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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문자향

아사녀를 만났다

걸어다니는 문장

by Binsom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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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끝이 얼얼한 고추바람 부는 날에, 그래도 아빠와 함께 여행할 수 있는 호기를 놓치기 싫어하는 아이를 데리고, 멀리는 말고 경주 요근처 구경이나 찬찬히 할까, 하는 마음으로 길을 나섰다. 불국사 온천에서 몸을 녹인 뒤, 아사녀나 보러갈까,하고 아이에게 말을 건넨다. 아사녀? 그게 누구야? 아이는 호기심의 불을 댕기지만, 나는 그 이상 자세하게 가르쳐줄 생각은 없다. 으응. 그냥 아는 여자야. 예쁜.



고등학교 시절 불국사 기차역 앞에는 아사녀다방이 있었다. 흔히 있는 역전다방이나 길다방, 혹은 가로수다방이 아니라 아사녀다방인 것은, 여기서 차로 5분 거리에 영지라는 연못이 있기 때문이다. 내 코란도는 아사녀를 만나러 간다. 지금은 콘도와 모텔이 제 그림자를 비추고 있는 연못, 그 영지로 다가간다. 그러나 나는 어이없게도 영지를 지나쳐 마을로 들어가 버렸다. 오른쪽 차창에 길고 큰 저수지가 있었으나 그게 설마 그 유명한 영지랴, 하는 생각에 무시하고 지나가버린 것이다. 영지초등학교를 지나 멀리 북토로 가는 팻말을 보고서야 다시 차를 돌린다.



그러면서 내 길눈을 탓하기 보다는 경주시장을 원망하기 시徘磯? 저 황량하고 쓰레기 더부룩한 저 못이 영지라면, 그것은 이 고을 원님이 한심한 정치를 하고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나는 원망의 이유를 내민다. 내가 시장이라면 이렇게 하겠다. 우선 이 나라와 세계의 유명한 조각가, 화가들을 초빙해 저마다 조형물을 제작하고 인물화를 그리도록 하겠다. 이 쓸쓸한 저수지 정면에 막 완공을 끝낸 숙박시설 자리에 아사녀 기념관을 지어, 그 조형물들과 인물화들을 잘 놓아두어 천년을 아로새겨온 이 땅의 '로미오와 줄리엣' 스토리를 꼼꼼하게 복원하겠다. 연못 주변 또한 폐타이어와 썩은 옷가지가 뒹굴게 할 게 아니라, 명상하고 산책할 수 있는 오솔길과 호젓한 공간을 만들어, 옛날과 지금이 고요히 맞물리는 '그림자(影) 스트리트'를 만들겠다. 내 공약이 마음에 드는가. 혹시나 그렇다면 나를 찍어 시청에 보낼 생각은 마시고, 그 공약을 얼른 가로채 가서 실천하기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경주를 경영하는 노하우는 문화적 상상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거 없인 안된다. 영지 거기 뭐 볼 거 있는가? 이렇게 질문해버리면 지금처럼 돼버린다. 영지의 자산은 두 개다. 하나는 저 연못이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이야기'다. 영지가 품고있는 그 설화는 천금을 주고도 못사는 '문화유산'이다. 그걸 저렇게 나뒹굴게 하다니, 내가 원님에게 화 안나게 생겼는가.



아사녀 아사달 스토리는 서양의 나르시소스 모티프와 피그말리온 모티프가 절묘하게 결합되어 있다. 아사녀는 바로 서라벌의 나르시소스이며, 아사달은 피그말리온이다. 아사달 아사녀는 백제 남녀다. 물론 피천득의 아사코와는 별로 관계없는 사람이다. 아사달은 당시 이름난 돌조각가였다. 피그말리온과 직업이 같다. 이 사람을 데리고 불국사 건축 기획을 한 김대성은 이땅의 원조 '얼큰이'라 할 만하다. 그는 머리가 성(城)처럼 사각형인데다 큼직해서 이름이 '대성'이었다. 그는 신라에 두번 태어난다. 한번은 가난한 사람으로 몸을 입는데, 워낙 절에 공양을 바치는데 열심이어서 부처님이 다시 한번 태어나게 해줬다 한다. 아주 부잣집에 태어난 김대성은 처음엔 불교에 관심이 없었는데, 곰사냥을 하고난 뒤 생각이 달라졌다. 꿈에 그 곰이 귀신으로 나타나서 너무나 슬프게 우는 바람에 크게 뉘우쳤다. 곰은 대성에게 나를 불쌍히 여긴다면 영혼을 위로하는 차원에서 절을 하나 지어달라고 한다. 그래서 지은 절이 장수사였다. 대성의 절짓기는 이때부터 시작된다. 그는 금생을 살면서 전생의 부모를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전생의 부모에게는 석굴암을 세워주고 지금의 부모를 위하여서는 불국사를 짓는다.



