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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두소이 Aug 03. 2021

15 대두소이의 경제이야기

부익부빈익빈과 재분배에 대한 소견

부익부 빈익빈


나는 어릴 때부터 부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자수성가한 분들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듣곤했다. 그리고 열심히 한다면 누구나 자수성가가 가능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부모님 재산도 물려받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얼마 안되는 재산임에도) 단지 내가 열심히 잘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내가 혼자라면 가능하다고 여전히 생각한다.

하지만 결혼해서 아이 둘을 키우는 가장의 입장에서는 다르다. 내 자신만 생각해서 임의로 비용지출을 줄일 수도 없다. 그리고 부모로서 자식을 위한 비용은 좀더 관대하게 지출하는 경향이 있어서 절약이 쉽지 않다. 이렇다 보니 자신감은 상대적으로 떨어지고 부모님으로부터 기대할 만한 물려받을 재산이 별로 없음이 아쉽게 느껴진다. 또한 사회 조직 사이에 보이지 않지만 거미줄처럼 학연, 지연 등의 인맥 등으로 얽히고 설킨 사회 속에서 내게는 그런 인맥이 없다고 생각되니 이러한 자신감은 한없이 낮아졌다.

그럼에도 여전히 기회는 있다. 그 기회를 어떻게 활용하느냐는 본인의 결심에 달린 일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쉽게 말할 수는 없다. 모든 사람이 기회를 다 잘 활용할 수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이 심각해 지면 사회적 갈등을 유발하고 극단적인 경우에 사회가 붕괴되는 경우도 발생될 수 있다. 그래서 국가 차원에서 다양한 복지정책 등이 수립되고 시장경제에 대해 통제를 하기도 하는 것이다.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을 보면 부의 불평등은 제 1 차 세계대전 직전이 가장 극에 달했고 전쟁으로 인해 완화되었다가 최근 심각해져 가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역사 속에서 공산주의 등장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했을지 모르겠다. 공산주의는 이념적으로 어떨지 모르지만 현실에서 인간의 본성과 탐욕에 맞지 않아 지속될 수 없었다.

대학에서 경영학 전공 수업 중 기억에 남는 수업이 있다. 안타깝게도 수업 이름이나 교재의 이름은 생각이 나진 않지만 그 내용만큼은 깊은 인상을 주었다. 내용은 일종의 산업 간의 경제흐름을 보여주는 것이다. 산업간 돈이 흘러가야 경제 전체가 활성화된다는 그런 내용이었다. 물론 그 흐름이 원활하지 않으면 악순환이 될 수도 있는데 부익부 빈익빈이 그 악순환의 결과이다.

엥겔지수(소득대비 식료품비 지출 비율 측정)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일차 욕구 중 하나인 식욕을 위한 소비는 소득이 증가함에 따라 일정부분 증가하지만 소득 증가대비 크게 늘지 않아 식료품비 비중이 낮아짐을 보여준다. 부익부 빈익빈이 심해지면 부자들은 소득 증가된 만큼 식료품비를 지출하지 않게 되고 가난한 사람들은 줄어든 소득으로 인해 식료품비 지출을 줄이게 되어 식료품과 관련된 산업 경제가 주춤하게 된다. 이는 자영업을 생업으로 하는 서민들의 수입을 줄어들게 해서 부익부 빈익빈은 심화된다.


부의 재분배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 인위적인 부의 재분배가 필요한데 이는 입법이나 행정 등을 통해서 실현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그래서 우리는 작지만 정치에 관심을 갖고 이러한 정책들을 실현할 수 있는 사람들을 선출하고 정책을 입안하여 실행되도록 국민주권을 행사해야 한다. 아니면 내 학사 졸업을 위해 작성했던 논문인 “진정한 균형성과 지표”를 통해서 기업들의 참여를 유도해야 한다. 진정한 균형성과표란 균형성과표(Balanced Score Cards)에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관한 Score를 추가하여 작성한 표로 내가 만든 개념이다.

저소득층의 소득을 증가시켜 경제성장을 유도하는 것을 나중에야 알고 보니 소득주도성장으로 대한민국 정부가 추진하는 경제정책 중 하나였다. 과거 유신 정권 시절 전체 파이를 키워 분배가 커지도록 하는 정책이 거시경제 측면에서 한국경제를 발전시켰을지 모르지만 현재 한국사회가 선진국 반열에 들어서는 시점의 저성장 기조에서 소득주도성장은 매우 적절한 경제정책으로 판단된다. 사실 시점을 떠나서 소득주도성장은 지속적으로 추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에서 국가간 통계를 통해 잘 보여주듯이 자본주의 사회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인간의 탐욕으로 인해 자연스레 심화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흘러넘침

 

