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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IG HIP Sep 27. 2015

『평양의 영어선생님』을 읽다

[여자, 선(線)을 넘다]

1. 『평양의 영어선생님』을 읽다 


『평양의 영어선생님』 (원제 Without you, there is no us)에 대한 막연한 반감이 있었다. 미국적 시각으로 북한의 실상을 폭로하고, 서구의 우월성과 북한 인권의 열악함을 대비시키는 수많은 ‘북한 인권’ 관련 서적 중 하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책이 나온 시기가 오묘했다. 작년 말 재미교포 신은미 씨가 ‘종북 논란’으로 대한민국 입국 금지를 당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때와 이 책의 출간 시기가 맞물렸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평양...』의 저자인 수키 김과 오마이뉴스에 방북기를 연재한 신 씨를 비교하며 수키 김의 용기와 북한을 대하는 올바른 잣대에 대해 소리 높여 칭송하던 때였다. 보수 언론들이 앞다퉈 수키 김을 인터뷰하며 그녀를 지나치게 띄워준 것도 내가 이 책에 오래도록 손대지 않은 이유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번 기회에 『평양...』을 읽기로 결심했다. 일단 한번 책을 펼친 이후로는, 다 읽고 덮을 때까지 도무지 멈출 수가 없었다. 북한과 북한 주민들에 대한 묘사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상세했고, 그 속에서 겪은 삶의 이야기 속에서 깊은 통찰력과 진한 인간애가 느껴졌다. 수키 김은 결코 적지 않은 나이인 13살에 미국에 건너간 한국계 이주민 출신으로,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프로 소설가이자, 각종 미디어에서 프리랜서 취재를 맡기도 하는 등 저널리스트 기질까지 갖춘 작가였다. 그래서인지 『평양...』은 마치 한편의 문학작품 같았다. 북한 체제나 구조에 대한 심층적 분석은 뒤로 미뤄두고, 자신이 겪은 일들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과 더불어 주변 인물들에 대한 심리적 묘사, 생생한 내러티브 형식의 전개가 인상 깊었다. 



이런 일을 감행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너무도 놀라웠다. 세계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국가인 북한, 그 중에서도 북한 고위층의 자재들만 다닐 수 있는 평양과학기술대학교에 영어교사로 부임함으로써, 말 그대로 ‘잠입 취재’를 감행할 수 있는 사람은 장담컨대 많지 않다. 이주민이라는 배경은 그녀에게 큰 이점으로 작용했다고 본다. 책 곳곳에 ‘이방인의 감각’이 묻어있었다. 한국에서 태어났고 미국에서 자랐지만 그 어느 사회에도 완벽히 속하지 못하는 그녀의 정체성은 역설적으로, 북한이라는 기이한 나라에서 이방인으로서 몇 달의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한 동력이었다. 그 바닥을 헤아릴 수 없는 외로움의 깊이, 끝없이 감시받는 속에서 살아가는 두려움, 이것들과 싸울 수 있는 용기는 웬만한 사람에게서는 잘 발견되지 않는다. 


2. 북한 인권을 말하지 않는 북한 인권 서적 

이 책에는 ‘북한 인권’이라는 당연한 말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접해본 모든 북한 관련 서적 중 인권에 대한 가장 풍부한 논의와 생각을 담고 있다.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는 그들의 ‘수령님’과 그 주변의 소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나라의 모든 시스템을 비정상적으로 운영하는 사회, 그 체계가 가장 높은 곳에서 낮은 곳에 이르기까지 놀랍도록 잘 짜여있는 사회에 대해서 막힘없이 이야기한다. 특히 평양과기대라는, 소수 특권계층의 자제들만 다닐 수 있는 학교의 학생들조차 불시에 건설 현장에 동원되기도 하고, 주장과 그에 맞는 근거를 펼치는 방법에 대해 전혀 체득하고 있지 못하며, 자신들의 전공이 컴퓨터임에도 불구하고 인터넷의 존재조차 모르는 광경은 답답하기까지 하다. 무엇보다 가슴 아픈 것은, 인간의 본성을 완전히 억압하는 완벽한 상호 감시 시스템에 순응하고 적응해버려서 비판의식의 희미한 실마리조차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 책의 저자인 수키 김이 두 학기에 걸쳐 학생들과 함께하면서 마음속으로 깊은 애정을 쌓는 동시에, 서로 간의 보이지 않는 장벽에 끊임없이 부딪히면서 좌절하고 괴로워하는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닐 것이다. 

개인적으로, 평소 인권에 대해 소리 높여 말하는 사람을 잘 믿지 않는다. 인권이 개인 또는 소속 집단의 안위와 권력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할 때, 인권이라는 단어에 담긴 모든 가치는 소멸한다. 대표적으로 북한 인권 논의가 그렇다. ‘북한 인권’이라는 말은 이제 정치인 혹은 정치를 꿈꾸는 자들의 전유물이 되었다. “북한의 인권에 관심을 갖자”는 호소는 화살처럼 돌아와 “북한 인권이라는 중요하고도 숭고한 가치를 말하는 나에게 주목해줘”라는 말로 환언될 수 있다. 실제 북한 인권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는 많은 사람들은 담론의 생산·유포자로서 자신의 가치가 높게 평가받는 양상에 보다 더 즐거워하고, 자신이 미디어에 어떻게 비치는지에 큰 신경을 기울이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들은 현실적으로 북한 인권이 ‘어떻게’ 개선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다. 대신 북한 체제 전복과 같은 과격한 방법을 논함으로써 자신들의 계급을 공고화하거나 더욱 높이는 데에 기여할 수 있는 방안을 찾을 뿐이다. 

