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이길 싸움엔 그냥 힘빼고 견디기
자랑은 되도록 감추는게 미덕이지만 감기 잘안걸린다는 자랑은 안 감추는 편이다. 근력도 없고 운동신경도 그닥, 자랑할게 없는 몸이라 감기에는 강하다는 점은 적극 홍보하게 된다. 내게 감기는 1년에 한번 걸리면 하루정도 골골대다 다음날 털고 일어나는 작은 이벤트에 불과했다. 게다가 코로나기간에는 마스크로 가리고 사람들과 멀어지니 무려 2년이나 아무 이벤트가 발생하지 않았다. 코로나에 걸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되는데 고생을 안해서 철없게도 코로나 재택격리와 코로나 공가가 그렇게 부러웠다. 심지어 코로나 앓는 친구에게 쓰던 마스크받으러 갈까?하는 오만한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나라가 외세에 크게 휘청이기 직전에는 영원히 평화가 지속될거라 믿는 백성들의 방심이 있었다는데 아마도그런 망조의 전철을 밟고 있었던가 싶다.
감기따위 쯤은 하고 자만이 하늘을 찌르던 바로 그때 엄청난 것이 훅 들어왔다.
때는 2023년 10월 막바지 일요일... 요즘 맛들인 하이볼 한잔으로 주말을 마무리하려는데 이상하게 내가 알던 그 맛이 안나고 니글거렸다. 알수 없는 불편감에 일찍 잠을 청했는데 밤새 그 불편감은 근육통, 오한, 발열로 바뀌어 한 숨도 못자게 들들 볶았다. 한동안 잊고 있던 익숙한 느낌 바로 '몸살'이였다.
무슨 촉이 있었는지 월요일은 휴가를 써놓았었다. 휴가가 요양에 쓰이는게 아까운거 말고는 별거 아니라고 여전히 오만한 여유를 부려보았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다음날 본격적인 질주를 시작한 병세는 과거 앓았보았던 감기와 차원이 다른 스케일로 나를 휩쓸고 지나갔다. 거의 일분일초를 쉬지도 않고 온몸 구석구석을 쑤셔되어 눕지도 서지도 자지도 깨지도 못하는 고통스럽게 하루가 꾸역꾸역 흘러갔다. 보통 감기하면 떠오르는 기침 콧물 뭐 이런 증상은 느낄새도 없이 그냥 죽도록 아팠다. 다음날.. 그리고 다음날 휴가가 뒤섞이고 낮과 밤의 경계가 사라지길 반복하였다.
그러나 이젠 살만하다 하고 정신을 차리니 벌써 4일이 지나 있었다.
'니가 앓은게 뭐였냐'고 물어본다면 그냥 구구절절 증상을 설명할 수 밖에 없다. 온몸 구석구속 쑤시는 삭신(심한 근육통), 쪼개지는 듯한 두통, 목에서 기관지 내려가는 길이 느껴질만큼의 불타는 느낌 (작열 인후통)을 느꼈다고... 온몸이 너덜너덜해지는 고초에 충격을 받았는지 나의 평생 동반자인 식욕까지 도망가 버렸다. 정체를 알수없는 병원체(바이러스)는 코 목 기관지를 망가뜨리더니 급기야 음식 소화 기능도 고장내 버렸다. 결정적으로 아픈지 2~3일째부터 후각과 미각이 통으로 날아가서 입에 뭘 넣어도 고무씹는 느낌만 날뿐 그 어떤 쾌락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도 이런 긴 설명을 듣다보면 '아니 그래서 그게 뭐냐고'라고 채근할지도 모른다.
그 옛날 '라떼'는 열나고 콧물 기침에 아파 죽는 얼굴로 비실대면 별다른 입증과정없이 몸살감기환자라고 병자 취급을 해주는게 불문율이었다. 하지만 코로나가 모든것을 바꿔 버렸다. 숨은 코로나 바이러스를 색출하는검사에 익숙해 져서 이젠 다른 바이러스 검사도 낮설어 하지 않는다. 그렇게 예전에는 그냥 감기였던 열성 상부호흡기 감염병이 코로나인지, 인플루엔자인지 아니면 RSV인지 자기 이름들을 가지게 되었다. 이름이 없는 감기몸살을 앓은 나는 웬지 아무에게도 병을 이겨낸 수고를 인정받지 못해 서운함마져 들었다.
감기 혹은 독감걸렸다라고 하면 99.99%가 약은 먹었니 아니면 병원 가야지라고 물어본다.
이런 천편일률적인 질문에 난 늘 뭐라 답을 해야할지몰라 그냥.. 눈만 껌뻑거린다.
그러면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스스로가 알고 있는 최고의 감기약을 소개한다. 어디어디서 구한 그 약을 먹었더니 단박에 감기가 똑 떨어졌다는 진귀한 경험담까지. 나만 안먹고 다먹고 있는 감기 특효약은 과연 무엇인가.
