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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작나무 Sep 23. 2022

키르기스 사람과 친해지기, 마술주문 하나로 충분하다

키르기스스탄 여행기(3) 카라수에서 이식쿨까지 280km

코쇼이 코르곤(Кошой-Коргон)을 떠나 서둘러 간 곳은 바로 옆에 있는 카라수(Кара-Суу)  마을이었다. 이 곳에선 키르기스스탄 전통 결혼식을 구경할 수 있었다. 역시 국제교류재단과 추 대표가 운영하는 키르기스프렌드가 공동으로 추진중인 키르기스 문화마을 사업 일환이다. 전통 결혼식을 통해 키르기스스탄 문화를 접할 수 있게 해주자는 건데 신랑 신부 역할을 맡은 동네 처녀 총각들이 아직 익숙하지 않은지 쑥쓰러워 하는 모습이 오히려 볼 만하다. 


카라수 마을에서 민박을 했다. 일행 가운데 나를 포함해 남자 4명이 묵은 곳은 결혼식에서 축가를 맛깔나게 부른 아주머니 집이었다. 황금을 좋아하는 나라 사람들답게 웃을 때 금이빨이 보이는 이 아주머니(박트굴)가 정성껏 차려준 술상을 앞에 놓고 집주인 누르란과 간단한 술자리를 했다. 


이들에게 들이어보니 이 부부에겐 자식이 5명이나 된다. 부모와 같이 사는 아이게림이라는 14살짜리 딸과 바야만이라는 5살짜리 아들 말고 세 명은 벌써 어른이 되어 독립했다.나이를 물어보니 누르란은 43세, 박트굴은 42세다. 액면가만 놓고 보면 우리 일행보다도 더 연장자 같은데 실제로는 정반대다. 






우리 일행에게 자녀가 어떻게 되는지 물어보더니 자녀 5명에 더해 비슈케크에 사는 큰 아들이 벌써 결혼한 덕분에 손주까지 2명이나 있다며 팔뚝근육을 과시하며 “스트롱”이라고 웃는다. 술은 크미스만 조금 마실 뿐, 보드카를 권했더니 손을 저으며 사양한다. 중국 국경까지 컨테이너를 운송하는 대형 트럭을 운전하는 그는 얼마전에 음주운전을 하다 사고를 낸 적이 있다며 자중하는 눈치다. 


박트굴이 잠깐 자리를 비웠을 때 노 작가가 그에게 담배를 권했다. 웬일로 담배를 받아들더니 몇 모금 피우며 만족스런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는 곧바로 담뱃불을 끈 뒤 주머니에 살그머니 넣어둔다. 그 때 보고야 말았다. 재빨리 고개를 돌려 혹시나 아내에게 들키진 않았는지 살피는 만국공통 ‘남편의 시선’을. 호기롭게 “아내가 담배냄새를 싫어해서”라며 수습을 해보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제 작가가 자기 담배를 의자 한 구석에 숨겨놓으며 나중에 챙겨서 피우라고 하자 고맙다는 말을 되풀이한다. 가부장제가 강한 문화라 그런지 아내와 딸이 집안일을 하는 동안에도 손 하나 까딱 안하는데다 틈날 때마다 팔뚝근육 자랑을 하며 마초 느낌 물씬 풍기는 “스트롱맨”도 아내 앞에선 말짱 꽝이다. 

“스트롱맨”도 아내 앞에선 소용없더라 

한참 이야기꽃을 피우는데 아이게림과 바야만이 엄마 옆으로 온다. 일행이 챙겨 온 주전부리를 이것저것 먹어보고 구경도 하다가 바야만은 먼저 자러 들어갔다. 아이게림은 아빠와 엄마 사이에 앉더니 크미즈를 마신다. 머리에 하얀 스카프를 한 무슬림 소녀가 말젖술이라니. 거기다 14살짜리가. 내심 놀랐다. 


