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여름 바다
이탈리아의 여름은 지중해성 기후로 건조한 더위가 강렬한 햇빛과 함께한다. 알프스 산맥이 있는 북부지방이 아니면 비도 거의 내리지 않는다. 한국에 있을 때에 나는 습도가 높은 불쾌한 더위가 싫어서 여름도 싫어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이곳의 더위에 익숙해졌고 오히려 여름이 오기를 기다린다. 여름엔 그 어느 계절보다 바다가 주인공이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지리적 조건만큼이나 바다는 여름을 보내는데 많은 이탈리아인들의 구심점이며 공통분모와 같다.
남편도 예외는 아니다.
아니 그 어느 이탈리아인보다 바다를 좋아하고 그리워한다.
코로나로 인한 여행의 어려움으로 나는 이번 여름 한국행을 포기했고 우리 가족은 남편의 여름 고향과도 같은 아드리아 (이탈리아 동쪽 바다) 해변에 있는 쿠프라 마리티마 Cupra Marittima로 가기로 결정했다.
마르케 Marche 주에 있는 이 작은 바닷가 마을은 우리 가족이 이미 잘 알고 있는 곳이다. 남편은 3살 때부터 20살이 될 때까지 매해 온 가족이 여름을 지내다 오던 장소이다. 그러니 남편에겐 많은 추억이 묻어있는 곳이고 사촌들은 이곳에 여름 집이 있으니 그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도 된다. 특히 오래된 지인들 (여름에만 이곳에서 보는 사람들)을 만나 빛바랜 지난 기억을 더듬어 가며 해변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웃을 수 있는 편안한 시간도 되는 것이다.
적어도 내가 20여 년의 시간 동안 지켜본 이탈리아인들에게 여름 바캉스의 의미는 여기저기를 방문하는 것보다는 지친 몸과 마음을 쉬러 가는 휴가, 자유로운 시간을 자연 속에 즐기는 것이다. 이탈리아인들의 특이한 여름 바캉스의 한 형태는 - 요즘 젊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지만 - 같은 장소를 매해마다 간다는 것이다. 물론 여름을 지내기 위한 여름 집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한 달씩 대여하는 집을 얻어서 같은 장소에서 항상 여름 바다에서만 만나는 사람들을 만나며 즐기는 습관적인 바캉스를 지내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 나 같은 한국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좀 이해하기 힘들다.
우리 가족도 올여름에 많이 예외는 아니었다. 여행 계획을 세우면서 남편은 고향을 찾아가는 사람처럼 들떠 있었고 그곳 사정을 이미 잘 아는 터라 주변의 맛집을 찾아서 먹을 플랜을 짜는데 아이처럼 좋아했다. 그리고 한 곳에만 머무는 지루함을 무마하기 위해 내가 안 가본 주변의 볼거리들도 여기저기 여행 계획에 포함시켰다.
지도로 보면 서쪽 해안에 가까운 로마에서 쿠프라 마리티마는 아펜니노 산맥을 관통하여 동쪽 해안의 아드리아해에 자리 잡고 있다. 로마의 집에서 쿠프라 마리티마까지는 약 225km 정도이고 2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된다.
쿠프라 마리티마를 위키피디아에 찾아보니 5300명 남짓한 거주민이 있다. 아주 작은 마을이다. 이 마을은 두 곳으로 나뉘어 있는데 한 곳은 해변을 따라 있는 아랫마을(쿠프라 바싸 Cupra Bassa)과 해변 도로 위로 있는 높은 지역에 형성된 윗마을 (쿠프라 알타 Cupra Alta)로 구성되어 있다. 쿠프라 알타 - 언덕이 있어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해안의 풍경은 보기만 해도 가슴이 탁 트이는 시원함을 준다. 그래서 우리는 특별한 일이 없어도 꼭 이곳에 한 번 올라가 해변의 기찻길과 나란히 펼쳐진 바닷가의 풍경을 잠시라도 감상한다.
쿠프라의 가장 큰 특징은 산 베네데토 델 트론토 San Benedetto del Tronto 에서 시작하는 야자수 해안길이 그롯탐마레 Grottammare 를 거쳐 이곳 쿠프라 까지 이어지며 그 해안의 특징으로 이곳을 야자수 해안길 Riviera delle Palme 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야자수 해안길을 따라 기찻길이 나란히 있다. 바다와 함께 있는 기찻길이다. 바다에서 물놀이를 하다가도 종종 지나가는 긴 행렬의 기차가 우리의 눈길을 멈추게도 한다.
눈이 부신 햇살과 어우러진 야자수 길이 뜨거운 여름과 잘 어우러져있다. 비가 온다면 하고 상상 속에 그려보니 기찻길과 비 내리는 바다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차분한 서정시와 같이 펼쳐 보인다.
