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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혼란 속에서 방황하는 은희에게, 영화 <벌새>

신기하면서 아름다운 '영지'선생의 담담한 위로

2020년 경자년이 되었다. 구정 설이 아직 지나지 않았다고 하지만 이미 달력상 2020년이 시작된 지 보름이 지났기에 '벌써 한 해가 지나 새해가 되었습니다'라고 말하기에 살짝 머쓱하다. 

2020년 우주의 원더 키디라는 만화영화 때문일까 혹은 내 평생에서 같은 숫자가 연속 반복되는 유일한 해이기 때문일까 (1919년은 지나서 태어났고 2121년까지는 살아있을 가망이 없고). 

한 해의 마지막 날인 12월 31일을 지나면 으레 맞는 새해이지만 365일 중 보름밖에 지나지 않은 2020년이 유독 아프고 힘에 부친다. 

마음껏 상상하고 또 상상했던 '머나먼 미래'였지만 2020년이라는 그 막연했던 미래가 현실이 되니 어느 베스트셀러 책 제목처럼 더 큰 혼란이 시작된 것이다.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 여겨졌던 2020년 새해에는 놀랍게도 아무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살짝 지겹고 약간은 버거운 일상이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가부장적 문화와 암묵적 동의에 의한 폭력이 허용되고 있는 은희의 집


2020년은 아니지만, 영화 <벌새>의 주인공 은희 역시 1994년이라는 만만치 않은 시간을 살아내고 있다. 집안에서 폭군처럼 군림하고 있는 가부장적인 아빠와 삶의 무게에 지친 무기력한 엄마. 집안의 유일한 아들이라는 위치와 대원외고와 서울대를 차례로 입학해야 한다는 가족의 신성한(?) 사명을 가지고 있는 은희의 오빠는 부모의 암묵적 동의 하에 은희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그나마 같은 여자 혹은 딸이라는 공통점을 가진 은희의 언니마저 답답한 집을 벗어나려 애쓰며 방황하고 있는 중이다. 영화 인트로에서 자신의 집으로 착각한 다른 집의 문을 두드리며 대답 없는 엄마를 한참을 부르며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은희의 모습이 주는 상징처럼, 1994년 속 은희는 가정이라는 울타리에 완벽히 들어있지 못하고 불안정하게 떠돌고 있다. 

 

1994이라는 일상을 살고 있는 <벌새>의 지후


심지어 은희가 친구들과 함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새 학기에 만난 새로운 담임선생님은 노래방을 다니거나 남자 친구가 있는 학생을 마음대로 '날라리'로 규정하고 학생들에게 그에 맞는 날라리 친구의 이름을 써내라 강요한다. 마음을 나누는 남자 친구가 있고 방과 후 친구, 후배들과 노래방을 다니며 스트레스를 푸는 은희는 어쩔 수 없이 담임 선생님이 규정한 '날라리'에 완벽히 부합된다. 어른이자 스승에게 삶의 중요한 가치를 배우고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어른으로 성장할 것인지 등을 스스로가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는 학교에서마저 불합리한 원칙과 군말 없는 복종만이 요구되며 은희의 권리는 박탈당한다. 



참으로 특이한 것은, 1초에 90번 날갯짓을 하는 단단한 벌새처럼 은희가 꿋꿋이 마주하고 오롯이 버텨내고 있는 1994년의 답답한 일상이 낯설지 않다는 점이다. 그것은 은희가 마주한 일상이 1994년 당시를 살고 있는 많은 이들의 일상이며 2020년 현재 우리가 꿋꿋이 마주하고 있는 일상과도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는 일상이 되어 문제가 문제인지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가부장제는 한국사회를 대변하는 대표 키워드이며 개개인의 감정과 생각에 대한 존중과 인정보다는 집단 혹은 평균의 모습과 조금이라도 다르다고 규정이 되면 그 순간 수많은 유형의 폭력은 정당화된다. 결국 은희의 1994년과 지금 나와 당신이 마주하고 있는 2020년이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이다. 