역시 소련 영향으로 중앙아시아는 세속화됐구나 싶다. 거기다 유목민 후손이니 크미즈 마시는 문화가 빠질 수 없겠지. 그러고보니 어릴 때 농번기에 막걸리 심부름 다니다 몰래 먹어 본 막걸리 생각도 났다.  아이게림 크미즈 잔이 비었길래 크미즈를 권했다. 아이게림이 당황하며 거절했다. 그제서야 알았다. 크미즈가 아니라 차였다. 색깔이 똑같아 혼동했다. 그러면 그렇지. 


이 곳은 손님을 환대하는 문화가 강하다. 손님들 술잔과 찻잔에 술과 차를 쉬지 않고 채워주고 먹을 걸 끊임없이 권한다. “아침엔 간단하게 계란 후라이나 해주시면 됩니다”라고 했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1인당 계란후라이 세개씩 나왔다. 당근과 오이, 가지를 섞어 만든 샐러드도 함꼐 먹으니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다. 


각자 민박집에서 즐거운 추억을 쌓고 맛있는 아침밥으로 배를 채운 20일 아침 버스에 모인 일행이 찾아간 곳은 카라수 근처 아차카인디(Ача-Кайынды)라는 곳이었다. 이 곳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키르기스스탄 전통 카펫 쉬르닥의 고향이라고 한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돼 있는 쉬르닥은 100% 수작업으로 제작하는데 이 마을은 전통방식을 보존하고 유지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 곳에서 우리는 쉬르닥 만드는 과정을 보고 배울 수 있었다. 거기다 마을 소녀들이 전통옷을 입고 우리 일행을 환대해주고 차를 대접하고 전통춤 공연까지 해준 건 무척 인상적이었다. 





다른 이들이 쉬르닥 만들기가 한창일 때, 가위질 바느질에 손방인지라 금방 흥미를 잃고 땡땡이를 쳤다. 집 밖으로 나와 멀리 눈덮인 봉우리를 보고 있을 때 건너편에서 여덟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와 네살쯤으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걸어온다. 인사를 건넸다. 남자아이가 성큼성큼 나에게 다가왔다. 박력있게 손을 내민다. 얼떨결에 악수를 했다.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당해서 사내 대장부 느낌이 물씬 났다.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물었다. “포토?” 주저없이 고개를 젓더니 제 갈 길 가버린다. 


추 대표에게 들어보니 이 곳에선 남자들끼리 악수하는 문화가 발달해 있다. 악수하는 데 나이와 지위 따윈 신경쓰지 않는다. “예전에 집에 들어가는 길에 다섯살짜리 꼬마가 뒤에서 나를 불러요. 왜 그러나 싶었는데 다짜고짜 악수를 하자고 손을 내밀더라고요.” 이런 문화다 보니 악수를 거부하는 건 말 그대로 더할 나위 없는 모욕이자 전쟁선포나 다름없다. 경찰 단속에 걸려도 일단 서로 악수부터 할 정도라고 하니 할 말 다했다. 


그 어린이는 무슨 말을 들었길래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이방인과 악수를 할 생각을 했을까. 키르기스스탄에서는 반드시 통하는 마법주문을 배운 덕분이다. 이 마법주문만 있으면 악수는 기본이고 호감과 매력을 한껏 끌어올리는 것 역시 전혀 어렵지 않다. 주문을 외워보자. “칸다이 스스브.”


이 말을 가르쳐 준 건 바이보로바 알마였다(키르기스스탄도 한국처럼 성+이름으로 표기한다). 버스에서 보내는 긴 이동시간 동안 알마한테서 유용한 단어 몇 개를 배웠다. 오랫동안 까먹고 있었던 키릴문자 읽는 법도 다시 공부했다. 키르기스스스탄에 오기 전에 안내책자에선 인삿말을 “살라맛 스스브(саламат сызбы)”로 소개했다. 알마한테 그 얘길 했더니 알마는 다른 표현을 가르쳐줬다.


“칸다이 스스브((Кандай сызбы)”라고 해보세요.”


대략 “잘 지내십니까”라는 의미인데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써 먹을 수 있다고 했다. 막상 이 말이 입에 착착 달라붙으려면 시간이 걸렸다. 시행착오도 있었다. 송쿨에서 출발하던 날(19일) 아침, 요리에 열심인 할머니에게 시험삼아 주문을 외워 보았다. 아무 반응이 없다. 고개를 돌리지도 않는다. 알마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할머니에게 ‘망구스 스스브’라고 해봤는데 쳐다 보지도 않던데요.”


