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까르띠에 브레송
침대와 책상 사이. 토요일, 고요히 쉬는 날, 우연히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에 눈이 머문다. 오래전 한 친구가 예술의 전당 <브레송展>에서 가져온 팜플렛을 얼핏 본 기억이 지금까지 따라왔다. 자꾸 중얼거리게 된다. 결정적 순간, 결정적 순간...그의 사진집 제목이기도 한 The Decisive Moment라는 표현은, 이후 인류의 무의식에 영감의 원천으로 자리잡는다.
"사진은 어떤 사실의 의미와, 그 사실을 시각적으로 설명하고 가리키는 형태의 엄격한 구성이 한 순간에 동시에 인지되는 것이다." 브레송의 이 명언은 여전한 울림을 준다.결정적인 순간은 어떤 중요한 시간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우연하게 보이는 형태적 구성 속에서 대상 자체의 본질이 섬광처럼 드러나는 바로 그 순간을 말한다. 브레송은 이 순간을 위해서 이렇게 말한다. 복잡한 장비나 반사판 등 사진 기자재들은 저 진실한 순간의 포착에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다. 카메라 앵글의 변화를 통한 강조도 마찬가지며 현상 과정에서의 조작과 사진 트리밍 또한 마찬가지다. 대상이 인물이라면 그 또한 사진을 찍는 사람 때문에 영향을 받아선 안된다. 연출 사진을 거부하는, 그의 결벽같은 엄격성은, 오직 결정적 순간을 읽어내는 섬광같은 직관과 독법(讀法) 만이 '본질'을 붙잡아낼 수 있다는 믿음으로 나아갔다.
사진가가 사물과 사진 사이에 끼어들려고 하면, 이미 대상은 사물이 아니다. 자신을 완전히 지워버리고 다만 사물들 그 존재 만을 사진 안에 남겨놓아야 한다. 그때 우연과 구성의 완전한 조화가 가능하다. 그는 자기의 눈에 보이는 대상을 중시했다. 그 시야야 말로 우리가 일상 속에서 본질을 만나는 가장 완전한 방식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이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이미지를 조작하는 수단을 가능한 한 절제해야 한다. 카메라는 무엇을 붙잡아야 하는가. 광선과 대상의 구도와 보는 사람(찍는 사람)의 감정이 일치된 순간이다. 그게 결정적 순간이다. 그는 말한다. "스쳐 지나가는 실재의 외관에 모든 능력이 집중된다. 그 순간에 숨을 죽인다." 빛과 피사체와 사진가가 하나의 숨처럼 맞아들어간 그 찰나. 그때 붙들린 이미지는 영혼을 때리는 벼락같은 깨달음이다. 그를 선승(zen master)라고 부르는 까닭은 여기에 있으리라.
브레송, 1908년 출생, 작년(2004년) 8월 2일 사망. 그는 불교에 심취했다. 이미지란 무엇인가. 그는 색즉시공(色卽是空)에 대해 알고 있었을 것이다. 선(禪)에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아, 노장의 위(爲)와 무위(無爲)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으리라. 이미지에 대한 불교적 관점은 비교적 차갑다. 모든 이미지는 본질적으로 텅빈 것들이라는 시각이다. 보여지는 것은 진정한 형상이 아니라, 다만 보여지는 것일 뿐이며 그 이면에는 아무 것도 없다. 이면은 본질이며 인식이 붙들 수 있는 의미있는 무엇이다. 이미지에는 그게 없다.
한편 색즉시공은 시간이 개입되었을 때 저항할 수 없는 변화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기도 하다. 무상(無常)은 그런 뜻이다. 우주적 관점(시간과 공간을 초월한)에서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란 없다. 그런데 브레송은 그 허상의 이미지들 속에서 진실의 한 겹을 찾아내려 했다. 과연 가능한 일이었을까.
브레송은 불교가 말하는 이미지의 무상성(無常性)을 인정하면서 그 무상한 가운데 본질을 드러내는 어떤 순간이 있을 거라고 믿었다. 색즉시공을 달리 해석하면 대상의 이미지들은 텅 빈 것이기는 하나, 그 텅 빈 것이 대상의 본질일 때, 이미지들은 나름대로 본질을 담고 있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색즉시공을 깨닫는 그 '인식'은 바로 본질과의 만남이다.
브레송은 모든 대상이 모두 그 본질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특별한 순간에 그것이 담기는데 그것을 기민하고 직관적인 정신과 안목이 붙잡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붙잡는가. 여기선 노자의 무위(無爲)가 방법론으로 제기된다. 인위로 가공하지 말고, 그 대상을 그대로 이미지로 흡수하라. 인간의 말을 끼워넣지 말고, 대상이 스스로 모든 것을 말하게 하라.