처음 만났을 대부터 은희의 이야기를 궁금해했던 영지 선생


그런 의미에서 1994년 은희의 일상에 별안간 등장한 한문학원 선생님 '영지'는 그 존재만으로도 은희와 관객들에게 묵직한 위로를 준다. 나른함을 넘어 어딘지 모르게 무기력하게까지 보이는 '영지' 선생님은 학원에서 처음 만난 날 한문 수업을 듣는 은희와 은희의 친구에게 담담히 자신을 소개한다. 그리고 바로 수업을 시작하는 것이 아닌 은희와 은희 친구의 이야기를 똑같이 듣고 싶어 한다. 자신이 은희보다 나이가 많고 한문이라는 지식을 가르치는 학원 선생님이라는 위치에 서있지만 영지 선생님은 수강생 은희를 동등한 주체로 본 것이다. 특히 영지 선생님은 지금까지 등장한 어른들과 달리 은희에게 함부로 반말을 하지 않으며, 한문이라는 지식을 강제하지도 않는다. 대신 진정한 친구가 무엇인지에 대해 알려주며 은희가 교우관계에서 느끼는 혼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왜 함부로 타인을 동정하면 안 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며 불평등과 불합리함을 확대, 재생산하고 있는 시스템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모습을 보인다. 동시에 은희의 일상에 일상화되고 있는 폭력에 끝까지 맞서 싸워야 함을 알려준다.    


신기하면서도 아름다운 사람 영지 선생님 (김새벽 분)


사실 영화 벌새의 배경인 1994년은 참 이상한 일 투성인 시간이다. 신화 속 인물이었던 북한 김일성 주석이 죽었고 단단하다 믿어 의심치 않았던 성수대교가 아침 출근길과 등굣길에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싶은 말도 안 되는 일들이 1994년 은희의 일상에 자주 찾아오면서 혼란을 겪는 은희를 보면, 2020년을 살고 있는 많은 관객들 역시 알 수 없는 감정들에 휘말린다. 살아있다면 마흔 언저리가 돼있을 2020년의 은희는 벌새처럼 단단히 마주했던 혼란의 1994년을 과연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쉽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버틸 가치가 충분했던,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찬란했던 시간이었음을 고백할 수 있을까? 


여전히 녹록지 않은 일상이 쳇바퀴처럼 반복되고 있지만 그와 반대로 신나고 행복한, 간절히 바라고도 바란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좌절감에 작심삼일용 계획마저 세울 수 없는 새해 우울증에 빠져있는 지금. 영화 <벌새>의 영지 선생의 담담한 고백이 귀에 맴돈다. 


어떻게 사는 것이 맞을까. 어느 날 알 것 같다가도 정말 모르겠어. 다만 나쁜 일들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들이 함께 한다는 것. 우리는 늘 누군가를 만나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단다


불행하다고 규정짓기도 벅찬 일들이 끊임없이 나의 일상에 찾아온다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는 영지 선생의 담담한 위로가 나에게 힘이 되었듯 이 글을 읽은 당신에게도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 어떻게 사는 것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힘들더라도 가만히 힘을 빼고 앉아 손가락을 펴 움직여보라는 영지 선생의 조언처럼. 어찌 되었듯 중요한 건 우리는 지금 숨 쉬며 살아있다는 점이고 적어도 우리의 의지대로 손가락을 움직 일 수 있으며 누구와도 무언가를 나눌 수 있다. 

쓰다 보니 한 가지 더 욕심이 생긴다. 손가락을 조금씩 움직이는 것부터 시작해 조금씩 힘을 내어 일상을 벌새처럼 정면으로 마주하고 버텨내어 영지 선생님이 그랬듯 종국에는 나도 내 주위 많은 사람들, 모든 은희에게 신기하고 아름다운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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