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변화를 좋아하는 것 같아도, 실제 변화에 몸을 싣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무슨 인연인지 1999년 쯤에 밴쿠버로 가라는 누군가의 이갸기를 들은 후, 6년 뒤 실제 나는 밴쿠버에 가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다. 1999년도에 나는 밴쿠버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인은 줄기차에 나에게 밴쿠버로 가라는 이야기를 하고. 우연 자연히 2005년 1월 12일 밴쿠버 땅에 첫발을 내디뎠다.
박사학위 과정에 진학을 하고 논문을 쓰지 못한 채 8년이라는 시간이 지났고 이제 그 종지부를 찍으러 나는 밴쿠버로 날아갔던 것이다. 박사학위 또한 누군가의 간절한 바램으로 가능해졌다. 나는 당시만 해도 선(명상)으로 박사학위를 받을 자신이 없었다. 박사학위를 받으려면 어떤 확연한 깨달음을 얻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명상의 깊은 경지나 확연한 깨달음은 그렇게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차일 피일 미루며 박사과정 수료자로 만족하겠다는 심정으로 그냥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 과정을 안타까와 하는 한 사람이 있었으니, 학과 조교 사무실에 같이 근무했던 선배님이 하루는 내 손을 꼭 잡고 신신당부를 했다. "고지가 바로 눈 앞인데 여기서 포기할거니? 논문 쓰고 박사 따자. 그래서 논문에 철학박사 ph.D라고 한 줄 박자." 선배님의 그 당부가 얼마나 간곡하던지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종합시험도 보고 학위를 딸 수 있는 준비를 했다. 그런데 우연히 밴쿠버 UBC를 갈 기회가 생겨 거기서 논문을 써와야 하는 상황이었다.
어린 나이는 아니었지만, 놀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밴쿠버에서 논문을 완성해야 한다는 마음 한켠의 부담을 갖고 생활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전 세계에서 모여든 교환교수, 교환연구원, 대학원 생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다양한 경험들을 할 수 있어 참 소중한 시간이었다. 티벳 난민들을 위해 자원 봉사를 하시던 티벳인 교수님을 따라 그분들 행사에도 가 보고, 맥시코에서 유학 온 여성분과는 많이도 걸었다. 다른 기숙사에 살았기 때문에 그 분과 양쪽 기숙사를 오가며 많이 웃고 것도 즐거운 시간도 보냈다.
뭐니 뭐니해도 한국 유학생들과의 교류도 참 즐거웠다. 대학원 여학생들과 함께 휘슬러 여행도 가고, 자동차가 있는 여학생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다며 꼭 장보러 갈 사람들 물어서 같이 데려다주곤 했다. 개성있는 여학생들이 바쁘게 공부하는 와중에도 춤을 배우러 다니는 학생도 있었고, 틈틈이 바이올린 과외를 하는 학생도 있었다. 다들 학업에 열중하면서도 다양한 활동으로 자기 인생을 다양한 색채로 가꾸고 있었다. 참 고마운 인연들이었다.
그렇게 행복하고 유쾌한 시간들도 많았지만, 논문 진척이 안되고,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마음 한 구석에 회색 구름이 몰려왔다. 해야 할 일이 있지만 집중할 수가 없고, 외롭다는 한 생각과 함께 마음이 내려앉았다. 그럴 때면 무작정 해변으로 나갔다. 신발을 벗어 양 손에 들고 하염없이 해안을 따라 걷는 것이다.
"나, 지금 왜 여기에 있나? 무슨 부귀 영화를 보자고 홀홀단신으로 여기까지 날아와 이 외로움을 혼자 감당하며 지내고 있는가?"
그렇다. 변화와 성장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힘들지만 의미있는 시간들이 피가 되고 살이 된다. 앞으로 살아갈 인생의 자양분이 되고 힘이 된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는 왜 그렇게 어렸을까? 왜 쓸데없는 잡념으로 감정의 동요를 겪고 혼자 힘든 시간을 보냈을까?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그 때 좀 더 많은 사람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하며 살 걸.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성장하는데 시간이 걸린다. 그 때는 그것이 최선이었다. 어디 그러고 싶어서 그랬겠는가.
논문을 써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사람들과 어울려 노는데 시간을 아낄 수 밖에 없었다.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많지 않으니 여행도 자유롭게 할 수 없었다. 그 모든 것들이 그 때 그 상황에서는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젊은 날의 추억일 뿐. 우리는 그렇게 외로움을 먹고, 때로는 회의하면서 그렇게 성장을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모두가 은혜였고 소중한 날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