아직도 세계 어느 곳에서는 기아로 인해 죽게 되는 경우가 여전히 많다. 이를 위한 여러 다양한 해결책 중 일부에서 슈퍼옥수수처럼 식량의 생산량을 증대시켜 기아 사망률을 줄여보고자 연구하던 경우들이 있다. 단편적으로 보면 맞는 이야기 같지만 성경적으로 보면 부적절한 해결책이다. 성경은 가난한 자들과 나누며 사는 것에 대해 많은 곳에서 권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구약시대의 ‘희년제도’가 그런 제도 중 하나이다. 삶 속에서 실패로 인하여 자신의 재산(구약 시대-땅)을 잃어도 희년이 되면 돌려받을 수 있도록 하는 제도였다. 부의 집중을 막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였다. 성경은 하나님에 대해 “과부와 고아, 나그네”의 하나님으로 기록하는 부분들이 많다. ”여호와께서 객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시146:9) 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두라”(신24:21)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시나니”(신10:18) 고아와 과부, 그리고 나그네는 구약 시대에 1차적 욕구인 먹고 자고 옷 입는 것에 대해 쉽게 누릴 수 없는 소외 계층이었다. 하나님은 이러한 약자의 하나님이신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탐욕적이기 때문에 쉽게 자신의 것을 나누며 살기가 힘들다. 그리고 혹자는 나누면 자신의 몫으로 충분히 누릴 수 없기 때문에 나누기 싫어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효용의 극대화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충분히 주셨다. 상징적이긴 하나 오병이어나 칠병이어의 표적은 이를 잘 드러내어 준다. 한 사람 도시락 분량을 다수를 위해 예수님 앞에 놓았을 때 모인 무리가 다 먹고도 충분히 남게 된 것이다.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요6:9)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요6:11)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에 찼더라”(요6:14)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자원이 제한되어 있다곤 하지만 음식 같은 경우는 넘치고 넘친다. 오히려 다이어트 산업이 10조원에 육박하는 실정이다. 그리고 생산된 음식물 중 3분 1이 쓰레기로 처리된다고 하니 음식의 양이 부족해 문제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죄로 물든 이 세상의 이러한 불균형을 허락하신 것은 그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한 나눔을 통해 빵과 함께 복음과 사랑이 흘러가기를 바라고 계시기 때문이다.


비즈니스 선교


부의 재분배가 필요해서 법으로 억지로 분배가 이루어지면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 이는 복지국가의 위기로 잘 설명될 수 있다. 부의 재분배가 억지스럽지 않고 부작용이 발생되지 않도록 하는 방법은 바로 일자리를 통해서 가능하다. 김진홍 목사님의 “항무지에 장미꽃같이”에서 잘 보여주듯이 대가없이 퍼주는 것으론 인간의 게으름과 의존성을 깰 수 없고 일자리를 통하는 것만이 자존감에 상처를 주지 않고 정당한 분배가 가능하다. 이를 위해선 법적, 제도적 장치가 필요한데 기업사회에서도 대기업이 이익을 독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점점 모든 것이 대형화, 대기업화 되는 현상에서 소위 골목상권을 지켜주고 영세한 자영업자들이 지속적으로 생계를 이어갈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일자리를 통한 자연스런 분배는 불가능할 것이다.

비즈니스 선교(BAM)는 Business As Mission으로서 사업이 곧 선교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형태이다. 비즈니스 선교는 사업과 선교를 각각 세속적으로 영적으로 분리해서 보던 시각에서 통합적으로 사업이 곧 선교가 되도록 하는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한 손에 빵, 한 손에 복음이라는 구세군의 사명을 넘어서 세상 속에 사는 우리가 삶의 현장에서 복음의 가치가 선포되고 하나님의 정의가 실천되는 세상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비즈니스 선교는 선교적 삶(Life As Mission)으로 발전한다. 이는 성도의 삶과 다르지 않다. 결국 우리는 원점으로 돌아온 셈이다. 하나님의 비전이 하나님의 영광과 그 나라의 확장이라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우리는 성도로서 자연스레 선교적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름만 거창하지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이다.

해외 주재원으로서 살다보니 선교사는 아니지만 못지 않게 선교대상이 되는 현지인들과 자연스레 업무로 인하여 연결이 되고 이를 통해 그리스도인으로서 선한 영향력을 행사할 기회들이 많이 생긴다. 관리직에 있어서 비록 일부 제한적이긴 하지만 필요에 따라 현지인들을 위한 정책이나 제도 등을 수립할 수 있다. 물론 기술직에 있다하더라도 기술 전수를 통해 현지 인력들이 업무에 대한 경쟁력을 갖도록 지원할 수 있다. 사업을 직접 운영한다면 회사를 복음적으로 운영도 가능하고 현지인들에게 복음을 접할 기회를 더 많이 만들어 낼 수 있지만 주재원의 경우도 결국 전체를 운영하는 회사의 장이 되면 비록 직접 소유한 비즈니스는 아니더라도 직원들에 대한 영향력을 직접 운영과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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