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알아들은 것처럼 대답해놓고 일은 왜 이렇게 해왔냐고요. 내 말 못 알아들은 거잖아?"
무섭게 정색한 표정을 한 팀장님의 앙칼진 목소리가 내 마음을 베었다.
"아, 네... 죄송합니다. 제가 다시 확인해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단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다시 확인해보겠다며 나는 내 자리로 돌아왔다. 민망함과 수치심으로 그 짧은 몇 초 만에 내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순간 멍해져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성인이 되고서 이렇게 공개적으로 질책받는 건 처음이었다. 함께 일하는 직원들도 팀장님의 언성을 못 들었을 리 없었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각자 모니터 화면만 볼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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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직으로 새로운 회사에 이직했고, 팀장님과는 처음 맞춰보는 프로젝트였다. 아무래도 경력직이었고 나름 동종 업계에서는 꽤 이름 있는 회사에 다녔으니 나에 대한 기대치가 높았던 것 같다. 그런데 자신이 생각했던 것만큼 성과를 내지 못하니 실망스러웠을 테고, 맡긴 일도 제대로 못하는 듯 보여 화가 났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욱하는 감정에 사람들 앞에서 화를 냈겠지.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뒤엉켰고,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모니터 화면만 멍하니 바라봤다. 그때, 팀장님이 내 자리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회의실로 따로 나를 불렀다.
"소소한담 씨, 내 말 못 알아듣겠어요? 내 말이 어려워요?"
아까보다는 차분해진 목소리였지만 여전히 화가 나있었다.
"아, 아무래도 팀장님이 얘기해주신 부분과 제가 이해했던 부분이 달랐던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앞으로 좀 더 신경 쓰겠습니다." 그리고는 한마디 덧붙였다.
"... 그런데 제가 혹시 말귀를 잘 못 알아듣나요?"
무섭게 꾸짖고 질책하는 팀장님 앞에서 나는 질문했다. '아니, 지금은 실수했지만 그래도 너는 잘하고 있어.'라는 말을 듣고 싶어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나왔는지도 모른다. 이번만 실수했다고. 좀 더 신경 쓰면 잘할 거라고. 그런 말을 기대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완전히 반대의 것이었다.
"네, 말귀 못 알아들어요."
충격이었다. 아무리 팀원이 부족하다 할지라도 '너 일 못해, 내가 하는 말 못 알아들어.'라고 당사자 앞에서 직접 말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다. 나도 내가 부족한 거 알고 있는데, 이렇게 대놓고 말할 정도로 내가 못하나 보다, 라는 자책과 함께 자괴감이 밀려왔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저 죄송하다는 말밖에 생각이 나질 않았다. 나는 '죄송합니다. 다음부턴 잘하겠습니다.'라고 말씀드리고는 내 자리로 돌아왔다. 어디 가서 이렇게 대놓고 혼나 본 적은 처음이었다. 충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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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딩동- 하며 사내 메신저 알람이 울렸다. 팀장님이었다.
'소소한담 씨, 차분하게 일 잘하고 있으니 걱정마요.'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아까는 그렇게 대놓고 직설적으로 얘기하며 상처주더니. 이제 와서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혼내고 직언했던 게 내심 마음에 걸렸나 보다. 눈물이 핑-돌았다. 이미 나는 내 자존감에 아주 큰 타격을 입었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래, 이걸로 됐어, 괜찮아.'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는 수밖에. 그 일은 그렇게 마무리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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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것은 트라우마의 시작이었다.
누군가에게 그렇게 공개적으로 혼나고 비난받는 일이 처음이었던 내게 그 일은 매우 충격이었다. 전 직장에서도 긍정적으로 평가받았고, 인정 욕구가 삶의 원동력으로 작용했던 내게 그 일은 하나의 잊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그때의 기억은 내가 하는 모든 일에서 한없이 나를 작아지게 만들었다. 자신감도 잃게 했다. 모든 프로젝트는 팀장님에게 보고해야 했는데, 미팅 시간이 다가 오기 몇 시간 전부터 긴장했다. 아주 간단한 보고조차도 어떻게 말해야 할지를 몰라 혼자 연습했다. 짧은 보고에도 내 손은 축축이 젖었고 심장은 터질 것 같았다. 무서웠다. 자꾸 그때의 일이 떠올랐고, 내가 뭘 하든 혼날 것만 같았다. 예전의 자신감 있고 패기 넘치던 내 모습은 어디에도 찾아볼수 없었다.
