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프랭클, 청아출판사
그 유명한 <죽음의 수용소에서>.
최신판은 2020년 5월 판인 것 같다.
우리 집 책장에 꽂혀 있는 책은 2019년 7월, 초판 19쇄 판이다. 그러니 25년 8월 현재, 최대 만 6년 된 입주자인 셈이다.(정확히 언제 구입했는지 모른다.)
6년간 꺼내 들췄다가 다시 집어넣기 몇 차례였던 책을 드디어 다 읽었다. 참여한 독서모임 챌린지 덕분이다. 이 책을 읽는다기에 일말의 고민 없이 신청했었다.
2주간 매일 조금씩 나눠 읽은 후 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역시 '책을 만나는 것도 타이밍이다.'라는 것.
가끔 내가 책을 고르는 게 아니라 책이 내게 온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런 책을 읽고 나면 느낀다. 이 책은 나의 삶이 내게 건네는 손짓이구나. 나의 삶이 내게 던지는 질문이자, 스스로도 뭘 찾고 있는지조차 모르면서 찾고 있던 답이구나.
맞다. 바로 이 책 <죽음의 수용소에서>가 그랬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 가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매일 매시간마다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말이나 명상이 아니라 올바른 행동과 올바른 태도에서 찾아야 했다. 인생이란 궁극적으로 이런 질문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찾고, 개개인 앞에 놓인 과제를 수행해 나가기 위한 책임을 떠맡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과제들, 즉 삶의 의미는 사람마다 다르고, 때에 따라 다르다. 따라서 일반적인 방식으로 삶의 의미를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은 포괄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이란 막연한 것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구체적이기 때문이다. 삶이 우리에게 던져준 과제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p138
<이완의 순간들> 이 예판 중인 지난주 일요일까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퇴고를 하고 오탈자를 찾았다. 게슈탈트 붕괴 현상을 경험했다. 원고는 인쇄에 들어가고 나는 번아웃에 가까운 상태에 빠졌다. 뇌가 텍스트를 거부했다. 마블 영화 인피니티워에서 헐크가 나오길 거부하듯이, 무언가를 보고 쓰려하면 뇌가 강력하게 'NO'라고 외쳤다. 글을 쓸 수가 없었다.
더 이상 내가 쓸 수 있는 이야기가 없을 것 같았다. 무서웠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글을 쓰지? 아니 어떤 글을 써야 하지? 어떤 글을 쓰고 싶지? 생각은 이어졌다. 어떻게 살고 싶지? 어떻게 존재하고 싶지?
며칠 전, 편집장님께서 중간 집계 된 예판 현황을 보내주셨다. 깜짝 놀랐다. 가슴 저 깊은 곳에서 묵직함이 숨을 조여왔다. 생각보다 훨씬 많은 분들이 신청을 해주셨던 거다. 명단을 훑었다. 내가 아는 이름보다 모르는 이름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눈물이 났다.
삶이 질문을 던지고 답도 주었다.
우둔하고 미련한 내가 알아채지 못할까 봐 친절하게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가이드북까지 곁들여 주었다.
내 삶이 내게 기대하는 것? 내 삶의 의미는?
지금 내 앞에 놓인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과제에 올바른 행동과 올바른 태도로 책임을 지는 것.
책에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담았으니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건 돈이라는 형태로 내게 애정과 신뢰와 응원을 보낸 사람에 대한 책임이 아니다. 책은 빙산의 일각이어야 한다. 책을 썼으니 더욱더 거기에 관해 할 말이 많아야 한다. 더 공부해야 한다. 더 깊어져야 한다. 그것이 요가든, 책쓰기든, 출간과 그다음의 이야기이든, 혹은 내 개인의 삶이든. 물론 완벽한 모범답안은 없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진솔한 답변을 최선을 다해 할 수 있어야 한다.
다정함과 겸손함의 태도로.
삶의 의미란 끊임없이 변하지만 그래도 인생이라는 여정에서 끝까지 붙들고 가야 할 가치는 누구나에게 하나쯤 있게 마련이다. 앞으로 성취해야 할 잠재적 의미, 그것이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에 대한 대답이 되리라.
강제수용소에 있었던 우리들은 수용소에서도 막사를 지나가면서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거나 마지막 남은 빵을 나누어 주었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P120
생존을 위한 본능적 욕구마저 박탈당한 상황에서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과연 그런 상황 속에서도 자신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사람'이고자 하는 의지, 그 의지를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까? 모든 자유가 상실된 것처럼 보이는 곳에서도 존재하는 자유가 있을 수 있을까?
하루 한 번, 딱딱한 빵 한 조각과 아주 묽은 수프 한 그릇이 다인 음식, 눈보라 속 얇은 옷 한 장, 철사로 끈을 대신한 발에 맞지 않는 신발 한 켤레, 그리고 새벽부터 밤까지 이어지는 육체노동, 끊임없는 구타, 욕설, 한낱 번호 아래 개, 돼지 취급받으며 인간이 더 이상 인간이지 못하는 모멸의 현장 속에서,
두 시간 전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람의 죽은 눈동자를 쳐다보며 아무렇지도 않게 수프를 마시는 무감각, 그 정신적 죽음 속에서,
다른 사람을 위로하거나 마지막 남을 빵을 나누어 주는 사람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인가. 마지막 자유,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의 태도를 취할 수 있는 자유' 곧 선택의 자유를 지킨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붙든 것은 '사랑'이었고 그들이 택한 것은 '사랑의 태도'였다.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마지막 자유,
인간이 '인간으로' 고귀할 수 있는 마지막 선택,
사랑.
이것이다!
내가 성취해야 할 내 삶의 잠재적 의미.
요가의 가르침 중 지켜야 할 계율인 니야마의 5번째, 이스바라 프라니다나, 신성과 더 높은 가치에 대한 헌신이라는 뜻이다. 바로 사랑의 실천, 박티 요가다.
다정함과 겸손함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얻었다.
사족 하나.
미리 내용과 결론을 생각하고 시작한 글이 아니었다.
마지막 문단을 쓰면서 스스로 놀랐다.
내가 글을 쓴게 아니라 글이 내 손가락을 움직여 스스로 액정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나더러 보라는 양. 글쓰기 전까지 몰랐던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가 글을 쓰며 찾아졌다. 다시 한 번, 지금 내게 찾아온 <죽음의 수용소에서>에 감사한다. '타이밍'에 감사한다. 질문과 답을 동시에 던져주는 내 삶의 자비로움에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