김대성의 불국사 짓기는 사실상 국가적인 사업이었을 걸로 짐작된다. 이 불사를 진행하면서 대성은 백제의 아사달을 부른다. 엄연히 다른 나라의 백성을 어떻게 데려와 석가탑과 다보탑을 세우게 할 수 있었을까. 내 생각에는 왕실 간의 협의가 있었던 것 같다. 아사달은 나라 간의 약속에 따라 다른 나라의 불사에 차출되었다. 막 결혼을 앞두고 있었던 그라, 가고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라에서 시키는 일이니 눈물을 머금고 이곳으로 왔을 것이다. 당대 최고의 조각 아티스트였던 게 죄였다. 아사달은 처음에는 괴로운 기분으로 일을 시작했겠지만 갈 수록 일에 빠진다. 애인은 물론 자신의 국적까지도 잊은 망아(忘我)의 대작업이었으리라. 한 해 두 해 애인에게서 기별이 없자, 애가 탄 아사녀가 천리길을 달려온다. 그러나 탑이 아직 세워지지 않은 절 안에 여자는 발을 디딜 수 없다고 건장한 사내들이 길을 막는다. 불국사 문 앞에서 그 여자는 눈물을 죽죽 흘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때 스님 하나가 나와서 이렇게 얘기한다. "저 아래 마을이 보이시지요? 거기 연못이 하나 있을 것입니다. 그 연못 위에 탑의 상륜부가 비칠 겁니다. 그때는 석가탑이 다 지어진 것이니 오시면 지인을 만나실 수가 있을 거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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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녀는 지금 내가 바라보는 저 마을에 기식하였을 것이다. 낯선 이방에서 무작정 죽치고 기다려야 하는 심정이 어땠을까. 날마다 연못 가를 서성거리며 저 불국사의 탑이 수면 위로 올라오는지를 바라보고 또 바라봤으리라. 마을에선 미친 여자라고 수근거리지는 않았을까. "여보세요. 거기가 그래 뵈도 십리길이요. 그 먼 곳의 탑이 무슨 수로 여기 연못에 비친단 말이오?" 이렇게 현실적이고 과학적인 충고를 해주는 사람도 있었으리라. 나는 영지 못에 쭈그리고 앉아 아사녀의 눈으로 수면을 바라본다. 일부는 꽝꽝 얼었지만 얼음이 없는 곳에선 푸른 물이 찰랑거리며 마음을 어지럽게 한다. 못 가의 갈잎들은 찬바람에 흔들리며 시야를 헷갈리게 한다. 문득 뉴스 하나가 생각난다. 한강 주변의 아파트 중에서 '강물이 흘러가버리는 쪽'이 풍경으로 보이는 집에선 자살율이 높고 우울증에 더 많이 시달린다는 통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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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결을 오래 바라보면 환영과 착시와 정서 불안과 착란이 생기는 건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았으리라. 더군다나 졸지에 애인을 여의고 천리를 뛰어온 여인의 심정이라면, 물결 속에 아른거리는 햇살과 달빛이 시시때때로 탑이 솟아오르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눈을 부비고 나면 없다. 금방 솟아올랐는데 어느 샌가 사라져버렸다. 물을 바라보던 그녀는 점차 탑이 저 멀리 불국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저 연못 안에 있다고 믿게 되었을 것이다. 저 연못 안에 탑은 숨겨져 있는 데 애인은 숨바꼭질을 하려는듯 도무지 얼굴을 내보여주지 않는 것이다. 어느 날 바위 위에서 그녀는 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본다. 바위 위에 있는 것이 자기의 몸인지, 저 물 속에 있는 것이 자기의 몸인지 의식과 분별이 출렁이기 시작한다. 그녀는 저 장난꾸러기 애인이 탑을 내보여주지 않는다면 자신이 그걸 찾아내겠다는 생각을 한다. 아사달, 거기 있죠? 나 뒤에 숨어 있는 거죠? 파열하는 물소리가 잠깐 들린다. 수면 위에 어리던 아사녀의 모습이 수많은 물이랑으로 깨어져 흩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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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은 왜 백제처녀에게 그런 말을 했을까. 그녀가 저렇게 물의 착란 때문에 몸을 던질 것을 예측했던가. 그렇다면 자살교사죄가 아닌가. 나는 여기에 '에밀레 모티프'가 작동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당시 불교는 대중들의 신심을 불러모으던 거대한 부흥회의 시대였다. 종교의 많은 이벤트 중에서 가장 매력적인 것은 영육이 하나되는 기적의 현장이다. 에밀레는 '살아있는 아이'를 녹여 종으로 만드는 엽기적인 신앙을 더없는 종교적 희생으로 찬미하는 그 시대의 공기를 보여준다. 아사녀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삶과 죽음을 초월한 처절한 기구(祈求)로 오직 탑이 솟아오르기를 기다린 사람이다. 석가탑은 바로 그런 공력과 염원이 띄워올린 탑이다. 아사녀의 죽음은 어쩌면 석가탑에 바쳐진 순결한 헌신이다. 스님이 그녀의 죽음을 염두에 뒀다면 바로 탑을 위한 '인신공희(人身供犧)'를 생각했으리라. 