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대부분의 시간을 시내에서 보내기로 결정하고 나서는 쇼핑몰, 해변, 이곳저곳을 누볐다. 밤은 순식간에 찾아왔다. 시내 상가 거리에는 밤의 활기가 돌았고, 식욕을 자극하는 음식 냄새가 떠돌았다. 문이 개방된 이자카야에는 시끌벅적한 손님들로 붐볐고, 포장마차가 늘어진 거리에서는 일을 마친 직장인 무리가 맥주잔을 부딪치고 있었다. 크리스마스가 한참이나 지났음에도 길거리에는 트리가 남아있거나, 캐럴이 들려오는가 하면 신년 맞이 기도를 위해 오밤중에 신사로 들어가는 일가족이 보이기도 했다. 눈은 내리지 않았지만, 찬 공기가 옷소매 사이로 파고들 때마다 찌릿한 한기가 느껴졌다.
“너무 많이 산 거 아니야? 밀가루랑 간장만 해도 무거울 텐데. 달걀에, 토마토에…” 내가 마트에서 잔뜩 담은 봉투를 양손에 들고 말했다.
“이런 건 할인할 때 사놔야 한단 말이야. 그렇지, 나츠?” 유키가 동조를 바라듯 물었다.
“정말 걱정할 필요 없어. 유키는 먹성이 엄청나거든. 그래도… 잔뜩 산 건 사실이지만… 런던에서 그렇게 봐놓고 아직도 눈치 못 챘단 말이야?” 나츠가 샴푸와 린스가 담긴 봉투를 가슴팍에 안고 숨을 헐떡였다.
“훈이 앞에서는 내숭을 좀 떨어줬지!” 유키가 당차게 웃었다.
“그렇다고 대접한다는 한 끼를 직접 만들어줄 필요는 없었는데 말이야.” 내가 피식 웃었다.
“유키표 특제 ‘토마토명란덮밥’ 먹어볼 기회가 흔치 않다니까 그러네-”
우리는 평지를 걷다가, 오르막이라도 만나면 경악을 했다. 유키와 나츠가 사는 건물은 백화점 하나를 가로질러야 한다고 했다. 이동하는 동안 저번 주에는 해변 백사장에서 둘이 춤을 췄다는 둥, 유키와 나츠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는 멈출 새가 없었고, 어느새 백화점 앞까지 와있었다.
“여기를 가로지르면 된다는 거지? 슬슬 팔 저려-” 내가 턱을 앞으로 삐쭉 내밀며 백화점 건물과 건물 사이를 가리켰다. 분수와 정원까지 조성되어 행인이 많은 곳이었다.
“응- 조금만 가면…” 유키가 대답하다 갑작스레 걸음을 멈췄다. 나츠도 영문을 모르는 듯 유키를 쳐다봤다.
“그 녀석들이야…” 유키가 한 곳을 주시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뭐?” 나는 ‘그 녀석들’이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듣고 건너편에 있는 세 사람을 곁눈질했다. 그럼에도, 재차 물으려 했지만, 유키의 몸 여기저기가 들썩이며 떨고 있는 것을 보고는 곧장 자리를 떠야겠다는 생각만이 들었다.
“여기서 기다려…” 유키가 봉투 손잡이를 꽉 쥐고 말했다.
“무슨 소리야. 이렇게 떨면서. 돌아서 가면 되잖아.” 유키의 앞길을 막으며 말했지만, 무시하고 녀석들 앞으로 갔다.
녀석들은 유키를 보자마자 여전히 ‘잡초’라는 단어를 섞어가며 인격 깎는 말을 난무했다. 그러는 것도 모자라, 유키의 어깨와 이마를 밀치기까지 했다. 도를 넘은 행동을 목격하고 더는 참을 수 없어 나서려고 했지만, 뜨거운 손이 내 손목을 잡았다.
“가지 마.” 나츠가 울먹이며 말했다.
“다칠 거야.” 내가 말했다.
“이건 유키가 해결할 일이야. 네가 가면 더 초라해질 뿐이야…”
그리고 우리는 유키의 외침을 들었다. 너희랑 내가 뭐가 달랐냐고. 다를 바 없는 같은 교복 입은 학생 아니었냐고. 그러자, 녀석들의 비웃는 표정은 단숨에 냉기를 품은 메마른 표정으로 변했다. 세 명은 유키에게 가까이 붙더니 짓밟기라도 하듯 머리를 잡아당기고, 바닥에 넘어뜨렸다. 유키는 바로 일어나서는 울음을 섞은 서러운 괴성을 질러댔다. 반항이 거세지자 녀석들은 유키의 얼굴을 향해 팔을 힘껏 휘둘렀다. 그 소리가 쩍, 쩍, 울려대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럼에도, 유키는 조금도 주춤하지 않았다. 벌게진 얼굴로 봉투에 있는 밀가루를 잡아 뜯어 녀석들에게 흩뿌렸다. 거기에 달걀을 던지고, 토마토를 얼굴에 갖다 박았다. 온갖 식자재가 섞인 채 눈에 들어갔는지, 녀석들이 고통을 호소했다. 거기에 유키의 괴성이 연이어 들리기까지 하니, 비명을 지르며 정원 나무에 머리를 박거나, 분수에 빠지기까지 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경험한 것이다. 소란을 듣고 여기저기서 사람이 모여드는 것을 느꼈다. 나와 나츠는 유키를 데리고 자리를 피했다. 녀석들만 보이지 않는다면 어디든 괜찮을 것 같았다.
얼마나 걸었을까. 한적한 하천이 보였고, 그 둔치에서 걸음을 멈췄다. 주홍색부터 짙은 파란색, 그 일련의 변화가 하늘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태양의 빛보다 가로등과 건물의 빛이 존재감을 드러내는 시간, 유키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서러운 울음을 한참 쏟아냈다. 나츠는 곁으로 가서 샴푸와 린스를 내동댕이치고 두 팔로 꼭 끌어안았다.
“있잖아. 나 있잖아. 할 말 다 했어. 이번엔… 도망치지 않았어.” 유키는 밀가루를 뒤집어쓰고 있었지만, 어느 때보다 찬연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멋졌어.” 유키의 앞에 앉아 말했다.
내가 오늘 목격한 건, 유키의 자아가 겁, 두려움을 총칭하는 그 형태를 완전히 부서뜨리고, 나아가는 일에 발버둥 치는 모습이었다. 그 순간 저질러버린 행동이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게 될지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어쩌면 영원히 아물지 않을 상처를 안고 또 다른 ‘나’를 만든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 어떤 것도 보상받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움직여야만 했는가. 푸르렀던 날 자신의 모습은 바래지지 않았는가. 잡초는 줄기라든가, 그 뿌리가 잘려나가더라도 남은 부분에서 또다시 자라난다. 이는 잡초를 제거하는 것이 어렵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이다. 유키와 나츠의 기억이 학교라는 공간에 가두어진 시간 동안 두 사람은 처절함의 맛을 배웠다. 수년 동안 열리지 않았던, 열 수 없었던 문이 지금에서야 소리를 냈다. 그곳에 더는 소란 속에 묻힌 비명은 들리지 않았고, 두 사람의 추억만을 남기고 고요한 교실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