르몬 발란스가 자주 무너져서 골골댄 지 꽤 오래됐지만 후회는 없다.
이른 결혼에 30살 전 출산을 다 끝낸 나에게 친구들은 얼른 키우고 놀러 다니라고 이야기했었다.
그게 가장 큰 위안이 되기도 했다.
어느 날은 그 위안도 사치스러워..‘다 키우고 놀러 다닐 건강이 없으면.. 아무 소용없는 이야기’란 생각이 들어 우울하기도 했다.
2024년 한 해 동안 생리를 한번 했고, 2025년 올해도 아직 감감무소식인 대자연이 야속할 때도 많이 있다.
그럼에도 나에게 와준 소중한 두 딸들을 보고 있노라면 모두 보상받은 기분이 든다.
혹시 지금 나와 비슷한 친구들이 이 글을 읽는다면,
그저 이런 사람도 있다고 이야기해 주고 싶었다.
지나고 나니, 그 상처들이 모두 훈장이 되었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