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으로 모두를 불편하게 하다
일전에 사내 교육에서 IARC에서 지정한 발암물질에 대해 설명한 적이 있다. "가공육류가 발암물질 그룹중 1군이다"라는 대목에 이르자 청중이 웅성웅성 동요되더니 "가공육류가 뭐냐"고 질문이 들어왔다. IARC가 뭔지 궁금해 할 수 있어도 가공육류가 생소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당황했다.
평소 나에게만 당연하고 주위는 생경해하는 이슈가 생기면 조심하게 된다. 가급적 불필요한 오해나 자극을 줄이고자 '가공육류는 우리가 흔하게 먹는 햄, 소세지, 베이컨이죠'라고 짧게 답했는데 좌중의 공기는 더욱 무거워 졌다.
그도 그럴것이 내가 발암이라고 손가락질한 가공육들은 너무나 친근한 이미지로 실생활에 밀착되있기 때문이다.
어떤 점이 '건강'이고 어떤 점이 '더'건강일까 마트에 진열된 햄 소세지들은 너나 할거 없이 '건강한' 이미지로 포장되어 있다. 질 좋은 고기를 써서, 의성 마늘이 들어가서, 덜 짜서 등등 갖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중 가장 그럴듯한 것은 아질산염과 합성 첨가물 넣지 않아서이다.
남 얘기 하듯하지만 나도 어릴때 주식이 햄, 스팸, 프랑크 소세지였다. 성장기 부족한 열량과 정신적 공허감을 동시에 채워주었고 행복했던 식탁의 추억엔 자주 햄, 스팸, 소세지가 함께했다. 하지만 추억은 추억이고 팩트는 팩트다. 내가 당시에 먹었던 사각햄, 스팸, 분홍소세지는 공개적으로 아질산염과 여러 합성 첨가물을 넣은 가공육류다. 그런데 지금 식탁을 차지한 햄처럼 생기고 햄맛이나고 햄이라 부르지만 아질산염이 안들어가 '가공육류'가 아니라는 이 변종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리고 국제기관에서 암이 생긴다고 하는 가공육류와 내 조카가 맛있게 먹고 있는 더 건강한 프랑크 소세지는 무슨 관계인가.
이번 이야기는 그런 일상 호기심에서 출발한다.
가공육류가 어떻게 암을 일으키나
IARC(International Agency for Research on Cancer)는 세계보건기구(WHO)산하 다국적 기관으로 암과의 관련있는 건강 요인을 4개의 그룹(1, 2A, 2B, 3)으로 나눈다.
1군은 발암을 일으키는 것이 확인된 것이며 2 군(A, B)은 아마도 암을 일으킬것으로 추정되거나 유발할 가능성이 있을때 해당하며 3군은 암과의 연관성이 밝혀지지 않은 물질이다.
참고로 1군의 다른 구성원은 아래와 같다.
헬리코박터 파일로리, 유두인종바이러스(HPV)
알콜 (모든 술 포함), 가공육류
야외 공기오염(미세먼지)
흡연, 간접흡연, 자외선(UVA, UVB)
석면, 머스타드신경독(Sulfur mustard), 플루토늄
가공육이 1군이든 2군이든 관심없는사람도 1군에 방사능 플루토늄이나 담배도 있다는 걸 알면 매우 찝찝해한다. 하지만 너무 기분나빠 할건 없다. 같은 1군에 미세먼지나 알콜도 들어가 있지 않은가. 결국 암을 유발시킬 수 있지만 건드린다고 모두 암에 걸린다는 건 과장이다.
미세먼지있어도 회사에 출근해야 하고 회식으로 술마셔야 하는 직장인들은 이미 매일 1군속에 사는데 거기에 햄이 더해진다고 달라지는건 없다. 게다가 같은 1군인 담배는 폐암위험을 2000% 증가시키지만 가공육은 대장암 위험을 고작 '18%' 밖에 올리지 않는다. 따라서 나쁜 놈들도 각자 급이 다르기 때문에 모조리 최악의 빌런 취급할 필요는 없다.
IARC가 가공육을 1군에 넣은 이유는 고기를 가공할때 넣는 아질산염(Nitrite), 훈연할때 생기는 질소복합물(NOC), 다중고리방향수화탄소(PAH), 고기차제 성분인 헴(Heme)단백질 그리고 고온에서 구울때 발생하는 이종원소고리방향성아민(HCA) 등이 암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다른말로 이들이 포함되면 가공육이라 부를 수 있다.