알마 얼굴에 잠깐 동안 스치는 한심하다는 표정을 봤던 건 기분 탓이었을게다.  


‘칸다이 스스브’라고 써놓긴 했지만 막상 알마한테 이 말을 들어보면 한글로 써놓은 것과는 매우 다른 느낌이다. 결국 알마 붙잡고 되풀이 연습하는 수밖에. 그리고 드디어 20일 아차카인디 마을에서 주문이 통했다. 그때부턴 틈날 때마다 이 주문의 효용을 시험해 봤다. 21일엔 물을 사러 들른 가게 문 앞에서 마주친 여자아이에게 주문을 걸었다. 새침떼기 아기씨가 활짝 웃으며 내게 손을 흔들어준다. 무심한 듯 말타고 지나가던 아저씨가 오랜 친구를 다시 만난 표정을 지으며 내게 손을 내밀게 하는 건 아주 쉽다. 기계적으로 PCR검사를 하던 간호사의 말문을 트게 하는 건 하나도 어렵지 않다. 마술주문 하나면 충분하다. 


고맙다는 말은 “라흐맛(Рахмат)”이라고 했다. ‘흐’를 좀 더 굵게, 마치 가래 끓는 느낌으로 발음해야 한다. 라흐맛은 만능열쇠다. 민박 주인 아주머니에게, 체험 행사에서 만난 할머니들에게 ‘라흐맛’이라고 말해주면 누구나 환하게 웃어준다.  

말에는 힘이 깃들어 있다 

알마는 직접 들어보면 이름이 “알마”보다는 “아으마”에 가깝다는 걸 알게 됐다. 한국 사람들이 자기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니 그냥 “알마”로 소개한다고 한다. 하지만 일행 중 한 명은 “라마”라고 했다가 사과를 해야 했고, 나 역시 처음엔 알마를 “알림”으로 잘못 기억했다. 



알마는 항상 러시아어로 말했다. 운전기사는 부모가 러시아 출신이기도 해서 이해가 가는데 다른 키르기스 사람들과도 어지간해선 러시아어로 대화했다. 이유를 물어봤다. 키르기스스탄에선 키르기스어가 국어이지만 러시아어 역시 공용어다. 학교에선 러시아어를 거의 모국어 수준으로 가르친다. 특히 알마 고향은 러시아 출신들도 많아서 러시아어를 쓰는 게 더 자연스러웠다. 러시아어를 열심히 해서 다중언어자가 되면 더 똑똑해진다는 말을 들은 것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집에서도 러시아어를 쓰곤 해서 부모님한테 혼난 적도 많았다고 한다. 그 정도다 보니 알마는 말 그대로 “생각을 러시아어로” 하는 수준이 됐다. 


“그래서 더 똑똑해진 것 같나요?”


“글쎄요. 딱히 그런 것 같진 않은데요.”


말은 그렇게 해도 확실히 언어감각은 좋다는 걸 느낀다. 알마는 비슈케크에 있는 대학을 다니면서 일주일에 세 차례씩 한국어 강좌를 들었다고 한다. 3년간 배웠는데도 한국 사람과 무리없이 대화를 한다. 추 대표 말로는 키르기스어는 사실 문법구조가 한국어와 더 가깝고 러시아어는 영어나 독일어와 더 가깝다. 문법체계가 꽤나 상반된 두 언어를 모국어로 익히고 보니 다른 외국어를 배울 때도 확실히 유리한 면이 있다고 한다. 추 대표는 “키르기스스탄 사람들과 만나보면 서너가지 언어를 자유자재로 쓰는 사람을 자주 본다. 언어감각이 남다르다”고 귀띔했다. 


“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라고 말한 비트겐슈타인을 살짝 비틀어 생각해보면, 러시아어를 모국어처럼 쓴다는 건 생각의 기본 틀 자체가 러시아를 기본으로 할 가능성과 연관된다. 아무래도 러시아를 좀 더 친근하게 느끼고 익숙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알마에게 물어보니 과연 그렇다고 한다. 


