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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우 에디터 Dec 05. 2022

인간의 성욕을 부정하는 예술은 지루하다

포르노 초상화의 대가, 존 커린

존 커린(1962~)과 그의 작품  2020,  © Gagosian Gallery

'포르노 초상화가'. 존 커린을 부르는 말입니다. 커린은 마치 포르노를 보는 것처럼 노골적이고, 자극적인 그림을 그려온 화가인데요. 파격적인 그림을 그린 작가는 많았지만, 존 커린은 그중에서도 독보적 포지션을 가진 작가입니다. 과거 르네상스 시기 명작의 요소들을 자신의 것으로 재창조한 덕분이죠. 


커린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예술가 중 한 명입니다. 존 커린의 소속 갤러리인 가고시안 Gagosian에서는 그의 순자산을 약 1조 8천억 원이라 이야기하기도 했죠. 그의 작품이 가진 독보적 매력이 전 세계 컬렉터들에게 사랑받은 덕분인데요. 존 커린의 작품 특징은 단순 포르노그래피적 묘사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포르노를 고급스럽고 매력적으로 풀어낸, 존 커린만의 특별한 '전략'이 있죠. 



01 '아름다움'을 그려내는 존 커린만의 전략

존 커린의 대표작 , 1999 © Gagosian

존 커린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재창조'입니다. 표면적으로는 야한 그림을 그리고 있지만, 그의 작품에는 오랜 역사가 남긴 미술사적 성과가 녹아있죠. 가장 대표적인 건 그의 1999년 작품, <분홍색 나무 Pink Tree>입니다. 이 작품에는 여성 두 명의 누드를 그려냈는데요. 작품이 주는 느낌이 매우 독특합니다.


두 여성은 미소짓고 있지만 무엇 때문에 이런 표정을 짓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춤을 추는 듯, 대화를 나누는 듯 묘한 포즈도 시선을 끌죠. 또 뒤편의 검은색 배경과 분홍색 나무 역시 인상적입니다. 어디인지 알 수 없는 묘한 배경이 작품의 신비감을 더해주죠. 무엇이든 있을 수 있고, 아무것도 없을 수 있는 중립적 공간 속, 작품만 봐서는 어떤 상황이 펼쳐지는지, 독자는 전혀 예측할 수 없습니다. 


루카스 크라나흐 , © Wikipedia Commons

존 커린의 작품과 매우 비슷한 르네상스 시기 그림입니다. 누드화라는 공통점 외에도, 검은 배경과 모래바닥, 춤을 추는 듯 묘한 자세의 여성. 붉은 금발의 머리와 완전 무결한 흰 피부 등 동일한 요소가 많죠. 이 작품은 루카스 크라나흐 Lucas Cranach의 작품 <비너스 Venus>로, 르네상스 시기 그려졌습니다. 


이 작품의 제목인 Venus는 '비너스'를 의미합니다. 오래도록 미의 기준으로 여겨진 존재죠. 금성을 의미하는 단어이기도 하고요. 크라나흐는 비너스가 우주의 질서를 지배하는 아름다움의 기준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강조하기 위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 모래바닥 정도로 배경을 단순하게 처리했죠. 이런 원초적인 배경 묘사가 오히려 비너스의 자연적인 아름다움을 강조할 거라 본 겁니다.


존 커린 , 1998  © Gagosian

동일한 기법을 사용했지만, 존 커린이 묘사하는 아름다움은 '자연스러움'과는 거리가 멉니다. 존 커린은 오늘날의 아름다움이 인위적이며, 위선적이라고 보았죠. 성형 기술과 사진 보정 등 기술이 발전하며, 전형적인 아름다움의 기준이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현대의 아름다움을 왜곡하고, 강조해 표현했습니다. 가슴은 크게, 허리는 잘록하게, 골반은 넓게. 그리고 뷰티 산업의 핵심이 되는 얼굴은 크게 그려 풍자적으로 묘사했죠. 


존 커린은 이처럼 기존 명작에서 아름다움을 그려낼 때 사용된 특징을 따와, 현대의 관점에서 말하는 아름다움을 풍자했습니다. 존 커린의 작품이 아카데미즘의 유산을 담아내며 고급스러운 느낌을 주지만, 동시에 왠지 모를 불쾌함을 자아내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이는 곧 커린만의 독특한 특징이 되었죠. 이를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Bidpiece 빋피



02 전략을 통하게 만드는 전략: 타이밍

존 커린, , 2015 © Gagosian

시기와 상관없이 예술가들은 늘 '창작'에 대해 고민해왔습니다. 전에 없던 새로운 것을 고민하고, 내 방식을 누군가 이전에 이미 하지 않았을까 걱정했죠. 즉, '복제에 대한 불안'은 예술가들의 오랜 고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고민을 덜기 위해 새로운 창작 전략이 나옵니다. 자신만의 관점이나 방식을 세워, 과거의 유산을 재해석하는 것이죠. 존 커린은 과거 유산이 녹아있는 작품의 주제를 현대의 관점으로 바라보며, 이를 풍자하는 전략을 선택했습니다. 