정쟁과 권력 다툼으로 얼룩진 국내 북한인권 논의와 대조적으로, 수키 김의 『평양...』은 북한 인권이라는 말의 엄중함과 체제를 뒤엎자는 심각한 정치적 논의 없이도 매우 호소력 높은 주장을 펼친다. 무엇보다 북한에서 펼쳐지는 자신의 삶에 대한 묘사, 하루하루 스스로에게 일어나는 변화와 그에 대한 감정이 자신을 둘러싼 주변 상황에 대한 관찰과 팽팽한 균형을 이룬다. 뉴욕 브루클린에 두고 온 자신의 연인에 대한 그리움, 타지에서 느끼는 사무치는 외로움과 같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모든 감정의 결들이, 시시각각 검열당하는 적막하고 숨 막히는 환경과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인간으로서 느끼는 자연스러운 의심, 사랑, 그리움 등의 사소한 감정마저 통제당하는 이곳에서 이뤄진 그녀의 글쓰기는 그래서 더욱 처연하고 간절하다. 그런 그녀에게도 어느새 큰 그늘을 드리우며 자신을 둘러싼 통제와 검열에 급속도로 익숙해지게끔 만드는 무서운 그곳의 시스템을 은연중에 강조하고 있다. 


3. 맹목적 믿음에 대한 비판 

그녀의 북한 비판이 돋보였던 주요 이유 중 하나는, 단순히 북한의 주체사상 맹신에 대한 비판에만 그치지 않은 점이다. 책에서는 그 대상이 무엇이든, 비판의식 없이 맹목적으로 떠받들고 맹신하는 것에 대한 경계와 반감이 균형 있게 드러난다. 실제 동료 교사로 그곳에 와있는 북한 선교사들의 위선과 독선은 북한 체제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기말고사 시험 후 자신의 학생들에게 『해리포터』를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던 수키 김은 선교사들의 강한 반발에 부닥치게 되는데, 그 이유는 해리포터가 기독교의 선한 가치관과 배치되는 ‘이단 영상물’이라는 것이었다. 때때로 무언가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은 다른 사람의 믿음을 건강하지 못하게 깎아내리고, 자신의 믿음 체계를 남에게 전파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상적인 폭력을 정당화한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북한의 해방과 평화통일을 외치는 것은 긍정적이라 볼 수 있지만, 잠정적으로 ‘북한 선교’를 상정해두고 자신들의 믿음 설파를 위한 수단으로서 북한이라는 불모지를 겨냥하는 모습은 때때로 땅따먹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또, 실제로 남한에 건너온 상당수의 탈북자들이 기독교에 심취하기도 하는데, 이는 탈북 과정에서 선교사들의 개입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들은 '하느님의 뜻'을 빌어 북한을 모욕하고 인권을 외쳐댄다. 그러나 그들의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남과 타협하지 않는 독단으로,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검열하는 위선으로 이어진다면 그것이 북한에서 외치는 주체사상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어찌 보면 하나의 믿음에 빠져 오로지 단독적인 잣대로만 자신과 남을 평가하는 사람들은 똑같이 정신과 마음의 노예들이라는 것을 이 책의 필자는 말하고 있다. 그녀가 북한과 선교사, ‘이중의 검열’을 거쳐야 했으며 그 중에서도 때때로 선교사들의 주장을 굽히는 것이 더욱 어려운 과제였다는 것은 이 사실을 강하게 보여주고 있다. 

극단주의자들은 서로를 꼭 빼닮았다. 북한의 주체사상과 선교사들의 배타적 사상은 결국에는 통하는 점이 있었다. 수키 김이 『평양...』에서 결국에 말하고 싶었던 것은, 북한이 놀랍도록 통제된 사회이고 외부에서 보는 것보다 알려진 것이 훨씬 더 적은, 비밀과 은둔의 나라라는 것뿐만이 아니다. 그 사회와 사람들을 조정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보신을 위해 얼마나 많은 사상과 규칙, 교리를 만들어내고 전파하는지, 그것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자유와 존엄성을 어떤 식으로 해치는지를 필자는 낱낱이 드러내고 있다. 동시에 그 사회를 구원하고자 들어온 선교사들조차 자신들의 믿음을 무기로 해서 북한 주민들의 말 못할 현재적 환경에 눈감고 그저 “북한이 열리고, 하느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그 날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의 참혹함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모든 사람들의 건강하지 못한 믿음과 상처, 참을 수 없는 비극과 아픔에 대해서 알아달라고 호소한다. 

『평양...』은 지금까지의 나의 북한에 대한 인식과 북한 인권에 대한 안일한 사고에 강펀치를 날렸으며, 북한 주민들과 그들의 삶에 대한 다소 달콤한 환상으로 점철되어있던 나의 과거에 큰 반향을 일으키는 책이었다. 북한을 전공으로 공부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매우 한정적이며, ‘잘 모른다’는 이유로 나의 복지부동과 변화에 대한 사고 자체를 정지했던 것을 정당화했던 지난 세월이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불가능’을 ‘무지와 한계’라는 원인에 귀결시켰던 나와는 대조적으로, 모든 가능성을 시험하면서까지 북한에 들어가 세상으로부터 차단된 목소리를 우리에게 들려준 그녀는 매우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 책을 덮고 나서도 한동안 충격에서 빠져나오기 힘들었고, 그간 쌓아온 내 지식과 믿음에 대한 깊은 회의감도 안겨주었지만, 분명 그만큼 가치 있는 책이라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 사진 출처: 수키김닷컴(http://sukikim.com/)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device=pc&bid=8645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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