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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즈케이 Jul 04. 2019

처음으로 사기당했다, 덕분에 영어에 미쳤다.  

방과 후에 교육용 컴퓨터, 자막나오는 카세트 테이프 파는 아저씨들 

내가 중 1, 2004년도였다. 

방과 후에 아이들이 어떤 아저씨를 둘러싸고 홀린 듯이 그 아저씨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한 아저씨가 영어 테이프가 잔뜩 든 커다란 가방과 오디오 카세트 테이프 이런 걸 들고 설명하고 있었다. 

당시엔 아직 mp3가 있을 때가 아니어서, 오디오 카세트 테이프를 가지고 싶은 그런 로망이 있었을 때 였다.

 게다가 저 오디오 카세트는 영어 자막이 나온댄다! 


그러면서 가방 속에 든 테이프를 하나 넣어 오디오 카세트에 넣는데 실제로 그 캡션창에 재생되는 테이프 음성에 맞춰서 자막이 표시됐다. 우와, 잠깐 보려다가 홀렸다. 그러곤 그 아저씨는 구매원하는 사람은 일단 종이에 이름과 주소를 쓰라고 했다. 자세한 건 부모님과 상담을 통해 판매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아저씨는 예정대로 우리집에 전화를 했고 방문했다. 

당시 어머니는 몸이 편찮으셔서 방에 계셨고 나 혼자 거실에서 아저씨를 맞이했다. 나는 미리 아버지에게 뻥을 쳐서 현금 20만원을 확보한 상태였다. (우리 아버지는 법조인이라 이런 사기는 금방 간파하지만 내가 그냥 간단하게 "학교 선생님이 추천한 학습 교재들"이라고 설명해서 그냥 믿고 돈을 주신 거 같다) 

그렇게 나는 영어 테이프랑 카세트파는 아저씨한테 방문판매사기(?)를 당해 캡션 카세트(자막이 나옴)와 EBS 허접한 복사본 교재, 테이프 50개를 20만원에 구매했다. 그것도 당시 부모님에게 "선생님이 구매하라고 추천했다"라고 뻥을 쳐서. 

지금도 이런 사기가 흔한지 모르겠으나 당시에는 미니 교육용 컴퓨터를 파는 등, 신기한 자막이 나오는 카세트를 파는 등 초중딩들을 대상으로 한 방문 판매 아저씨가 많았다. 


근데 다행인지, 아닌지 그 당시 그 테이프 수준은 내 나이에 너무 어려운 수준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나오는데 중1이면 이제 영어로 더듬더듬 기초적인 문장을 말할 때다. 근데 그 때 그 내용이 상당히 어려웠다. 심지어 내용도 일반 대화가 아니라 민화, 동화, 전설 그런 에피소드를 영어로 설명하고 문제를 맞추는 거 였다. 그 말 속도도 너무 빨랐고 단어 수준도 꽤 어려웠다. 지금 생각해도 그 수준은 고등학생 이상 수준이었던 거 같다.  

 

속도가 상당히 빨랐고 나는 멍한채로 그 신기한 자막 나오는 카세트화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교재도 완벽한 복사본에.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20만원이 아닌데. 사기라고 뒤늦게 사기란 걸 인지했다. 망할. 


근데 아이러니하게도 오기가 생겼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이 20만원치가 아깝지 않게 저 영어 테이프를 다 들어버리자고. 

그래서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는 그 영어 테이프들을 들으며 허접한 복사본 교재를 매일 조금씩 풀었다. 너무나 고전적인 학습 수법인데 안들리는 부분을 한 30~40번 반복하면서 들릴 때 까지 돌린 거 같다. 

그러다가 뭔가 그런거 듣는게 재밌어졌다. 밤에 잘 때 틀어놓고 잤다. 이 습관이 영어 귀뚫는데 좋은지 안좋은지는 솔직히 효과가 좋은지 모르겠다. 하지만 난 일단 영어듣기 평가 전날에는 이 테이프들만 하루종일 듣고 갔고 그 이후엔 영어듣기평가들이 너무나 쉬워지는 마법(?)과 같은 경험을 하기 시작했다. 



이후 쓸데없이 영어에 대한 자신감이 붙어서 라디오를 듣자고 시작한게 그 코너가 정확히 생각이 나지 않는다. EBS의 "Power English"인지, "Morning Special"인지. 그냥 한국 사람이 100%영어로만 진행하는 라디오방송이었는데 당시 처음으로 들었던 이 방송이 영화 <리크루트> 의 일부 장면을 들려주고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거였다. 심지어 당시엔 그게 영화 <리크루트>인지도 몰랐다. 어른이 되고 난 후 영화를 보는데 우연히 "헐, 저 영화였어?"하고 깨달았다. 

그 때 그 영화 내용이 너무 어려웠다. 아직도 생각나는게 나는 그 때 encode (암호화/부호화하다), cryptography (암호작성술) 막 이런 단어를 외웠다. 영화에서 그런게 나왔는데 그 1분도 안되는 영화 장면 음성에서 내가 모르는 단어가 한 30개는 있었다. 그 때 충격을 먹고 영어 공부를 더 열심히 한 거 같다. 


한마디로 내 인생에서 영어에 가장 미쳤던 시기는 그 때 중1~중2였다. 

우연히 한 아저씨가 사기쳐서 나에게 판매한 카세트 테이프의 값어치를 억지로라도 만들겠다며 그걸 열심히 듣다보니 중독이 되고, 이후 더 어려운 라디오를 듣고 오기가 생겨 또 듣고 따라하다보니 고3때까지 나는 "영어를 잘하는 아이"로 유명해졌다. 


물론 대학생이 되어서 영어 공부를 조금 게을리 했지만 이후 여행다니면서 영어 말문을 텄고 교환학생 등을 하면서 업그레이드했던 거 같다. 조금 게으를 뿐, 여전히 외국어 공부하는 건 재밌다. 

지금은 영어-중국어를 마치고 또다른 외국어를 다시 발음부터 시작하고 있는데 역시 재밌다. 

외국어는 왕초급 단계일 때 가장 재밌다는 사실을 아는가. 

이후 초급에서 중급, 중급에서 고급으로 넘어가는 그 과도기가 가장 힘들 뿐. 

그래서 난 아직까지 재미를 느끼고 있는데 주변 사람들은

 "아니 외국어를 취미로 공부한다는 사람 처음 봤어요"라는 반응이다. 

취미라기 보단, 그냥 뭔가 내가 못알아듣는 것을 알아듣고 싶다는 그런 욕망의 실현이랄까. 


문득 지금 스페인어 공부하다가 생각났다. 

내가 영어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던 시절은 언제일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영어 공부에 가장 미쳐서 시작했던 적은, 

저 때 내가 방판에 홀려 캡션 오디오 카세트를 산 시점부터 였던 거 같다. 


20만원짜리의 나름 값진 소득인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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