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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샛별 Mar 05. 2024

[겨울밤+낭독여행]손보미<사랑의 꿈>중'첫사랑'리뷰

샛별BOOK연구소


연작소설 <사랑의 꿈> 중 '첫사랑', 손보미, 문학동네, 2023. (391쪽 분량) 




 <첫사랑>은 여름이 끝날 무렵, 열여섯 소녀가 사랑에 눈 뜨는 과정을 담은 단편이다. 엄마와 단둘이 사는 화자에게 갑자기 남자들이 들이닥친다. 먼저, 새아빠다. 그리고 짝꿍인 턱남, 수학을 가르치는 대학생 과외 선생, 또 한명의 과외선생. 지금까지 살면서 남자들을 가까이 접해볼 일이 없던 화자에게 거침없이 연결되는 남자들의 대면으로 화자는 상당한 혼란을 느낀다. 중3이 느끼는 남성에 대한 감정, 이것이 사랑인지 호감인지 알 수 없는 마음들이 증폭된다. 화자는 주변 남자들을 통해 현실적인 사랑. 짝사랑. 첫사랑 등을 알아가며 십대가 겪는 사랑의 감정을 천천히 밟아나간다.  


  우선 화자는 엄마와 새아빠의 사랑을 지켜본다. 엄마의 임신은 재혼으로 이어지고, 화자는 엄마와 새아빠를 보며 가장 현실적이고 보편적인 사랑의 형태를 확인한다. 엄마의 배가 불러올수록 사랑은 현실적이고 이상하다. 엄마는 배를 만져보라며 화자의 손을 자신의 배에 갖다 댄다. 꿈틀거리는 생명을 느낀 화자는 화들짝 놀란다. 엄마와 새아빠의 사랑을 보며 자신이 꿈꾸는 사랑의 형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랑이라면 모름지기 수학 과외 선생님이 말해준 사랑. 그런 모습이어야 한다. 비극의 주인공처럼. 수학을 가르치러 온 대학생은 명문대 경영학과 4학년이며 학군단에 속해 있어 졸업하면 장교로 입대할 예정이다. 대학생 신분인 수학 과외 선생은 자신의 첫(?) 사랑을 화자에게 털어놓는다. 과외 선생은 뉴욕으로 떠난 헤어진 여자친구를 무작정 찾아갔고 그곳에서 한 달 동안 아름다운 시간을 보냈지만 다시 헤어졌고, '그랜드캐니언이나 브라이스캐니언 같은'(p.253) 광활한 자연을 보러 다녔다고 고백한다. 수학선생이 비련의 남자주인공이라고 생각하는 화자. 과외 선생은 자신의 사랑을 설명하며 지금은 물리적 거리 때문에 만날 수 없지만 그녀가 뉴욕에서 돌아오면 '아마도' 결혼할 거라면서.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한 건 비밀이야. 아무에게도 말해선 안 돼."(p.254) 라며 새끼손가락을 거는 남자. 운명의 남주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화자다. 


  쿵쾅쿵쾅. 수학선생에게 전해 들은 사랑의 모습에 비애감과 슬픔을 전달받게 된 화자. 사랑이란 이 남자가 했던 거. 바로 이런 게 사랑이지라고 생각하는 화자. 모든 걸 걸고 한 학기 수업을 망치면서 뉴욕에 있는 여자를 찾아 떠나는 결단. 뉴욕에서 둘은 하얀색 반팔 티에 청바지를 입고, 선글라스를 하고 맨발로 하얀색 천을 잡아당기며 초록색 잔디밭 위에서 하얀색 구름을 배경으로 활짝 웃는 사랑. 완벽하고 아름다운 사랑. 사랑이란 응당 이토록 반짝 빛나야 한다는 생각. 그러니 당연히 엄마 아빠의 사랑과는 댈 수 없고, 턱남과 자신의 사랑은 '절대 사랑이 아니'(p.280)라는 판결.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돌아온 수학선생의 사랑은 비록 실패했지만 그는 비극의 목격자였다. 수학선생의 사랑은 순수했으며 찬란했다. 그러니까 수학선생은 '(아기의 울음소리 때문에 쩔쩔매는) 새아빠나 (초코파이나 막대사탕을 내 책상 서랍 속에 집어넣고 다른 여자애들과 시시덕거리는) 턱남은 이르지 못한 경지'(p.280)에 오른 남자였다. 


  반면, 두 번째 만나게 될 수학 과외 선생에 대한 감정은 싫음이다. 첫 번째 수학선생과 비교되는 두 번째 수학선생의 얼굴 묘사는 이렇다.  '거추장스러운 비밀의 자취와도, 참담한 비극의 흔적과도, 인생을 잠식하고도 남을 사랑의 열기와도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을 것만 같은 그 얼굴을.'(p.290)


  그러니 첫 번째 수학선생. 화자에게 온 첫 번째 사랑은 비극의 주인공을 비극적으로 사랑하는 자신이 있었다. 좀 더 비밀스럽고 참담하고 사랑의 열기로 들끓는 상황. 그런데 이런 자신의 마음은 확고한데 이상하게 같은반 짝꿍 턱남에게도 요동치는 마음은 무엇일까. 턱남만 보면 나대는 심장을 극구 거부하는 화자.