이름만 들어도 암 걸릴거 같은 물질이 왜 들어가야 할까? 이유는 스팸이 전쟁에 나간 군인들에게 구하기 힘든 고기를 먹여 열량을 충분히 공급할 목적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구하기 어렵고 유용한 단백질 공급원인 고기를 오랫동안 보관하며 방금 도축한 것 같은 맛과 색을 내려면 특수 과정이 필요하다. 고기의 자연적인 부패과정을 중단시켜 미이라로 만드는 것이 큐어링(curing)이다. 고구마를 서늘하고 건조시켜 보관하는 것도 큐어링이지만 고기에선 소금과 아질산염에 섞어 담그거나 드라이하는 것 스모킹하는것을 말한다.
결국 햄을 만드는데 아질산염이 빠지는건 쉽지 않다.
그래서 '더 건강한 햄'은 햄인가 아닌가
이제 IARC의 1군 발암물질인 가공육류는 아질산염이 들어간 모든 햄, 스팸, 소세지이다라는 사실에는 큰 저항감이 없을 것이다. (물론 햄 먹고 모두 대장암 걸리는건 아니라는 말도 덧붙인다.)
본디 햄(Ham)은 돼지 뒷다리를 통째로 소금과 아질산염을 탄 물에 담그거나 가루를 비벼 숙성시키고 오븐에 구워내는 명절음식이다. 그 Ham이 우리나라에서는 고기를 갈아 아질산염 소금, 맛증강제, 색소를 섞어 굳인 네모난 블럭으로 만들어 도시락 반찬이 되었다.
아질산염은 신선한 고기의 분홍색이 오래되어 회색이 되지 않게하고, 지방이 산패해 불쾌한 냄새가 나는 것을 막는 핵심재료다. 그런데 어떻게 아질산염이 없이 햄과 스팸, 소세지를 만들까? 그 비결을 찾으러 더 건강한 햄의 뒷면 성분표를 꼼꼼히 읽었다.
더 건강한 햄의 원재료들 햄의 주재료는 역시 89%의 돼지고기이다. 그리고 장시 보존하기 위해 소금을 맛을 위해 설탕과 비프소스넣는것까지는 이해가 된다.
하지만 나머지 복합스파이스? 베지스테이블? 야채발효균? 코치닐추출? 당췌 알 수 없는 성분명을 하나하나 해석하느니 차라리 광고문구를 읽는게 나을 듯해서 기사를 검색했다.
더 건강한 이유 기사에는 더 건강한 햄의 탄생비화 그리고 건강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소개되있는데
인공적이고 나쁜 첨가물인 아질산나트륨 대신에 착한채소 셀러리가 들어간 것이 핵심이었다.
왜 뜬금없이 셀러리인가 해서 조사를 해보았다. 셀러리는 천연 질산염(Nitrate)이 풍부해서 착즙해 농축하고 이것을 세균 배양과정을 거치면 아질산염으로 변환된다고 한다. 그 셀러리로 만든 아질산염이 베지스테이블 502라는 재료명으로 들어간 것이다.
가공육류의 정의는 큐어링한 고기이다. 아질산염의 원료가 합성이든 셀러리 주스든 고기가 아질산염 처리되면 가공육류가 된다. 이 셀러리 질산염이 일반 질산염보다 발암위험이 줄어든다는 근거도 없다. 샐러리 햄이라도 가공육류의 굴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뜻이다.
베지스테이블의 비밀을 캐다가 우연히 색소에 대한 사실을 덤으로 알게 되었다. 코치닐추출색소는 햄의 붉은 색을 내는 천연색소이다. 더 건강한 재료를 써도 색소는 버릴 수 없었다는 점이 놀랍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것은 그 '천연'색소의 정체였다. (비위가 약한 분은 안보는게 좋겠다.)
코치닐추출색소는 E120, 카르민 등 다양한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이 천연색소의 원료가 다름아닌 연지벌레라는 것. 연지벌레 암컷이 산란기가 되면 복강내다량의 알에 색소가 고농도로 집적되… 산란전에 채집하여 죽인후 말려… 색소의 원료로 사용한다….(참조 위키피디아 cochineal)
코치닐 벌레 다행히 코치닐색소는 암과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 어짜피 예전의 내가 먹은 분홍소세지는 인공색소를 써서 만든거고 지금의 나는 햄을 먹지 않아 상관없긴한데... 굳이 냉장기술이 발달한 요즘 세상에 고기에다 샐러리 아질산염과 연지벌레 가루까지 넣어 '더 건강하게' 만들어 먹을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뿐이다.
결론은 더 건강한 햄의 건강한 맛과 색은 순수한 고기의 맛과 색은 절대 아니며 식품분류상 IARC가 정의하는 가공육류가 맞다는 것이다.