그의 결정적 순간을, 선불교의 활연대오와 비견하기는 어렵다. 브레송의 행위는 시적 발견에 가깝다. 이윤기 선생이 유리테이블에 떨어진 송홧가루들이 비친 그림자에서 결정적 순간을 발견한 것처럼, 빛과 대상과 직관의 카메라가 동시에 작동한 합일점을 그 드라마틱한 표현으로 드러낸 것일 뿐이다. 반면 불교의 깨달음은 하나의 인식이 선형적으로 다른 인식으로 나아가지 않고, 비약하고 궤멸되면서 다른 차원의 인식으로 넘어가 버리는 구도(求道)의 순간이다.
브레송의 위대함은, 피사체와 사진 사이에 최소한의 '인위' 이외에는 모두 물리침으로써, 대상과 인간의 육안(肉眼)이 '본질'을 동시호흡할 수 있다는 신념을 확산시킨데 있다. 말하자면 그는 카메라로 시를 썼다. 대상을 해석하고 꾸미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발견하는 '벼락같은 순간'을 기록하고자 했다. 그 발견을 진실하게 담아내기 위한 집요한 노력이 그의 생이었다. 흥미롭다. 그의 사진을 들여다보는 일은, 브레송의 발견을 우회없이 만나는 즐거움이다.
카메라란 무엇인가. 혹은 사진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시선을 시간적으로 늘여놓을 수 있는 기계이며, 늘여놓은 대상이다. 카메라는 인간의 눈이 아니다. 인간의 눈은 다양한 감각과 인식 작용, 기억 작용, 상상 작용을 동시에 가동시키는 '멀티'형의 뷰어다. 이에 비해 카메라의 눈은 평면적이며 딱 일회적이다. 인간의 눈 앞에서 많은 사물들은 설사 산처럼 꿈쩍 않고 있다 하더라도, 미세한 전율을 가진 이미지들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사진 속에 박히기만 하면 모든 동적인 피사체조차도 평면에 붙박히고 만다. 그러므로 사진은 기본적으로 가짜 이미지, 혹은 유사 이미지다.
그런 많은 제약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사진이 인간을 열광시키는 까닭은, 시간을 효과적으로 견딜 수 있기 때문이다. 눈 앞의 모든 이미지들은 지나간다. 그야 말로 덧없이 흘러가 버린다. 인간의 기억이 그걸 붙잡는다 하더라도, 그때 눈 앞의 모든 대상들을 완전하게 불러올 수 없으며, 그 불량한 기억 마저도 곧 듬성듬성해지며 사라진다. 사진은 흘러가버리는 대상들을 제법 잘 보관된 이미지들로 보관하며, 인간의 눈 앞에 재현시켜준다. 사진은 인간의 감각과 기억 사이에 끼어든 놀라운 마술이다.
사진이 인간이 본 것 만을 겸허하게 재현해야 한다는 생각에, 젊은 브레송은 매료됐다. 그는 평생 소형 라이카 카메라만 사용했다. 인간의 눈 높이에서 인간의 눈으로 대상을 만나는 일이야 말로, 말 그대로 '사진(寫眞) 행위'라고 생각했다. 표준렌즈 만을 고집했고 자연의 빛이나 찰나의 빛 아래서만 사진을 찍었으며 결코 플래시를 사용하지 않았다. 찍을 때의 느낌이야 말로 본질에 가장 가까운 것이라 믿었으며 이 느낌을 변형하거나 과장하는 일체의 방법을 배격한다. 브레송의 사진들은 '시선이 붙잡은 찰나의 기억'들을 성실하고 완전하게 재현하려는 노력의 결과들이다. 가짜 이미지인 사진이, 진정성을 지니려면, 바로 어떤 결정적인 순간의 대상-인식의 교호 작용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 브레송의 사진 속에서, 우리는 '아름다움' 자체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자아내는 구성적인 질료(質料)들을 만난다.
브레송의 생각들은 힘이 있으며, 그의 사진들에는 콕 집어낼 수 없는 깊은 매력이 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나는 그가 대상을 향해 카메라를 완전히 자연스럽게 열어놓지 못했다는 생각을 한다. '결정적 순간'이란 말이 풍기는 강박 때문이었을까. 어떤 연출이나 작위(作爲)도 거부했던 그의 사진 속에는, 뜻밖에 의미나 기이함을 강제하는 작위가 숨어있다. 그는 사진에 대한 생각을 열어주었지만, 그 스스로 완전히 그 생각을 열어젖히지는 못한 게 아닌가 하는, 섣부른 의문을 끼워본다. /빈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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