알마 말로는 키르기스스탄 전반적인 여론 자체가 친 러시아였다고 한다. 몇 년 전만 해도 ‘푸틴 덕분에 러시아가 강한 나라로 되돌아왔다. 러시아가 강해지는 게 키르기스스탄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 강했다고 한다. 하지만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모든 게 달라졌다. 


“우크라이나 다음이 우리 차례가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겠어요?”


키르기스스탄이 국어와 공용어를 함께 쓰는 걸 보면 한국에서도 심심찮게 나오는 '영어공용어론'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다. 영어를 공용어로 해서 어릴 때부터 교육하면 모두 어린쥐가 되어 글로벌스탠더드에도 부합하고 한동훈 같은 인물도 될 수 있다는 뜻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알마 말을 들어보면 꼭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알마한테 듣기로는 키르기스스탄 사람 중에서도 러시아어를 못하는 사람이 제법 있다고 한다. 특히 교육수준이 낮거나 낙후지역 출신한테서 그런 경향이 강하다. 소련 시절엔 러시아어가 아예 국어였고, 그 뒤로도 20년 넘게 공용어로 쓰고 가르치는데도 상황이 이렇다. 결국 영어를 공용어로 한다고 해서 모든 국민이 영어를 잘하게 되는 게 아니라, 영어를 통한 지식과 계층 양극화가 더 심각해질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겨울에도 얼지 않는 호수, 이식쿨


아차카인디를 떠난 버스는 이제 이식쿨(Иссык-Куль, 키르기스어로는 Ысык-Көл)로 향한다. 키르기스스탄에는 2000개 가까운 호수가 있는데 그 중 가장 큰 호수가 이식쿨이다. 이식쿨은 길이 180km 폭 70km나 된다. 호숫가에 있으면 파도가 치는 걸 볼 수 있고 수평선 너머로 만년설로 뒤덮인 산봉우리가 신비로운 느낌을 준다. 면적은 제주도의 3.5배나 된다. 해발 1,600m에 위치한 호수는 가장 깊은 곳이 700m나 된다고 한다.   


키르기스어로 이식은 따뜻하다는 뜻이다. 쿨이 호수니까 이식쿨은 따뜻한 호수라는 뜻이 된다. 중국 역사책엔 열해(熱海)로 지칭했다. 호수 바닥에 온천수도 솟아나고 미네랄 함유량도 높아서 겨울에도 얼지 않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키르기스스탄을 대표하는 이식쿨은 소련 시절에도 공산당 간부들도 휴양지로 찾아올 정도로 유명한 곳이었다. 지금도 여름 피서철엔 비슈케크 시민 절반이 이식쿨로 휴가를 떠난다. 세계 각지에서 몰려오는 관광객도 적지 않다. 일행이 이식쿨을 방문했을 때도 해수욕과 스킨스쿠버, 거디다 패러글라이딩까지 다양하게 이식쿨을 즐기는 사람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당나라를 출발해 이식쿨을 지나 서쪽으로 향하던 현장(玄奘, 602~664)은 <대당서역기>에서 이식쿨을 이렇게 기록했다.(현장법사는 서유기에 나오는 삼장법사의 실제 모델로 유명한 바로 그 스님이다.) 


"산길을 4백여 리 가다 보면 대청지(大淸池)[또는 열해(熱海)라고 하고 또는 함해(鹹海)라고도 한다]에 이르게 된다. 둘레는 천여 리에 달하는데 동서로 길고 남북으로는 좁다. 사방이 산에 둘러싸여 있어서 수많은 물줄기들이 교차하며 모여든다. 물은 청흑색을 띠었고 쓴맛과 짠맛을 함께 지니고 있다. 호탕하게 흐르는 물은 큰 파도가 사납게 일어나 물보라를 일으키며 흐른다. 용과 물고기가 뒤섞여 살고 있으며 신령스럽고 괴이한 일들이 이따금 일어난다. 그러므로 오고 가는 나그네들은 그 복을 빌며 기도를 한다. 비록 어류가 많으나 감히 물고기를 잡지 않는다.”



출처: https://www.betulo.co.kr/3154?category=460185 [자작나무통신: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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