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써보고 싶어서 신촌에 있는 문화센터에 세 달간 다닌 적이 있습니다. 에세이를 주로 쓰지만 언젠가는 에세이 외의 다른 장르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특히 에세이 작가 중에서 픽션의 세계를 기웃거리는 이들이 꽤 많습니다. 아시다시피 에세이라는 장르는 기본적으로 작가의 경험을 토대로 쓰이잖아요. 그로 인해 쉽고 친근하게 읽히는 장점이 있지요. 그런데 쓰는 입장에서는 책을 두세 권쯤 내고 나면 삶의 재료가 많이 소진된 기분을 느끼게 됩니다. 그렇다고 항상 새로운 경험을 하며 살 수는 없으니까 상상을 해서 쓰고 싶어지는 순간이 오는 듯해요.
소설 수업은 열 명 남짓한 수강생들이 모여 자기가 써온 걸 수업 전에 미리 공유하고, 그걸 읽어온 학우들이 돌아가면서 자기 의견을 내는 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습작이니까 단점은 많고 장점은 적지만 애써 둘의 비율의 맞춰서 말해주는 게 기본 매너죠. 단점만 이야기하는 사람은 원한을 사게 될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합니다. 이 과정을 합평이라 부르죠. 아마추어가 아마추어의 결과물을 보며 과연 도움 되는 말을 해줄 수 있을까 싶은 분도 있겠지만 합평에서 나오는 대부분의 이야기는 마지막에 마무리를 해주는 강사의 지적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원래 심미안은 빠르게 발달하는 거니까요. 실력이 느는 걸 기다리는 데 비하면 안목의 축적은 백배 이상 쉬운 일입니다.
단편소설 한 편을 완성하면서 신기하게 느껴진 게 하나 있었습니다. 에세이를 쓰다 보면 각색을 하거나 약간의 거짓말을 해야 하는 경우가 생겨요. 작가와 화자가 같은 데다, 독자들은 에세이에서 있었던 일이 백 퍼센트 실제라고 믿으니까요. 기억이라는 건 완전하지 않음에도 말이죠. 때문에 나와 관계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쓸 때 상처받는 사람이 생기기 쉽습니다. 이제는 에피소드의 당사자가 보더라도 자기 이야기인지 아닌지 긴가민가할 정도로 수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20대까지는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내 이야기를 솔직하게 하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시기에는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많은 것이 달라졌습니다. ‘자취방 감성’이라 불리던 노래 ‘싸구려 커피’가 20대의 장기하에게 어울렸지만, 40대의 장기하 입에서 나오는 건 어색하잖아요. 특히 글 쓰는 사람은 자기 객관화를 놓치는 순간 독자와의 공감대를 잃어버리게 되니까 이동하는 위치마다 영점을 재조정해야 합니다.
글이 잘 써질 때를 경계해야
반면 소설은 작가와 화자가 다르고, 작가가 “이건 허구예요. 사실이 아닌 거 다 아시죠?” 하면서 뒤에 숨은 채 시작하기에 오히려 에세이에서 피해가던 이야기를 쓰게 되더군요. 날것의 미움과 정리되지 못한 불안을 끄집어내볼 수 있었습니다. 모니터 앞에서 심리 치료를 받는 기분이었어요. 에세이가 화장기 없는 얼굴로 불특정 다수 앞에 나서는 기분이라면, 소설은 복면을 쓰는 것 같더군요. 에세이는 친근한 대신 도저한 깊이를 획득하기 힘들고, 소설은 진입 장벽이 상대적으로 높은 대신 상징과 비유를 통해 깊은 내면을 드러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어쨌거나, 저는 앞자리에 앉아 선생님의 말씀을 착실하게 필기하는 학생이었는데요. 한 마디라도 놓칠까 봐 조바심 내며 메모를 하던 날이 있었습니다. 초보 엄마라고 자기를 소개했던 수강생의 소설을 돌려보고 난 다음이었죠. 소설은 무기력과 우울증에 시달렸던 한 여성이 아이를 낳고서 생의 신비를 느끼는 찰나에 대해 이야기했어요. 단편소설은 일반적으로 A4 용지 기준으로 열 장 정도를 쓰게 되는데, 그 소설은 출산 장면에만 두 장 정도를 할애했더군요. 진통을 느낀 부분부터 아기의 탄생 과정까지의 묘사가 지나치게 구체적이고 길어서 제가 평할 순서가 돌아왔을 때 해당 분량이 다소 지루하게 느껴졌다고 지적했습니다. 모두의 이야기를 경청한 뒤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까 출산 장면이 너무 길다는 지적이 나왔는데요. 소설을 쓰다 보면 유독 어떤 장면이 술술 써질 때가 있어요. 그럴 때는 막 신이 나지요. 그런데요. 그때가 마냥 좋기만 한 게 아니에요. 오히려 그때는 잠깐 멈춰야 해요. 잘 써질 때를 의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게 본인이 잘 아는 이야기라서 자신 있으니 길게 쓰는 것일 수 있거든요. 작가가 잘 아는 내용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에피소드라고 판단한 부분만이 길어져야 하는 거예요. 내가 잘 알아서 길게 쓰는 것인지, 이 맥락이 전체에서 중요도가 높기 때문에 길게 쓰는 것인지 분간하도록 하세요.