쿠프라의 바닷물은 바다 한가운데에 있는 방파제 때문인지 호수처럼 잠잠하고 모래가 너무 고와 카펫 위를 밟고 다니는 것처럼 부드럽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에게는 위험성도 없고 바다를 맘껏 즐길 수 있는 최고의 장소라고 생각한다.
올해는 예전보다 바닷물도 더 맑아진 것처럼 보였다. 물속에 물고기들이 떼 지어 다니는 광경도 간혹 보였다. 마을도 워낙 작다 보니 모든 환경이 거리가 가까운 반경에 있고 그래서 가족적인 분위기이고 시끄럽지 않아 좋다. 역시나 독일이나 네덜란드 쪽에서 어린아이들을 동반한 가족들이 눈에 띄었다.
쿠프라는 동쪽의 아드리아해에 위치에 있어서 나는 운 좋게 호텔에서 바다 위의 일출 장면을 볼 수 있었다. 호텔은 별 세 개의 정말 보잘것없는 시설이었지만 발코니를 통해 보는 뷰 하나 때문에 그나마 위로가 되었다. 이번 여행은 멋진 호텔을 택해서 뽐내며 지내기보다는 해변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고 또 매일 저녁 남편이 선정한 특별한 이 고장의 맛집을 찾아다니며 먹는 즐거움을 맘껏 누렸다.
여러 맛 집중 생선 음식을 좋아하는 나는 이번 여행에서도 역시 그롯탐마레 Grottammare 의 내가 좋아하는 스텔라 마리나 Stella Marina (불가사리)에서의 저녁 식사를 지나칠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왔던 때가 아마도 7년 전쯤이었던 것 같은데 이번에도 여전히 상쾌한 만족감을 주는 식당으로 재확인했다. 저녁 바닷바람의 향기로움과 함께 다양한 생선 안티파스토를 맛보며 메뉴가 바뀔 때마다 수시로 포크를 바꾸어 주는 깔끔한 섬세함이 나를 항상 더 매료시킨다.
식후에 제공된 특별한 풍미의 카페는 위스키, 그라파 등을 넣어 알코올 향을 풍기는 커피로 바다로 나가는 어부들이 마셨다고 설명해 주었다. 여름에 마시기에는 좀 강한 맛이지만 그래도 일반적인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것과는 좀 다른 형태의 카페라 신선했다.
음식은 어디에서 어떤 서비스를 제공받으며 누구와 어떤 대화를 하며 먹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해질 무렵의 파란 바다를 배경 삼아 시원한 바닷바람에 이미 취한 상태라 더 음식 맛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사실은 음식도 꽤 만족할 만하다. (이 식당과 나는 전혀 개인적 관계가 없음을 밝힌다)
이곳 쿠프라에선 키가 큰 야자수들이 즐비한 길을 따라 가벼운 옷차림의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여름의 상쾌함을 흠뻑 즐긴다. 바닷가의 마을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수영복위에 가볍고 시원한 복장으로 자전거 페달을 밟는 모습이 신선함 그 자체이고 자유로운 휴가를 즐기는 모습이 아름답다.
어릴 때의 여름을 이곳에서 보낸 남편은 여러 장소들에 그의 추억도 홀로그램처럼 함께 있나 보다. 야외 샤워장이 있던 곳에서 17살 때 첫 키스를 했고 이 건물은 예전에 클럽이 있었던 곳이고 본인은 거기서 DJ를 했고…… 간간히 스쳐 지나는 기억의 조각들을 내게도 꺼내며 그의 시선은 과거를 보고 있다.
남편은 로마 사람이지만 그에겐 쿠프라가 여름 고향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바다가 보이는 여름 집을 이곳 쿠프라에 가지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 하며 우리는 꿈꾸듯이 상상해 봤다.
아직 세상은 코로나의 기세가 어두운 그림자로 위협하지만 이탈리아는 작년에 비해서 아주 좋아진 상황이고 (한국과 비교하면 여전히 몇 배로 나쁜 상태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탈리아 국내의 여름휴가를 떠나며 즐기고 있다. 우리나라는 이탈리아보다 상대적으로 훨씬 좋은 상황인데도 코로나로 인해 ‘해수욕장 폐쇄’라는 지경까지 되었다니 안타까운 마음이다.
아파트의 덧창문이 내려진 집들, 한산한 거리, 길거리 주차공간이 듬성듬성 비어있는 모습이 요즘의 로마이다. 이탈리아 바캉스의 정점인 8월 15일 - 성모승천일로 향해 여름은 흘러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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