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유 Aug 28. 2024

시오타 강변의 우편배달부

여행 속 영화, 영화 속 여행


12월이 가까워도 우레시노의 단풍잎은 붉기만 했다. 우레시노는 후쿠오카 공항에서 버스로 한 시간 사십 분 거리에 있는 온천마을이다. 작년에 늦가을의 우레시노에서 별다른 계획 없이 느긋하게 온천을 즐기고 주변을 돌아보는 일정으로 떠났었다.


온천 마을의 중심가는 아담하고 조용해서 산책하기에 더없이 좋았다. 걷다가 곳곳에 숨어있는 족욕탕을 만나면 걸음을 멈추고 따끈한 온천수에 발을 담그는 재미도 있었다. 밤이면 상점들이 일찍 문을 닫아 도시와는 다른 밀도의 어둠이 마을을 차지했다.


다음날 아침에는 마을의 버스 터미널에 비치된 관광 지도에서 본 토도로키 폭포에 가기로 했다. 토도로키 폭포는 제주 올레를 벤치마킹한 규슈 올레 코스에 포함된 곳이었다. 올레 코스라면 걷기에 평탄하리라는 생각과 두 줄기의 폭포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들에 눈길이 끌렸다.


여유롭게 아침을 먹고 료칸을 나와 작은 찻집에 들려 커피를 마신 후 길을 나섰다. 새 술이 나왔다고 알리는 삼나무 장식 스기타마가 매달린 일본식 양조장도 들여다보고, 작은 식당을 만나면 무슨 메뉴를 파는 곳인지 궁금해서 차양 밑을 기웃거리기도 했다. 온천 다리라는 이름의 붉은색 다리에서 사진도 찍었다.


시오타강을 거슬러 걸어가는데 강 양쪽으로 굵은 벚나무가 길게 이어졌다. 봄

이면 흐드러지게 피어난 벚꽃이 강물을 가득 비추는 광경을 상상하며 여기저기 한눈을 팔다가 폭포로 가는 길을 잃었다. 이리저리 둘러봐도 지나가는 사람조차 보이지 않았다. 하필 인터넷도 원활하지 못해 구글맵은 작동하지 않았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 한참을 헤매었다.


다행히 주택가 골목에서 진남색 유니폼을 입고 하얀색 헬멧을 쓴 우편배달부를 만났다. 그는 소형 오토바이를 세워두고 우편물을 분류하고 있었다. 우편배달부는 영어로 길을 묻는 우리의 ‘토도로키'라는 말을 알아듣은 듯 뭔가 이리저리 설명하려고 했다.


잠깐 생각하더니 갑자기 옆으로 맨 가죽가방에서 명함 크기의 종이 한 장과 펜을 꺼낸다. 우편물 박스 위에 고개를 숙인 채 한참을 공들여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우리가 서있는 곳을 까만 점으로 표시하고 갈림길을 그린 후 점을 시작으로 짧은 화살표를 그렸다. 갈림길 가운데에는 타원형의 작은 동그라미를, 그 동그라미 안에 더 작은 동그라미 세 개를 그렸다. 그 동그라미들이 보이면 왼쪽으로 가라며 처음에 그린 화살표보다 조금 더 긴 화살표를 표시했다.


그림 속의 동그라미들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몰랐지만 화살표가 이끄는 대로 걸어가 보기로 했다. 우편배달부가 우편을 접수하는 용도로 쓸 것 같은 종이에 그려진 약도는 컬러로 인쇄된 관광 지도보다 더 안심이 되었다. 뒤돌아보니 우편배달부는 우리 일행이 제대로 가고 있는지 확인하고서야 오토바이에 올라 손을 흔들며 돌아섰다. 우리도 웃으며 그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십여 분쯤 더 걸어가니 작은 다리 건너편에 갈림길이 나왔고 드디어 그림 속의 동그라미를 만났다. 다리 건너편에는 삼색 신호등이 서 있었다. 우편배달부는 약도에 콩알 반쪽만 한 타원형 동그라미 속에 좁쌀 크기로 세 개의 동그라미를 넣어 신호등을 표현한 것이다. 보물찾기 놀이하다가 수풀에 숨겨진 보물을 발견한 것처럼 신이 나서 웃었다. 폭포를 향해 걸어가는 길이 우리 동네 골목길만큼 친근하게 다가왔다.