소설뿐 아니라 에세이를 쓸 때도 이런 실수는 종종 발생합니다. 저도 그래요. 당시에는 마치 기다리던 영감님을 맞이한 듯 기분 좋게 줄줄 썼는데, 다음 날 퇴고할 때 보면 그렇게 쓴 부분이 혼자만 튀어 보여 잘라내야 할 때가 있거든요. 최악의 경우 손을 덜덜 떨면서 통으로 덜어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글에서만이 아닙니다. ‘잘 써질 때를 의심하라. 길게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면 내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인지, 전체 맥락에서 꼭 필요하기 때문인지 구분하고 행하라.’ 저는 이 조언이 말하기에도 특히 유용한 지침이라고 느낍니다. 유독 지루하게 들리는 말들을 잘 살펴보면 대개 이런 식의 실수 때문이거든요. 화자는 자기가 잘 알고 있는 내용이므로 술술 말하는데 정작 듣는 사람의 귓속엔 내려앉지 않고 둥둥 떠다니는 상황 말입니다.
듣는 사람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가 잘 아는 이야기를 맥락이나 중요도에 상관없이 쏟아내는 이들 중엔 사회 교류가 적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제 경우엔 아이를 출산하고 6개월간 몸조리를 위해 집에 틀어박혀 있었는데 말다운 말을 하기 어려우니 퇴근한 남편에게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주절주절 남발하게 되더군요. 교통사고로 3개월간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는데 그때 만난 할머니들이 떠올랐어요. 골반과 다리를 다친 상태라 꼼짝없이 누워만 있던 제게 할머니들은 끝없이 말을 걸었죠. 자식 자랑이나 걱정에서 시작해 아픈 몸에 대한 한탄, 삶에 대한 회고들이 이어졌습니다. 할머니들은 모놀로그 주인공처럼 대사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어요. ‘할머니는 내 대답이 꼭 필요한 건 아니구나. 말동무가 없어서, 서글퍼서, 반가운 사람을 보면 머릿속에 머물렀던 생각들을 무작정 쏟아내는 거구나.’ 하면서요.
어떤 대상을 사랑할 때 더욱 조심히 말해야
외로운 사람뿐 아닙니다. 일에 심취해 있는 사람들도 그런 식으로 표현하는 경우를 봅니다. 어떤 개발자를 사석에서 만난 적이 있는데, 그가 소위 ‘판교 사투리’라고 불리는 용어와 전문 지식을 섞어 이야기하더군요. “요즘은 개인의 디깅으로 문제를 해결해선 안 되고 린하게 작업을 해야죠.” 같은 회의실 언어를 끊을 새도 없이 줄줄 말하는 거예요. 이는 전문가에게 자주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예컨대 교수님은 전공 지식을 모르는 상태가 어떤 것인지 잘 모릅니다. 자기에게 너무 오래전 일이니까요. 앞에 앉은 학생들이 대략 모를 거라고는 생각하지만 어느 정도로 모르는지는 정말 모릅니다. 그렇기에 설명이 지루해질 때가 많은 것입니다. 이는 무언가를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에게서도 흔히 보입니다. 무언가의 오래된 덕후들은 자기가 사랑하는 대상이 다른 사람에게도 마땅히 그렇게 보일 거라 생각하고 그들 내 세계에서만 통하는 표현을 ‘머글’에게 남발하는 경우가 많죠. 뿐만 아니라 사회의 리더 중에서도 그런 사람이 있어요. 다른 사람의 감정이 어떨지, 다른 사람의 입장이 어떨지, 다른 사람의 지식 수준이나 상황이 어떨지 상상하지 않고 오직 자기에게 중요한 이야기만 달달달 말하는 사람들이요.
외로울 때나 자신만만할 때 타인과 소통이 어려워지는 이유는 상대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자기 입장을 밝히는 데만 급급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은 별로 관심이 없는 주제에 대해서 혼자만 흥분해서 길게 말을 하거나, 독자가 공감할 시간을 주지 않고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일기 같은 글을 쓰는 경우가 대표적이죠. 하지만 사람들의 정보 수준이나 관심 수준은 파편화되어 있기에 익숙한 기준으로 상대를 넘겨짚으면 대개 실패하고 맙니다. 내게 중요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는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우리는 너무 자주 잊어버리는데요. 이런 실수를 줄이려면 상대가 처한 현재 상황을 구체적으로 상상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특히 말을 할 때는 마주한 이의 표정을 유심히 보고 반응을 살피며 정보의 양을 조절해야 하지요.
한편 저는 말이든 글에서든 감정 묘사보다 객관적인 상황 표현을 주로 하려 애씁니다. 예시를 많이 들려고도 하고요. 응급실에 가면 간호사는 당신에게 “많이 아프세요?”라고 묻는 대신, 1부터 10까지 표시된 통증표를 보여주며 아픈 정도를 숫자로 알려달라고 할 겁니다. 감정은 직접적으로 전달될 수 없으니까요. 감정 표현만으로는 서로를 오해하기 너무 쉬우니까요. 말과 글의 주요 목표인 공감, 설득, 정보 공유를 효율적으로 하려면 주요 맥락을 확인하고 최대한 객관적으로 접근하는 연습을 해나가야 합니다. 장 그르니에의 책 <섬>에는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저는 혼자 흥분해서 말이 길어지려고 할 때 재빨리 이 문장을 떠올리곤 합니다.
우리가 어떤 존재들을 사랑하게 될 때면 그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지게 마련이어서, 그런 것은 사실 우리들 자신에게밖에는 별 흥밋거리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적절한 순간에 늘 상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직 보편적인 생각들만이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가진다. 왜냐하면 그런 생각들이라야 이른바 그들의 ’지성’에 호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글. 정문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