그의 그림 <Maenads>를 보면, 그림 속 사과나 여성이 깔고 앉은 방석, 뒤편의 융단 등 르네상스 시기 초상화에서 볼법한 요소가 많이 그려진 모습입니다. 여성들의 헤어스타일 역시 르네상스 초상화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스타일이죠. 반면 여성이 입은 시스루 소재의 상의는 매우 현대적입니다. 르네상스 거장의 이미지를 집어삼키고, 자신의 독특한 화풍을 결합해 내놓은 전에 없던 새로운 누드화. 또 작품 속 담긴 커린만의 풍자와 위트는 수많은 컬렉터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설치미술의 대표 작가 시오타 치하루 © Shiota Chiharu

커린의 작품 설계는 매우 매력적이었고, 동시에 타이밍도 아주 좋았습니다. 존 커린은 1990년 처음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는데요. 당시에는 '더 이상 신선한 회화는 없다'는 인식이 만연해있었습니다. 때문에 완전히 새로운 예술 장르인 '설치미술 installation art'이 각광받고 있었죠.


설치미술은 기존의 캔버스 회화 작품에서 벗어나, 조각 장르의 영역을 확장해 가장 20세기다운 작품이라 평을 받았습니다. 회화의 시기는 지고, 조각의 시기가 새롭게 도래했다고 여겨졌죠. 이런 상황 속, 커린은 과거 예술에서 모티브를 따와 자신만의 방식으로 선보이며 신선한 회화의 영역을 개척합니다. 


Francisco Goya, <The Naked Maja>, © Wikipedia
Tiziano, <Venere di Urbino> © Wikipedia Commons

사실 과거 명작에서 요소를 따와 그려낸 회화는 그닥 새로운 게 아니었습니다. 과거 명작을 재해석한 작품은 너무도 많았죠. 명작을 재해석한 작품이 또 다른 명작이 된 사례도 있었고요. 일례로 고야의 명작 <옷을 벗은 마하>는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따온 것입니다. 물론 고야는 여기에 자신만의 기법과 해석을 더해 독창적 화풍의 작품으로 탄생시켰지만, 이 방식 자체는 흔히 볼 수 있었습니다. 


존 커린의 전략이 통할 수 있었던 건, 설치미술이 각광받던 때의 시기적 타이밍 덕분도 있습니다. 회화의 시대가 저물어가던 시절, 새롭고 독창적인 회화 작품을 내놓으며 여전히 남아있는 가능성을 제시한 선구자가 된 것이죠. 이후 1999년 내놓은 커린의 <Nice'n Easy>는 한화 약 135억 원에 낙찰되며 높은 금액에 팔리기도 했습니다. 작가 데뷔 9년 만에 엄청난 성과를 낸 커린의 커리어는 계속해서 고공 행진하게 됩니다.



03 인간의 성욕을 부정하는 예술은 지루하다

젊은 시절 존 커린의 모습 © Alexis rodriguez duarte

커린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역시 '포르노 초상화'라는 점입니다. 커린은 "인간의 성욕을 부정하는 예술을 지루하다"라고 이야기한 바 있는데요. 그 시작은 1980년대 초, 커린이 대학생이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커린은 대학에서 접한 미술 수업이 지나치게 진지하고 강제적이라 느낀 후, 이에 반발하여 순수하고 유머러스하며 본능에 가까운 작품을 선보입니다. 


초기에는 핀업걸의 이미지를 차용해 가볍게 이를 그려냈는데요. 이후 작품에 대한 연구가 깊어지면서 수위는 높아지고, 표현 방법은 깊어지게 됩니다. 속옷 차림의 핀업걸은 하드 코어 포르노 속 배우로, 만화를 보는 듯한 화풍은 르네상스 대가의 기법으로 변했죠. 


존 커린의 작업 모습, 누워있는 모델은 그의 아내 레이첼 파인스타인  © Vanity Fair

커린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행위에는 강력한 성적 에너지가 스며들어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커린에게 붓은 남근이었고, 붓을 통해 환생한 여인은 자신의 성적 욕망의 대상이었죠. 커린은 이러한 성적 충동이 인간의 본질이라고 보았고, 예술은 본질에 대한 게 아니라면 아무런 가치가 없다 언급했습니다. 오늘날에는 이런 성욕이 부정되거나, 쉬쉬 되거나, 은밀하게만 묘사되지만 커린은 이런 부정이 모두 지루하다 보았죠. 이후 다양한 시도를 통해 자신만의 독보적 화풍을 구축했고요. '더 이상 새로운 회화는 없다'라고 세상이 말할 때, '여전히 새로운 회화가 나올 수 있음'을 보여주며 커린은 현대미술가로서 자신만의 입지를 확고히 합니다.  


이후 그의 그림은 점점 야하게 진화했습니다. 탐욕스럽게 명작의 요소들을 삼키고, 남성의 욕망을 적나라하게 투영하면서 말이죠. 그의 작품은 갤러리 판매(1차 시장)을 중심으로 탄탄히 세워졌고, 점차 경매(2차 시장)에서도 눈에 띄는 성과를 만들어내며 주목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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