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키, 그 아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4개월 전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교환학생 신분으로 영국에 입국하고 오리엔테이션을 한창 들으러 다닐 때였으니, 얼마 지나지 않은 날이었다. 문학 수업 중에 못 보던 여학생 두 명이 들어왔고, 그중 한 명이 유키였다. 둘은 노심초사한 시간을 보냈는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교환학생을 관리해 주는 교직원인 루카스 씨와 문학 교수의 대화에 귀를 기울여보니 비자 신청에 차질이 생겨서 입국이 지연됐다고 했다. 둘은 교수와 잠시 인사를 나누는가 싶더니 크게 숨을 내뱉으며 내 옆자리에 앉았다.
“안녕. 나는 유키. 얘는 나츠. 일본에서 왔어.”
“김훈이야. 훈이라고 불러줘. 그런데, 한국어를 할 줄 알아?” 어색하게 손을 흔들자 유키 옆자리에 있던 나츠가 눈웃음과 함께 손을 흔들었다.
“응. 나 한일 혼혈이거든. 어머니 쪽이 한국인. 나츠는 내가 가르쳐줬어. 보기보다 꽤 잘해. 요즘 한국 아이돌 노래는 모르는 게 없을 정도니까.”
“그보다 내가 한국인이라는 건 어떻게 안 거야? 미리 알고 있는 눈치던데.”
“루카스 씨가 한국인 한 명이 있다고 말해주셨어. 딱 보니까 알겠던걸. 수업 끝나고 학교 안내 좀 부탁해도 될까? 보시다시피 정신없이 챙겨 와서.” 유키는 배낭 여러 개를 가리켰다.
“그러자.” 나는 엉겁결에 안내하는 일을 맡게 됐지만, 기분은 썩 나쁘지 않았다. 한국말을 할 수 있는 친구(?)가 생겼다는 사실이 무작정 타지에 홀로 떨어지길 자처한 내겐 무척 안심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교환학생 중에 아시아인이라고는 중국인 대여섯 명이 끝이었고, 더군다나 영국식 발음으로 무장한 영어보다 서투른 게 중국어였다. 나중에 알게 됐는데, 나츠는 대만에서 일 년 정도 유학한 적이 있어 중국어에 능하다고 했다. 참 다재다능한 아이들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나이가 어떻게 돼?” 내가 물었다.
“우리 동갑이야. 99년생. 이것도 루카스 씨가…” 유키가 말했다. 나츠는 자신이 먼저 대답하려 했는지 입을 반쯤 열었다가 다시 오므렸다. 나는 루카스 씨가 또 어떤 정보를 말해주었는지 물으려 했지만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유키의 말에 좀처럼 타이밍을 잡지 못했다. 교수의 제지가 가해지고 나서야 우리는 대화를 멈추고 정면을 바라봤다. 수강할 과목은 선택할 수 있었으나 재학 중인 학교 측에서 학점으로 인정하는 과목을 수강해야 했으므로, 권장 과목을 신청하게 되었다. 개중에는 ‘영국의 문학’, ‘동양사상’ 같은 것들이 있었다. 수업은 영어로 진행되었는데 외국어로 동양사상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자니 어딘가 묘한 기분이 들었다(언어에 쥐약인 내게는 꽤 부담이었지만).
결국 문학 수업을 마치고 약도까지 그려가면서 학교 곳곳의 시설을 안내해 주었다. 화장실 위치, 건물 사이를 이동할 수 있는 오버브리지, 루카스 씨의 방, 스무 명 남짓한 인원이 들어갈 수 있는 강의실, 저명한 도서가 한없이 꽂혀있는 학술관, 그 외 사소한 것들까지 말이다.
“어딘가 으쓱하게 되지 않아? 해외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영문 가득한 공간이라니. 낯설면서도 주인공이 된 기분이 들어.” 내가 말했다.
“훈이 너 보기보다 허영심이 있구나?” 유키가 피식 웃었다.
“내가?”
악의 없는 웃음에 왠지 모를 서운함을 느꼈다. 생각지도 못한 말, 정확히는 원하는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반박, 거슬리는 표정, 한숨, 어떤 것을 먼저 표출해야 내 서운함을 알릴 수 있을지 정리가 되지 않았다. 그전에, 정말 나는 그런 녀석인가? 곰곰이 기억을 되짚어갔다. 학창 시절은 사치품을 몸에 두르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학생인 내가 그럴 여유가 어디에 있겠느냐마는. 녹색 체크무늬 셔츠에 청바지, 이년 전에 블랙 프라이데이(Black Friday, 미국 추수감사절 다음 날. 연말 최대 쇼핑 시즌) 행사 중에 인터넷에서 구매한 흰색 운동화, 지금 입은 꼴만 보아도 명품은커녕 있어 보이는 척조차도 사치였다. 그럼에도, 대답할 수 없는 것은 마음 한구석에 붙여둔 ‘그것’이 동시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무엇이라 부르고 정의해야 할지, 도무지 결정할 수가 없어서 그것이라 표현했다. 항상 특별하지 않으려 애썼다. 밉보이지 않기 위해 갖가지 거짓말을 섞어왔다. 생각하기에 과하지 않을 만큼. 작은 빌라에 살면서 동네에서 제일 큰 아파트에 산다던가, 해외라고는 수학여행으로 중국 상하이에 며칠 다녀온 것이 다면서, 어릴 적에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라까지 가봤다는 둥. 내가 실제로 살아가는 생태계와 타인에게 보이는 생태계는 달라야 했다. 그래야만 기죽지 않고 떵떵거리며 살 수 있다고 믿었다. 하나의 거짓말은 그 하나를 들키지 않기 위해 또 다른 거짓말을 연쇄적으로 만들어야만 했고, 거짓말을 사실처럼 인식하지 않고서는 기억하지 못할 지경에 이른 적도 있었다. 다행인지 이런 추태가 들킨 적은 없었다. 왜 그랬냐고 물어도 자존심, 그것 밖에는 적절한 답변이 떠오르지 않는다. 인간관계의 전부를 친구가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나이었으니까. 그렇다고 해봤자 어리석은 방법이었던 건 부정하지 않는다. 나는 원래 그런 놈이니까. 유키가 내 이런 과거의 모습을 알아봤을 리 없었지만, 그 순간 유키의 눈빛과 말투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 굳이 변명할 필요는 없어.’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럴지도…”
“농담이야- 진지하기는.”