스팸을 건강하게 먹는 법 ??
나도 먹어 왔고 다들 먹고 있는 가공육류가 앞으로 사라질거 같진 않다. 내가 바라는건 소비가 좀 줄어들었으면 하는 것 뿐이다. 그런데 성숙한 성인에게 햄 먹으면 암 걸린다는 공포전략을 쓰는 건 웃긴 일이고 별 효과도 없다. 스스로 판단하여 가공육 섭취량을 조절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다. 그러기 위한 첫 단계는 가공육을 건강하게 먹을수도 있다는 속설의 진위를 파헤치는 것이다.
스팸은 적은 노력으로 맛을 업그레이드 하는 치트키인데 바쁜 현대인에게 이 치트기의 편리함과 가족의 건강은 항상 부딯친다. 이때 극적 타협점이 바로 스팸을 데치는 것이다.
요리블로거의 건강스팸 언듯 보면 말이 된다. 우리나라는 식재료를 씻는 것부터 정성스런 집밥의 기본으로 본다. 스팸, 햄도 정성껏 끓는 물에 헹구면 첨가물, 유해물이 싹 녹아내릴거 같은 느낌은 나도 가지고 있다.
이런 일반 속설은 매우 그럴사하게 과학적으로 옹호되고 있다. 아래 블로그는 어떻게 스팸을 건강하게 먹는지 체계적으로 설명해주고 있다.
나도 반쯤 설득당한 건강논리
끓는 물에 데치면 유화제 발색제가 깨끗하게 제거된다니...
틀린 말은 아니다.
뜨거운 물에 헹구는 것은 돼지다리를 통으로 아질산염소금물에 담궈 만든 햄에서 표면의 아질산염을 좀 헹구려고 고안한 방법이다. 허나 스팸은 다르다. 스팸은 돼지고기를 죽처럼 갈고 거기에 아질산염과 색소 보존제 첨가제를 믹싱하여 만든다. 스팸을 어느 부위를 잘라도 같은 색과 같은 향, 같은 맛이 나는 것은 고기와 아질산염, 색소, 첨가제가 스팸 한 덩어리에 균일하게 녹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팸을 잘라 뜨거운물에 잠깐 담구면 표면의 일부 아질산염이나 색소는 떨어져 나갈지 몰라도 전체 첨가물에서 빠져나가는 양이 의미있다고 보기어렵다.
100이 98이 된거면 그 2가 의미있는 감소일 수 있지만 어쨌든 90이상인것은 변화없다.
정말 스팸첨가물을 100에서 0으로 빼려면 스팸을 갈아서 물에 담그고 스팸 맛이 다 빠져 나가게 짜내야 한다. 그렇게 아무 맛 없는 곤죽을 먹느니 그냥 생고기로 요리해 먹는게 낫다.
재밋는건 이미 건강하게 만들었다는 햄의 제조사도 이 끓는 물 데치기를 앞장서서 권한다는 것이다.
제조사 제공 레시피 더 건강해도 2중 3중으로 건강하게 만들라는 주문일지도 모른다. 즉 건강하게 가공육류를 먹을 수 있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심어주고 있다.
조금만 생각해도 보이는 진실이 지금까지 모두에게 외면받고 있는 것은 매우 신기하다. 아마도 모두가 같이 하는 것은 이미 검증받은 것으로 여기는 군중 속 안락함 때문일 것이다.
담배는 명확하다. 아이들 앞에서는 태우는 담배도, 아이코스도, 전자담배도 모두 안된다는데에 동의한다. 어른들은 지나가는 담배연기를 좀 들이켜도 되지만 아이들에게는 1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원칙인 것이다.
그런데 스팸은 재밌다. 몸에 안좋지만 데쳤으니 안전하고 건강하게 먹일 수 있다는 논리가 먹힌다. 오히려 스팸이 그리 건강하지 않다면 일주일에 두번 먹던 것을 한번으로 줄이는게 더 설득력 있는데 말이다.
물론 애들이 스팸먹는다고 큰일나는 건 아니다. 나도 어릴때 스팸 프랑크 소세지 엄청 먹고 자라왔지만 암은 걸리지 않았다. 다만 내 조카의 행복과 건강에 아무리 낮아도 18% 위험을 가진 소세지가 끼어드는게 불편하긴하다.
내가 모두를 불편하게 하면서 '더 건강한' 햄과 소세지들에 가공육이라는 이름표를 굳이 붙이려는 것은 내입에 뭘 넣고 있는지 알고 먹자는 것이다. 내가 뭘 먹으라 마라 할 자격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