  전학 간 학교에서 만난 짝꿍 턱남은 키가 너무 크고, 마르고 연약하고 농구를 못하고 외고 입시를 준비한다. 반 아이들은 남자답지 못한 그 애를 '턱남'이라고 부른다. 턱남은 화자에게 관심이 많다. "너 옆모습이 정말 예쁘구나"(p.269)라고 말하고 화자 책상 서랍에 초코파이, 사탕을 몰래 두고 간다. 그 아이의 행동이 점점 로맨틱해진다는 사실. 감미로운 기운으로 충만한 화자다. 화자는 턱남에게 끌리는 마음을 극구 부인한다. 이건 절대 사랑이 아니라고. 사랑의 모습은 이토록 싱거울 수 없다고. 


  그러나 그 아이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심장은 빠르게 뛰기 시작한다. 서로 집 전화번호를 교환했지만 진짜 자신의 집으로 전화를 걸어온 턱남. 턱남의 목소리에 얼굴이 붉어졌고, 심장박동은 빨랐지만 그 상태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화자. "내가 사랑하는 건 다른 사람인데, 나는 턱남을 사랑하지 않는데, 왜 심장이 이렇게 반응해야 한단 말인가?"(p.284) 어색한 풋사랑. 어색한 짝사랑. 


  사랑은 화살과도 같다. 때론 명중하고, 때론 빗나가고. 엄마와 아빠처럼 명중한 사랑은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다. 화자의 관점에서 부모의 사랑은 현실적인 사랑이다. 그러나 이런 사랑은 피곤해 보이고 로맨틱이 결여된 것 같다. 반면, 화자가 꿈꾸는 사랑은 과외 선생님 같은 사랑이다. 참담한 비극과 인생을 잠식하고 남을 사랑의 열기로 가득 찬 사랑. 이뤄질 수 없는 빗나간 사랑. 이런 과외 선생을 좋아하는 화자. 과외 선생은 다른 여자를 좋아하고, 턱남은 화자를 좋아하고. 


"너도 한번 살아봐라. 어떻게 되는지" (p.271)


엄마가 하는 말. 이 말에는 '무능함과 열없음'(p.306) 섞여있지만 때로는 이것이 사랑을 완성하는 데 필요할지도 모른다. 살아보면 배신도, 거짓도, 깨짐도 경험하며 모든 것에 들뜨지 않고, 들끓지 않을 수 있는 감정. 


<첫사랑>은 사랑의 여러 형태를 숨 가쁘게 소개한다. 열여섯이 느끼는 사랑의 감정선은 복잡하고 미묘하다. 결국 자신만의 사랑을 만들어 나가겠지만 '첫사랑'만큼 순수하고 이유 없고 조건 없는 사랑은 드물 것이다. 화자는 자신의 '첫사랑'을 확대해석하며 타인과의 사랑과 비교하며 성처럼 쌓아간다. 그러나 지나고 보면 자신의 첫사랑도 철 지난 '엘리제를 위하여'(p.312) 멜로디 카드처럼 퇴색될 것이다. 첫사랑의 감정을 통해 한 뼘 성장한 소녀의 분투기가 아름답게 흘러가는 작품이다. 손보미 작가님 최고! 


[겨울밤+낭독여행] 선생님들 필사 감사합니다. 




<첫사랑>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어요. 



"너도 알아둬, 광활한 자연이 마음의 안식을 줄 수 있어."(p.253)라고 말하는 부분에 대해.

-수학 과외 선생님이 자신의 뉴욕 사진을 보여주는 모습에 대해.

-아직도 뉴욕에 간 여자친구를 잊지 못하는 과외 선생에 대해. 

-총각과 재혼하는 엄마에 대해.


-'......면 여자만 손해야.' 라는 엄마의 말에 대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 공부를 하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기회가 생겨."라고 말하는 외삼촌에 대해.

-새아빠와 나는 서로를 가족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었는데, 엄마만 오래전부터 가족인 거 같다는 화자의 생각에 대해.

-전학을 가고 남자 짝꿍이 코피를 흘리는 화자에게 휴지로 막아주는 일에 대해. 

-"쓸데없는 데 정신 팔리면 안 돼, 절대"라며 남녀공학에 다니는 딸을 걱정하는 엄마에 대해.

-늦둥이를 낳아 키우는 엄마를 바라보는 화자에 대해.

-공원 벤치에 앉아 끝도 없이 수다를 떠는 화자에 대해.