감기나 독감의 원인은 바이러스이다. 하지만 현대의학으로 아직 내몸에 들어온 바이러스를 한방에 박멸시키는 약은 개발된 바가 없다. 요즘 질병 위험자에게 처방하는 항바이러스제도 엄밀히 완치약이라기 보다는 바이러스를 억제해 병의 중증을 완화하는 약이다. 완전 감기 특효약이라 믿고 있는 약들도 알고보면 감기의 증상을 줄이는 대증치료약에 불과하다. 말그대로 열을 낮춰주고, 콧물을 줄이고 통증을 경감시키고 가래를 녹이는 역할밖에 없다.
그래서 교과서적인 감기의 치료는 휴식, 충분환 수분, 영양 섭취가 메인이고 추가로 여러 생활요법과 대증약이 보완적 역할을 해 줄 수 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감기하면 가장 먼저 해야하는 것이 병원가기와 약먹기가 되어버렸다.
이번 감기 엄청나다고 엄살을 좀 부렸더니 아파 죽겠다면서 약은 왜 죽어도 안먹냐며 친구들은 답답해한다. 감기약을 왜 안먹는지 이유를 따져보니 우선 감기약이 필수 치료약이 아니어서 그랬다. 덜덜 떨리는 오한과 열감이 있었지만 사경을 헤맬 정도가 아니라 해열제는 먹지 않았다. 그리고 삭신이 쑤실때는 그냥 아픔을 온전히 느끼고 지나가는게 빨리 끝났다. 진통제는 잠시 아픔이 덜하지만 기분도 몽롱해지고 나중에 약의 뒷끝이(위장장애, 기분저하) 느껴져서 별로였다. 아주 오래전에 콧물많이 나온다 하여 받아온 약을 먹자마자 정말 순식간에 코가 바삭하게 말랐던것을 기억한다. 내가 감기에 나은것도 아닌데 코만 아무일 없는척하는건 정말 기괴한 경험이었다.
결국 아프다고 엄살을 피웠지만 약 안먹어도 견딜만 한 정도였네해도 할말은 없다.
병원에 가지 않는 것도 비슷한 이유다. 열나고 머리아프고 온몸 쑤시고 콧물 줄줄나는것은 그냥 견딜만 한데다행스럽게도 각혈, 토혈, 혈뇨, 기절, 실신같은 무시무시한 중대 증상도 생기지 않았다. 감기때문에 조심해야할 중대 합병증 조짐도 없고 약은 줘도 안먹을거라 병원에서 원하는 것이 없었다. 물론 무슨 바이러스 인지 병원가면 알 수도 있겠지만 그마져도 별로 알고싶지 않다.
내가 코로나로 아프던, 인플루엔자로 아프던 내가 감당해야할 몫이 달라지지 않는다. 그저 남들한테 바이러스 안뿌리게 조심하고 감기의 고통이 끝날때까지 묵묵히 견디는 일만 남아있다.
아플때는 이러다 죽겠다말고는 아무생각도 안나더니 살만해지니깐 내가 뭘 건드린걸까 궁금했다. 다 지나간 판에 입증할 방법은 없지만 이번에 눈이 번쩍뜨일 정도로 제대로 맞은 감기는 아마도 코로나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2021년 코로나백신(아스트라제네카)을 맞고 겪었던 고강도 백신몸살(오한 열감, 전신통증, 두통)과 증상전개가 너무나 비슷했고 많은 코로나환자들이 겪었던 소화기 증상, 후각 미각 둔화(혹은 상실) 를 나도 겪었다.
코로나가 한국에 들어온지 어언 2년 만에 드디어 나도 코로나에 걸려본것인가 싶었다. 더 일찍 걸렸다면 공가도 재택격리도 누렸을 텐테 하는 몹쓸생각도 들고 백신 안맞고 걸렸으면 진짜 죽을뻔 했을지도 모르겠네 하는 다행감도 들고 별별 생각이 머리를 스쳐 갔다.
다시 감기에 강하다 말하려면 한 2년은 잘지내야 된다는 점은 매우 아쉽게 되었다. 허나 이번 감기에서 잘 살아 돌아왔는데 한 2년 겸손하게 지내는 것은 일도 아닐것 같다.
필자가 감기약을 먹지 않는 것은 스스로의 건강상태와 통증관에 따른 개인적인 의사결정이며 현대의학을 부정하거나 약물치료를 거부하는 무슨무슨 주의자는 아닙니다.
감기라하더라도 합병증을 일으킬 수 있는 위험 증상(예, 고열, 고강도 통증, 실신, 토혈, 각혈, 혈변, 혈뇨)이 있다면 진료와 투약이 필요합니다.
다만 건강관리를 잘해온 일반 성인이 지역사회에 유행하는 바이러스성 상기도 감염이 걸렸을때 합병증이 없다고 판단되면 스스로 견딜수 있는 수준에서 약없이 생활요법으로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코로나인지 아닌지 불분명할때는 주위에 특히나 건강에 주의가 필요한 이들에게 바이러스가 전파되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