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이 근질근질

by 마리뮤

나는 평소에 말수가 그리 많지 않아요. 그런데, 어떤 날은 그동안 아껴왔던 모든 말들을 한꺼번에 쏟아내고 싶어 미칠 것 같은 심정이 들어요. 딱, 지금처럼.


나는 요새 스레드를 해요. 브런치와는 다르게 더 많은 반응을 더 빠르게 받을 수 있다 보니 푹 빠져버렸어요. 반말모드도 생각보다 바로 적응이 되더라고요. 그런데 거기선 500자 밖에 쓸 수가 없거든요. 내 안에 쌓여있는 말이 적게 잡아도 50000자는 될 것 같은데,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겠어요?


그래요. 그래서 또 무려 4개월 만에 여길 찾은 거예요. 별로 읽어주는 사람도 없고, 나를 반기는 사람도 없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을 큰 검열 없이 와다다다 쏟아내도 내일 부끄러워하지 않을 이곳을 말이죠.


하! 오늘은 왜 이렇게 주절대고 싶을까요? 낮에 농구를 해서 그런가? 제가 올해 마흔하나거든요. 애도 둘이나 낳고, 둘째는 심지어 4개월 차인데 농구를 했다니 신기하죠. 동네 걷기 운동하려고 유모차 끌고 나왔는데 한동네에 사는 우리 친언니가 농구공을 들고 나왔어요.


"요, 우리 간만에 농구나 하자"


언니는 나를 "요"라고 불러요. Yo! 알죠? 영어로, 야! 언니랑 저는 고등학생 시절을 미국에서 보냈어요. 와, 미국이라니! 싶겠지만 그냥 개고생 하던 시절이었죠.


그때 우리 삶은 그냥 학교, 농구, 교회뿐이었어요. (아참, 저는 서른이 되어서 무신론자가 되었지만요) 같은 고등학교 어떤 애들은 파티를 하고, 애인을 사귀고, 술을 마시고, 마약을 하고 별천지처럼 살고 있는데 그 와중에 우리 자매랑 동네 한인 친구들은 정말 순수 그 자체였어요. 할 줄 아는 것은 그저 학교 끝나고 농구코트에 모여서 농구하며 시답잖은 농담으로 배꼽 잡고 웃는 것뿐.


우리가 함께하던 농구장에서의 시간이 영원할 것만 같은 시절이었어요. 마치 이 코트 안의 누구도 어른이 되지 않고 결혼도, 직업도 없이 이 모습 이대로 평생 농구만 하면서 얼굴을 보며 지낼 것 같았죠.


그 친구들을 마지막으로 본 게 벌써 20년 전이에요. 나는 아직도 그 농구코드에서 땀 흘리며 뛰어다니던 여고생인 것 같은데 정신을 차려보니 두 아이를 키우고 경력단절을 걱정하는 40대 아줌마가 되어 있네요. 그 친구들 중 누구는 군인이 되었고, 백수가 되었고, 침술가가 되었고, 몇몇은 소식도 모르는 사람이 되었어요.


참 시간이 무서워요. 변하지 않을 것 같은 모든 것을 앗아가 버렸네요.


그런데 오늘 두툼하고 동그란 농구공을 다시 손으로 잡고, 손가락 끝을 농구선에 맞추어 들어 올려 힘껏 골대를 향해 던지니까 말이에요. 우두둑, 우두둑하고 뭔가 깨지는 소리가 내 안에 깊숙한 곳에서부터 들려오더니... 그 아이가 깨어났어요.


너무 변해버려서 아예 사라진 줄 알았던 18살 그 순진한 여고생이 말이에요. 남자친구는 어떻게 해야 사귈 수 있을까? 하고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을까? 이렇게 두 가지 말고는 크게 인생에 시름이란 게 없던 시절의 그 소녀가 잠시 내 몸을 지배하며 기억을 되살려 슛을 마구 쏘더란 말이죠.


한참을 그렇게 농구코트를 돌며 슛을 쏘고 놀다가 유모차에서 곤히 자던 둘째의 울음소리와 함께 마법이 풀렸어요. 마치 신데렐라가 열두 시가 땡, 하자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듯 저도 정신을 차려보니 마흔한 살의 아줌마더라고요.


잠깐 뛰었다고 숨이 차고 힘든 걸 보니 나이를 먹긴 먹었나 보다, 하고 언니와 다시 산책로를 걸었어요. 언니와 헤어지고 집에 돌아와서도 기분이 멜랑꼴리 한 게 평소랑 좀 다르더라고요.


생각해 보니까, 농구코트에서 깨어난 그 여고생이 안 돌아갔더라고요. 오늘 내내 나랑 함께 했어요. 아마 그래서였던 거 같아요. 20년 치 묵혀 둔 이야기를 꺼내고 싶어서 그 여고생이 나를 여태 잠도 안 재우고 들들 볶는 게 아닌가.


마음이 이상하대요. 왠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이 글을 쓰면서 그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했는데, 또 모르겠네요. 뭐, 꼭 설명이 돼야만 감정인가요? 그냥 그런 건가보다, 하는 거죠. 뭔진 잘 몰라도 이렇게 쓰고 나면 또 후련하기도 하고요.


아무튼, 이제 그 여고생이 좀 진정된 거 같으니 저는 잠을 좀 자려고요. 내일도 육아를 하려면 조금이라도 더 자둬야하거든요. 오랜만에 왔지만 그래도 내 이야기 들어줘서 고마워요.


다음에 또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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