우편배달부가 그려준 그림을 따라 찾아간 토도로키 폭포는 더없이 좋을 수밖에. 높거나 웅장하진 않아도 두 개의 폭포가 수풀 사이로 요란한 소리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강바닥 근처까지 내려갈 수 있게 돌계단이 만들어져 있어서 아주 가까이에서 폭포를 마주 보았다.



마침 수심도 얕아져서 빨래판처럼 드러난 지질 형상이 매우 독특해 보였다. 폭포가 만들어 내는 물의 흐름대로 거대한 물살 모양으로 깎여있는 바닥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폭포 주변의 주상절리와 푸른색 말 모양의 규슈 올레 표지판도 보였다. 제주도와 비슷한 풍경을 일본에서 만나니 정겨우면서도 반가웠다. 폭포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고 흐뭇한 기분으로 강이 흐르는 길을 따라 걸어 내려왔다.



시오타 강변에서 우편배달부를 만난 후, 1994년에 개봉한 영화 ‘일 포스티노(Il postino)’를 떠올렸다. ‘일 포스티노’는 이탈리아어로 ‘우편배달부'라는 뜻으로 이탈리아의 카프리섬에서 만난 칠레 국민시인 파블로 네루다와 마을의 우편배달부 마리오의 이야기이다. 각지에서 네루다에게 보내오는 편지를 배달하면서 마리오와 시인은 친구가 되어 하루하루 우정을 쌓아간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서 시인과 우편배달부가 사랑과 시(詩)에 대해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온다. 네루다는 마리오에게 시적 표현인 메타포(은유)에 대해 가르쳐 준다. 예를 들어 ‘하늘이 운다'라는 표현은 ‘비가 온다’라는 뜻이라며 시인은 마리오가 은유에 대해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해 준다. 마리오는 짝사랑하는 베아트리체에게 시(詩)를 읊으며 사랑의 감정을 전해 결혼에 성공한다.


<일 포스티노 스틸컷 >


물살이 비늘처럼 반짝거리는 카프리섬의 풍광에 우편배달부 마리오의 자전거가 더해진 장면은 아름다워서 눈이 부셨다. “시(詩)는 설명하면 진부해지고 말아.” 같은 대사는 시를 공부하고 시를 쓰는 사람으로서 새겨들을 말이었다. 게다가 시를 통해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까지 열리는 거대한 시의 힘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영화라서 더욱 좋았다.


칠레로 돌아간 시인이 자신과 섬에서의 추억을 떠올리도록 마리오는 섬마을 곳곳의 아름다운 소리를 녹음한다. 파도 소리, 교회의 종소리,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 아버지의 슬픈 그물(슬픈 그물이라니, 어느새 우편배달부 마리오는 시인이 되어 있었다!) 등. 마리오가 죽은 후에 전해진 녹음테이프를 듣는 시인의 모습을 보며, 너무 늦게 섬을 찾은 시인과 마리오의 죽음이 안타까워서 눈물을 훌쩍였었다.


<영화 스틸컷. 카프리섬의 아름다운 소리를 녹음하는 장면>


시오타 강변의 우편배달부와 신호등의 사진을 남기지 못해 아쉽다. 돌아와 그가 그려준 약도에 한글로 ‘폭포’와 ‘신호등’이라 쓰고 그날의 날짜를 적어 두었다. 보물지도처럼 간직하기로 했다. 우편배달부가 고심하느라 이마를 살짝 찡그리며 볼펜을 꽉 쥐고 그린 신호등을 보면 진심 어린 정성이 느껴진다.


 일 포스티노 영화 속 마리오가 시인에게 지녔던 마음도, 시오타 강변의 우편배달부가 길을 묻는 여행자에게 보여준 친절도 내게는 모두 지극해 보였다. 언어가 달라도 전해오는 따스함을 만나면 반가워서 덥석 손을 잡듯 마음이 열린다. 한여름 벌건 얼굴로 집에 돌아와 냉장고 양문을 열고 얼굴을 식힐 때처럼 기분이 좋아진다.


작은 온천마을 우레시노와 오래된 벚나무가 즐비했던 시오타강, 길을 물어 찾아간 토도로키 폭포를 떠올리면 가슴속에 환하게 불이 켜진다. 그런 온기들이 좋아서 자꾸만 여행을 떠나는지도 모르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