진지하게 생각하는 내 표정을 인지한 건 유키가 잠시 화장실로 떠난 이후였다. 나츠와 단둘만 남겨지고 서로 멋쩍은 표정을 짓고, 나츠는 한쪽 팔로 다른 쪽 팔꿈치를 감싼 불편한 자세로 서 있었다. 그리고 흰색 바탕에 벚꽃 무늬가 그려진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내가 아직 낯설기라도 한 듯 허리춤에 장식으로 달린 매듭을 손가락으로 이리저리 돌려가며 만지작거렸다.
“그…, 유키가 한 말은 신경 쓰지 마.”
“아, 응… 고마워. 아리가토우(ありがとう),라고 해야 하나.”
“하하하! 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
나츠는 입을 가리며 웃더니, 어색함이 사라진 듯 나를 빤히 쳐다봤다.
“일본에 여행 온 적 있어?”
“도쿄랑 후쿠오카 정도…”
“정말? 우리 후쿠오카에서 왔어. 워낙 가까우니까 당연한 경험이려나- 여행은 어땠어?”
“열일곱 살에 학교 친구 몇 꾸려서 갔었는데, 첫 해외여행이라 분명 재밌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게 재밌지는 않았던 것 같기도…”
“그게 무슨 말이야! 하하하! 엉뚱해-”
“그래도 음식은 맛있었어!” 나는 벌게진 얼굴로 다급하게 외쳤다.
“다음에 놀러 와. 같이 놀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한테 궁금한 거 없어?”
“글쎄… 취미가 있어? 책 읽는 거라던가, 사진 찍는 거라던가…”
나츠는 적잖이 놀란 듯 눈을 부릅뜨며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나는 덩달아 당황했고, 내 질문에 상대방이 꺼려할 만한 실수가 있었는지 곱씹었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나츠는 왜?
“부끄럽지만 나는 꽤 손재주가 있어서 뜨개질을 좋아해. 주변에 선물로 주기도 하고. 유키는… 사진을 찍어. 특히 카메라로 찍는 거. 본인 사진은 담지 않지만.”
나츠는 다시 한 손으로 다른 팔을 잡더니 힘이 빠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유키가 손의 물기를 털어내며 다가왔다.
“무슨 얘기 중이었어? 훈이 너 나츠한테 작업 거는 건 아니겠지? 만약 그런 거라면 내가 용납 못 해.”
“물론 아니야. 취미 이야기 중이었어. 후쿠오카 출신인 네가 카메라로 사진 찍기를 좋아한다는 말까지 들은 참이었고.”
“싱겁긴-” 유키가 피식 웃었다.
우리가 영국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은 한 학기뿐이었고, 이미 한 주가 지났으니, 이대로 어디라도 떠나지 않으면 외국어로 구성된 동양사상만 주입된 채로 돌아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셋의 공통점이라고 하면 한국어, 그리고 경영학으로 전공이 같았다. 덕분에 문과 대학으로 유명한 런던에서 만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했다. 캠퍼스 내에는 경영관, 경제관, 인문관 등의 현대양식 건물이 중앙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구조였다. 우리는 대부분의 수업을 경영관에서 들었다. 둘에게 경영관에서 경제관으로, 경제관에서 인문관으로 이동할 수 있는 통로를 알려주고, 기숙사에 최단 시간으로 갈 수 있는 지름길도 알려주었다. 유키는 곧잘 길을 외웠지만, 나츠는 지리에 약한 것 같았다. 캠퍼스 곳곳을 걷는 동안 발그레해진 태양이 붉은 기를 머금었다. 동시에 마지막 열기를 뿜어내며 지면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영국에서 첫 노을이네-” 유키가 건물 외벽에 드리워지는 노을을 보더니, 메고 있던 가방에서 두툼한 카메라를 꺼냈다.
찰칵.
“취미가 확실하네.” 내가 말했다.
“훈아. 나츠랑 저쪽 가로등 옆에 서봐.”
“아니, 난 별로…” 손사래를 쳤다.
“잔말 말고, 얼른.” 내키진 않았지만, 유키의 호통에 따라 가로등 옆으로 움직였다. 나츠는 피사체 역할이 익숙한 듯했다.
찰칵.
영국에서 남긴 나의 첫 사진이었다. 유키에게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했지만, 정작 본인은 괜찮다며 도망가듯 빠르게 걸어 나갔다.
“독특하긴.” 당차게 걸어가는 유키를 보며 피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