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도 없이, 다짜고짜 전시장부터 예약했다.
조건에 대한 고려는 전혀 없이.
무조건 저렴한 곳.
그래도 시내 한 복판에 있는 곳.
“고려 화랑”
일단 배수의 진을 치고 본 것이다.
도망갈 곳이 없다....... 비장감이 마구마구 몰려왔다.
날은
1978년 6월 어느 날로 결정했다.
우선 50편의 작품이 필요했다.
내다 걸 작품이 있어야 전시회고 뭐고 할 수 있는 것이니까.
우선 중심이 되는 우리 2학년에서 30~35장,
1학년에서 10~15편.
3학년은 내든지 말든지.
일단 시작했다.
매주 일요일 마다 촬영을 나가고
월요일은 필름 인화, 화요일은 판독을 했다.
우선 3월, 4월은 작품이 나오든 안 나오든 느긋하게 진행했다.
‘필름 한통에서 두세 개는 나오겠지?’
하지만 큰 오산이었다.
보통 촬영 한 번에 작품이 될 만한 컷은
전체 필름에서 1~2개에 불과했다.
4월 중순이 넘어가니까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우리 생각으로 적어도 70편 정도는 준비되어야
최종 심의를 거쳐 40개 정도를 확정할 텐데
두 달을 남겨두고 겨우 20편이니 말이다.
‘큰일 났다. 이젠 정말 비상이다.’
아무래도 철이 없는 고등학생들이다보니
놀기 바쁘니 작품이 될 만한 컷이 쑥쑥 나오겠는가.
이제 회장으로서 애들을 다잡아야 했다.
토요일 오후에도 내보내고 일요일도 내보내고
주말에 부진한 애들은 학교의 허락을 받아
수업 중에도 강제로 카메라 들려서 거리로 내보냈다.
화요일 평가회가 살벌할 수밖에 없었다.
‘경비가 문제가 아니라 작품이 없어서
전시회를 못하게 되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올수도 있다.’
불안했다.
그렇게 다그쳤음에도 5월 중순까지는 지지부진했다.
‘아~~ 울고 싶다.’
주중에 애들을 자꾸 빼내니
선생님들도 짜증을 내시고 협조를 거부하는 분도 생기기 시작했다.
“너희가 야구부냐!”
특히 1학년의 부진은 심각했다.
거의 5월 초순까지 작품이 하나도 없었다.
이제 겨우 카메라 조작법을 배우기 시작한 애들이니 뭘 바라.......
5월 중순을 넘기니까
애들도 문제의 심각성을 자각하고
필름 한 장 한 장을 아끼기 시작했다.
그 결과로
작품이 쏟아졌다.
어떤 경우,
카메라를 들고 시내 높은 건물 옥상에
무단으로 올라갔다가
거동 수상자로 경찰에 신고가 되어
학교로 통보된 녀석도 있었다.
드디어 애들이 자각을 한 것이다!
급하니까 다들 스스로 해결하기 시작했다.
대견하게도.
다행히 6월이 되기 전에 작품은 준비가 되었다.
작품은 우리가 직접 골랐고
대구 매일 신문사에서 사진 기자를 하고 계시는
선배님의 평가를 받기도 했다.
작품은 전부 흑백 사진이었다.
칼라 사진을 금하지는 않았으나
아무도 제출하지 않았다.
컬러는
현상, 인화를 전부 외부에 맡겨야 하니까
아이들은 그게 싫었던 것이다.
우리의 장점은 스스로 다하는 것이니 말이다.
우리 눈에는 그런 부분이 비겁해 보였다.
“사진은 흑백이야!”
“아무래도 고등학생이니까 안목에는 한계가 있으나
모든 것을 스스로 하려는 마음이 가상하다.”
선배님의 한 말씀에 큰 용기를 얻기도 했다.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40여 편의 작품은 준비되었다.
어려울 것 같은 일이 하나씩 되어가니
아이들의 자신감도 쑥쑥 올라갔다.
‘어? 이게 되려고 그런다? 이게 되네!’
이제 작품이 나왔으니 6월에는
현상과 인화 작업, 액자 작업,
포스터 등 홍보 활동을 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4박5일의 전시회가 남아 있다.
이야기가 너무 길어져
마지못한 나머지
다음 편으로 이어갈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