고통스러웠다. 사람이 무서워지니 일을 제대로 해나갈 수 없었다. 말 한마디도 몇 시간을 연습하고 있는 내가, 또 혼이 날까 어떤 일도 주도적으로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내가, 바보 같았다. 멍청이가 되어가는 것 같았다. 출근하는 날이 너무 고통스러웠다. 월요일이 다가오는 게 두려워 주말에도 편히 쉬지 못했다. 불면증이 오랜 기간 이어졌고, 마음은 늘 불안했다. 회사에 있는 순간 자체가 내게는 지옥이었다. 하루만 더 버티자, 마음먹고 버티다 이제 더 이상은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퇴사하자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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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다른 팀에서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되었고, 급히 일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전에 잠시 일정이 비어있던 내가 그 팀에 임시적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정말 다행이었다. 그만두려고 언제 말을 해야 하나 시기만 보고 있던 내게, 잠시나마 다른 팀에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조여오던 숨통이 조금 트이는 듯했다. 어쩌면 신이 주신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한번 잘해보자, 그래도 안되면 진짜 그만두자, 마음을 고쳐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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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팀장님은 기존의 팀장님과는 달랐다. 내가 조금 부족하다 할지라도 대놓고 꾸짖고 면박 주지 않으셨다. 잘할 수 있다며 사기를 북돋아 주셨고, 내가 잘하는 것들을 눈여겨 봐주셨다. 나의 가능성을 봐주셨고, 잠재력을 끌어내 주었다.
'이건 이렇게 한 번 해보면 어떨까요? 이렇게 하면 더 괜찮을 것 같아요.'
'소소한담 씨가 이런 걸 잘하네, 이거 한번 해볼래요?'
'좋아요. 소소한담 씨가 우리 팀에서 함께 일하면 팀원들 간에 시너지가 나고 좋을 것 같은데, 우리 팀 올래요?'
부족한 부분은 차분히 알려주셨고, 잘 한 부분에 대해선 충분히 칭찬해주셨다. 내가 잘하는 것,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것들에 대해 자꾸 이야기해주고 끌어내 주니 조금씩 자신감이 붙었다. 내가 지금 잘하고 있구나, 내가 그렇게 부족한 사람은 아니었어, 라며 무너진 자존감이 조금씩 회복됐다. 팀장님의 긍정적인 평가는 사람들이 나를 보는 눈도 달라지게 했다. 동료 직원들 뿐만 아니라 상부 인사들에게도 나에 대해 좋은 평가를 했다. 팀장님은 늘 자신보다는 팀원들이 능력 있고 돋보이게끔 만들어주셨다. 그런 팀장님을 팀원들은 다들 좋아했고, 존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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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른 팀에 차출되어 일하기로 한 시간이 끝나가는 시점에서, 예전 팀장님이 나를 따로 불렀다. 6개월이라는 시간이 길다면 길고 짧으면 짧은 시간이지만 회사에 입사한 이래로 가장 즐겁게 일했다. 한쪽으로만 매몰되어 있던 시선에서 고개를 들어 더 큰 안목으로 상황을 보게 했다. 지금 일하고 있는 팀에서 일을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다시 예전 팀으로 돌아가기가 너무 두려웠다. 그런데 뜻밖에 말을 들었다.
"지금 일하고 있는 팀에서 소소한담 씨가 와줬으면 하는데, 소소한담 씨는 어떻게 하고 싶어요?" 팀장님이 물었다. 어느 팀에서 일할지 내게 선택권을 주겠다고. 애써 담담한 척했지만 속으로는 너무 기뻤다. 묻고 따져서 뭐해, 나는 무조건 지금 일하고 있는 팀으로 가고 싶었다. 그렇지만 너무 대놓고 바로 말하면 기존 팀장님이 상처받을까 싶어, 고민 좀 해보고 다시 말씀드리겠노라 했다. 그렇게 나는 지금의 팀으로 옮겨왔고, 하루하루 즐겁고 재미있게 일하고 있다. 지금의 팀장님께 너무 감사하다. 퇴사 직전까지 와있던 내게, 일에 대한 흥미를 잃어가던 내게, 다시 즐겁게 일할 수 있게 만들어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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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팀에 있으면서, 과연 좋은 리더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언젠가 나도 연차가 쌓이면 팀장이 될 텐데, 나는 좋은 리더가 될 수 있을까, 어떤 리더가 좋은 리더일까. 분명한 건 처음 함께 일했던 팀장님은 내게 있어 좋은 리더는 아니었다. 되려 그와 같은 사람은 되지 말아야겠다 생각했다.
부족한 팀원이라 할지라도 사기를 북돋아주고, 모두가 함께 성장할 수 있게 하는 지금의 팀장님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세상에 어찌 자신의 말을 한 번에 알아듣고, 모든 일을 척척 잘 해내는 팀원만 있을까. 어떻게 본인의 입맛대로 일하는 팀원만 있으랴. 어떤 팀원이든 함께 품으며, 그의 긍정적인 면을 바라봐주고 잠재력을 이끌어 내주는 그런 팀장이 되고 싶다.
지금의 팀장님과 함께 일하며 배우는 점이 참 많다. 존경심마저 든다. 퇴사 코앞까지 와있던 내게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게 해 주었고, 자신을 내세우기보다는 팀원을 치켜세워줬다. 내가 일을 잘하는 사람이구나,를 깨닫게 해 주었고, 내 능력을 더 잘 발휘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그런 팀장님. 그런 팀장님 밑에 일하면서 나 또한 팀원에게 본보기가 될만한 좋은 상사가 되어야겠다는 선순환의 내리사랑을 이끌어 내는 팀장님.그런 리더가 되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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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리더란 결국, 팀원을 도태시키는 것이 아니라 팀원을 품고 성장을 이끌어내는 사람임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