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무리. 마케터가 한국사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

투고를 시작하며

by 초월김

글의 마무리를 어떻게 지어야 할지가 이 글을 시작할 때보다 더 어려운 숙제였다.

어떤 일이든 시작은 때론 "그냥" 하면 된다.

하지만 잘 마무리하는 건 어렵다.


지금까지 한국사의 여러 에피소드를 통해 마케터로서 일했던 프로젝트들과 마케팅 업무에 필요한 기본 상식을 살펴봤다.

역사 속 선조들의 결정과 선택. 승리와 성공, 뼈아픈 실수와 패배. 한국사를 공부하다 보면 오늘날의 우리와 선조들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인터넷도, 휴대폰도, AI도 없던 시대에 어떻게 그런 통찰을 했는지. 그저 경외로울 뿐이다.


많은 사람이 오늘날 대한민국이야말로 반만년 한반도 역사에서 가장 찬란한 시기라고 말한다.

굶어 죽고, 얼어 죽고, 전염병과 전쟁에 시달리지 않는다는 생존의 측면에서 보면 맞는 말이다.

경제적으로 이토록 많은 사람이 안정적이었던 시절도 없었다.

불과 100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는 일제의 강점 아래 있었다.

그 앞의 조선왕조 500년을 '잃어버린 500년'이라고 폄하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지금의 풍요는 우리 세대가 잘나서 이룬 게 아니다.

우리 세대보다 훨씬 더 치열하게 살았던 선조들의 고민과 노력, 시행착오 덕분이다.


1392년 조선 건국부터 1910년 경술국치까지 518년 동안 경제 발전이 정체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지배층은 유학에 파묻혀 시간을 보냈고, 백성이 잘사는 것에 대한 고민은 부족했다.

세종대왕의 치세 이후 200년 가까이 외침 없이 지내면서 나라는 조금씩 곪아갔다.

하지만 비단 조선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같은 시기 유럽도 중세 암흑기를 지나며 비슷한 정체를 겪었다.

차이가 있다면 유럽은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산업혁명을 거치며 먼저 근대화에 성공했고, 조선은 그 변화의 시기를 놓쳤다는 점이다.


1592년 임진왜란과 1637년 병자호란을 겪고도 기득권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북벌을 외치며 상복을 몇 년 입어야 하는지로 당파 싸움이나 하던 시절이었다.

영조와 정조가 개혁을 시도했지만 미봉책에 그쳤다.

왕 중심의 일원화된 의사결정 체계에서 왕이 무능하면 시스템 전체가 무너질 수밖에 없다.

정조는 유능하고 똑똑한 왕이었지만 권력 기반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을 받았고, 문체반정 에피소드에서 보았듯 그 역시 시대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후 세도정치를 거치며 왕권은 무너지고 나라의 체력도 약해졌다. 더 나은 미래를 고민하는 정치가 아니라, 가진 것을 지키려는 정치만 있었다.

이후의 일은 너무나 잘 알려진 대로다.


역사에 '만약(if)'은 없다. 하지만 마케터는 '만약'을 고민해야 한다.

고종이 자력으로 임오군란을 해결하려 했다면?

동학농민군의 폐정개혁안을 받아들였다면?

독립협회의 입헌군주제를 수용했다면?

갑신정변의 개화파가 백성의 지지를 먼저 확보했다면?


이런 상상이 단순히 재미있어서가 아니다.

내가 준비하는 캠페인과 대고객 메시지를 기획하는 데 힌트를 준다.

여러 차례 강조했던 맥락(context)과 기본(basic)이 바로 그것이다.

고객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고객이 무엇을 원하는지. 고객에게 기본적으로 제공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이것들을 늘 염두에 둬야 한다.


역사적 사실이 현대 업무의 정확한 참고자료는 아니다. 하지만 거울처럼 비추어 보기엔 충분하다.

오늘날 우리는 하루면 제주에서 서울까지 물건을 보낼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

등짐을 지고 전국을 누볐던 보부상의 입장이 되어본다면, 내가 오늘 보내려는 물건의 가치가 조금 더 소중해지지 않을까?

고려 도공들이 상감청자 하나를 완성하기 위해 쏟아부은 집요한 노력을 떠올린다면, 내가 기획하는 캠페인의 디테일에 조금 더 공을 들이게 되지 않을까?


역사 드라마나 영화, 박물관 유물, 유적지 답사 등 역사와 가까워지는 방법은 많다.

어떤 방법이든 핵심은 하나다.

결국 이 모든 것의 시작은 호기심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그랬을까?", "왜 그랬을까?"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것.

"여수장우중문시"에서 언급한 살수대첩만 해도 그렇다.

정말 30만의 병력이 왔을까? 보급은 어떻게 했을까?

30만 명이 수공으로 하루에 몰살을 당하는 것이 가능한가?

이런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 보면, 어느덧 나는 청천강 살수대첩의 현장에 서 있게 된다.


역사는 지금 이 순간도 흐른다.

매일 지나는 광화문, 경복궁, 세종대로. 그 길이 역사를 잘 몰랐던 예전과는 다르게 보인다.

정도전이 설계한 한양의 구조가 보이고, 세종이 한글을 반포하며 꿈꾼 세상이 느껴진다.

역사를 알기 전과 후의 도시는 너무나 다르다.


마케터 여러분께 묻고 싶다.

매일 무엇을 보고 계신가요?

숫자와 그래프, 클릭률과 전환율만 보고 계시진 않나요?

그 숫자 뒤에 숨어 있는 사람을 보고 계신가요?

그 사람이 살아온 역사를, 그 역사가 만들어낸 맥락을 보고 계신가요?


세종이 한글을 창조하면서 ROI를 계산했을까?

아니다. 그저 백성들이 글을 모르는 불편함, 그 pain point를 해결하고자 했을 뿐이다.

고려 도공들이 상감청자를 만들면서 시장 분석을 했을까?

아니다. 송나라와 다른 게임을 해야 살아남는다는 본질을 몸으로 느꼈을 뿐이다.

을지문덕이 우중문에게 편지를 일필휘지로 휘갈겨 보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퇴각의 명분을 만들어주기 위해 몇날며칠을 고민했을 것이다.


본질을 보는 눈은 역사 공부를 통해 자연스럽게 길러진다.

나는 아직도 한국사 공부가 부족하다.

이 책을 쓰며 수없이 자료를 찾아보고 역사서를 뒤적였지만, 여전히 모르는 게 훨씬 많다.

하지만 그게 오히려 좋다.

배울 것이 많다는 건 성장할 여지가 많다는 뜻이니까.

한국사 공부가 당장 이번 분기 매출을 올려주진 않는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역사를 아는 마케터와 모르는 마케터의 격차는 시간이 갈수록 벌어진다.

선조들이 남긴 울림을 들을 수 있는 마케터가 결국 더 오래, 더 단단하게 간다.

역사는 과거의 기록이지만, 동시에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최고의 도구다.

그리고 마케터에게 이보다 더 좋은 교과서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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