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미역국의 온도

이전에 올린 글들을 새 북으로 옮겼습니다 :)

by 소이

선배에게 문자가 왔다.


“잘 지냈어? 난 요즘 너무 바빴어.

사실 오늘 내 생일인데, 미역국 한 그릇도 못 먹었네.

독거노인 신세지 뭐. 저녁엔 집에서 혼밥 해야겠다.

혹시… 미역국 끓일 줄 알아?”


그 문자를 읽고 마음이 복잡해졌다.

아무리 선배라지만 남자 집에 가는 건 부담스러웠다. 만약 이성 관계로 이어진다면?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런데도 문자 속 목소리가 왠지 쓸쓸하게 들려, 결국 퇴근 후 장을 보러 마트로 향했다. 왠지 선배한테 필요할 것 같은 물건도 몇 가지 집게 되었다.


집 비밀번호를 알려준 선배 덕에 먼저 들어갔는데, 의외였다. 남자 혼자 사는 집 치고 너무 깨끗했다.

주중에 한두 번 업체 아주머니가 청소를 해주신다더니, 딱 그런 느낌이었다. 다만 아침에 급하게 옷 고르다 두고 간 듯 티셔츠 몇 장이 널브러져 있었다. 무심코 접어두다 보니 모두 같은 브랜드였다.

‘아, 이 브랜드 좋아하나 보다’

깨끗하게 개어두었다.

부엌에 서서 미역국을 끓였다. 쌓인 설거지를 먼저 정리하고, 인덕션 위에 냄비를 올렸다. 참기름에 올리브 오일을 살짝 섞어 달군 뒤, 붉은 고기를 넣어 간장과 함께 볶았다. 오늘따라 고기가 유난히 선홍빛이었다. 불려둔 미역을 넣고 다시 참기름에 볶다가 물을 붓고, 참치액과 소금으로 간을 보았다.

곧 보글보글 소리가 부엌에 가득 퍼졌다.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선배가 들어왔다. 늘 먼저 농담을 던질 것 같던 밝은 모습은 사라지고

무척 피곤한 얼굴로 겨우겨우 걸어 들어왔다. 잠깐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소박한 상을 차리자 선배가 국을 한 숟가락 떴다.

그리고는 금세 눈가가 촉촉해졌다.


“아… 미역국이 이렇게 맛있을 수가 있구나.”


그날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선배 옷 브랜드를 봤다고 하자, 선배는 괜히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그거 그냥 시간 없어서 싸구려로 산 거야.”

아마 자존심이 살짝 상했던 모양이다.

(나중에 소개팅에 입을 옷을 산다며 날 불러내선,

“이건 네게 잘 어울릴 것 같아” 하며

내 옷을 자꾸 골라주고 사주려던 귀여운 모습이

지금은 따뜻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식사가 끝난 뒤, 나는 뒷정리를 했다.

앞치마를 벗고 나가려는데 선배가 불쑥 내 팔목을 잡았다.


“혹시… 라면 먹고 갈래?”


“엥? 방금 밥 먹었잖아요.”


“아… 그럼 만두라도. 내가 만두 잘 굽거든.”


선배는 기름을 두른 팬에 만두를 올리고, 중간에 물을 살짝 부었다.

“이렇게 해야 바삭하면서도 속은 촉촉하지.”

그 표정은 마치 만두 장인 같았다.

정말, 내가 태어나 먹어본 만두 중 제일 맛있었다.


이제는 정말 가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선배는 주차장에서 늘 잠들어 있는 아끼는 차로

나를 바래다주겠다 했다.


선배가 아끼는 차라 신발을 털고 조심스레 탔는데,

그 모습에 선배가 씩 웃더니 말했다.

“뭘 그렇게까지 해. 막 타도 돼, 과자도 먹고.”

밤의 한강변은 유난히 아름다웠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창밖을 바라봤다.

내릴 때, 선배가 말했다.

“고마워. 이렇게 매일매일 따뜻하면 좋겠다.”


“그래요. 언제든 시간 맞으면 불러요, 선배.”


씩 웃으며 차에서 내린 나는,

나름 의리를 지켰다는 뿌듯함을 느꼈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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