-같은반 친구들이 '턱남'이라고 부르는 남자에 대해.

-'턱남'을 생각하는 화자에 대해.

-지하철로 여덟 정거장 떨어진 곳에 사는 '소울메이트'라는 친구를 만나러 가는 엄마에 대해.

-"너도 한번 살아봐라, 어떻게 되는지."(p.271)라는 엄마 말에.

-복층아파트에 사는 친구를 만나고 와서 수학과외를 시키려는 엄마에 대해.

-고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수학을 철저하게 해야 한다는 엄마 친구의 말에 대해.

-엄마의 '초록색 투피스'(p.275)에 대해.

-턱남과 수학 과외선생을 비교하는 부분에 대해.

-턱남이 집 전화로 전화를 했을 때 밥 먹는 중이라며 끊는 화자에 대해.

-'내가 사랑하는 건 다른 사람인데, 나는 턱남을 사랑하지 않는데, 왜 심장이 이렇게 반응해야 한단 말인가?'(p.284)라는 말에 대해.

-다음날 턱남이 화자를 못 본 척 한 것에 대해.

-수학을 가르치다 잠깐 바닥에 눕는 수학과외 선생에 대해.

-"어깨 주물러드릴까요?"라고 말하는 화자에 대해.

-복층 아줌마네 집에 가서 만난 언니의 말에 대해 "다른 선생님은 안 구해? 그 오빠는 군대에 갔잖아."(p.286)

-"선생님은 제대를 하면 곧바로 결혼할지도 몰라요." "아, 그 언니? 아닐걸? 절대 아닐걸?"(p.298)

-새로 온 과외 선생에게 그전에 있던 선생 이야기를 하는 화자에 대해.

-턱남이 '엘리제를 위하여' 멜로디가 나오는 카드를 보내온 것에 대해. 

-그 외 




발췌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한 건 비밀이야. 아무에게도 말해선 안 돼.”

그의 마지막 말이 내 마음을 끝내 요동치게 만들었다. 나는 그가 그런 얘기를 했다는 사실, 내가 그와 대등한 관계에 놓인 여자처럼 받아들여졌다는 사실 때문에 이루 말할 수 없는 만족감을 느꼈지만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며 대답했다.

“아무에게도 말 안 할 거예요.”

기어코 새끼손가락을 내밀고 약속을 받아낸 그는 바로 내 수학 과외 선생님이었다. (p.254)


엄마의 배가 점점 불러오면서 새아빠의 태도에도 변화가 생겼다. 그는 여전히 나와 단둘이 있는 걸 어색해했지만 내 앞에서 엄마를 부르는 목소리는 더없이 부드럽고 유연해졌고, 어딘가 당당해진 느낌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는 곧 진짜 아버지가 될 예정이었으므로. 거리낌없이 엄마의 부른 배를 만지고 배에 귀를 갖다대거나 무언가를 속삭일 권리가 있었으므로. 엄마는 그런 새아빠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이 세상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다는 듯한 (나에게는 생소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들을 애써 못 본 척했다.(p.263)


“다른 선생님은 안 구해? 그 오빠는 군대에 갔잖아.”

일순간, 보이지 않는 작은 구슬들이 연쇄적으로 내 몸 어딘가를 가격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가 입대한 걸 그녀가 알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놀라움을 느꼈다(그녀를 가르친 건 몇 년 전의 일이었는데 둘은 계속 연락을 해온 걸까?). 그것보다 나를 더 상처준 건, 그녀가 그를 ‘오빠’라고 불렀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내 기분이 상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내가 놀랐다거나 상처를 받았다거나 기분이 상했다는 티를 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내 마음을 그녀에게 절대 들키고 싶지 않았다. 만약 그녀가 내 기분을 조금이라도 눈치챘다면 죽고 싶을 정도로 비참해질 것 같았다. 나는 짐짓 태연한 척하며 그녀가 건네준 상장에 적힌 글자(‘위 사람은……주최……전국 학생 미술 대전……입상……위 상장을 드립니다’)를 마음속으로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쥐어짜듯이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그냥 학원을 다녀도 되고요.” (p.296)


카드를 펼치니까 멜로디가 흘러나왔는데, <엘리제를 위하여>, 뭐 그런 곡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애는 고등학생이 된 걸 축하한다고 썼다(그게 그렇게 축하받을 일인가?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자신은 고등학생이 된 기념으로 부모님이 휴대전화를 사주셨는데, 혹시 필요하면 연락하라며 자신의 번호를 남겨놓았다. 카드의 가장 마지막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안녕, 잘 있어.

나는 봉투는 보란 듯이 식탁 위에 올려두었고, 카드는 내 책상 서랍안에 넣어두었다. 물론 내가 그애에게 연락할 일이 생길 거라고, 그런 필요성을 느끼는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그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p.312)



https://blog.naver.com/bhhmother/223360219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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