당시의 정서라면, 한 사람의 죽음 쯤은 그렇게 바쳐지는 게 더욱 값어치있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사녀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억장이 무너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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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지못 주변에서 저 슬픈 스토리를 증거할 만한 무엇을 찾으러 돌아다녔다. 푸른 물빛 이외에는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고교 시절 친구따라 한번 왔을 적에 어딘가에 불상이 있었던 걸 기억해내고 그걸 찾아나섰지만 연못을 뱅뱅 돌아도 찾을 수 없었다. 못을 벗어나 돌아가려고 하는 차에 나는 지붕에 씌어진 반가운 '상호' 하나를 발견했다. 아사녀요(窯). 도자기를 굽는 곳인가 보다. 그 지붕이 보이는 집까지는 마주 오는 차 두 대가 비켜갈 수 없는 좁은 길이었지만, 나는 겁없이 차를 몰고 그곳으로 달려갔다. 이 겨울, 이 불황에 이 황량한 마을로 도자기를 사러오는 사람이 있다는 게 신기해 보인다. 심심하던 개들만 한참 짖은 뒤에, 어제 술을 많이 '퍼서' 아직도 정신을 못차리겠다는 마흔 쯤 되어보이는 사내 하나가 추리닝 차림으로 공장 겸 전시관에서 나온다. 그가 주는 커피를 마시며, 몇 가지 정보를 얻는다. 부처는 저 솔숲에 있다는 것, 그리고 그곳은 서울 인사동에 '모조' 고도자기를 납품하는 곳이라는 것, 그는 어릴 때부터 줄곧 이곳에서 살았으며, 아사녀가 좋아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는 것. 차 서비스가 고마워서 그릇 몇 개를 집어든다. 얼맙니까?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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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불상에 도착하면 나의 시점(視點)은 아사달로 바뀔 수 밖에 없다. 거기까지 가기 전에 영지와 무영탑을 잇는 '그림자(影)'의 문제를 좀더 짚고 가야 한다. 두 가지 이름은 현실을 교묘히 뒤바꾸고 있다. 그림자 연못이란 뜻의 영지에는 사실 그때나 지금이나 탑의 그림자가 비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림자'란 이름을 가진 연못이 되었다. 석가탑의 다른 이름인 무영탑은 저녁 햇살에 선연한 그림자를 보였는데도 '그림자가 없음'이란 이름의 탑이다. 무영지와 영탑이 되어야 할 것을, 저렇게 뒤틀어 놓으면서 이야기의 긴장과 염원의 크기를 증폭시킨다. 여자 나르시소스인 아사녀는 탑의 그림자를 찾아 물 속으로 떠났고, 스스로 그림자가 되어 못의 영(影)으로 남았다. 연못은 탑의 내면이며 해석이며 경탄이며 재연이다. 탑은 신앙이며 연못은 그 신앙을 수용하는 중생이며 보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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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이 지닌 남성성과, 연못이 지닌 여성성이 하나의 거리를 두고 서로 조응한다. 그 관계는 그림자의 교환이라는 상징으로 엮인다. 내가 영지에 갔다가 차를 몰고 불국사 석가탑 앞으로 가는 일은 바로 내 스스로가 영(影)의 역할을 맡는 일이다. 내 눈에 비친 석가탑의 그림자는 영지의 연못에 그대로 투사될 것이며, 내 눈에 담은 영지의 물그림자를 불국사까지 배달해가서 거기다 저 석가탑의 그림자를 띄울 것이다. 영지에서 무영탑으로의 순례는 한 사랑의 실핏줄이 되어 그 미친 그리움을 이어주는 길이다. 네 가슴 속의 탑을 풀어, 저 사랑에 눈먼 여자의 물결 앞에 리얼이미지로 그려넣어주는 일이다.


불국사는 내게 여의도 국회의사당같다. 고요하게 수행하고 구도하는 절집은 아닌 것 같고, 이슈에 따라 소란한 논란이 일어나기도 하고 그것이 심하면 멱살잡이를 넘어 스님들 간의 이단옆차기가 카메라에 잡히기도 하는 정치적 공간에 가깝게 느껴진다. 늘 관광객으로 넘치는 시끌한 분위기는 종교적 도량이라기 보다는 롯데월드나 하이마트같은 느낌을 준다. 불국사에 몸 담은 분들이라면 나의 이런 평가나 주관적인 인상에 발끈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게 박힌 이 오래된 이미지를 '수술'할 수도 없으니 딱한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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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나는 저 석가탑 앞에만 서면, 없던 신앙이 생겨날 만큼 숙연해지고, 그 돌조각 하나하나를 반한 듯이 우러러 본다. 무엇 때문에 그런지 구체적으로 설명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게 안되니 답답한 노릇이다. 아주 질박하면서도 조화로운 짜임새로 하늘을 타고 올라가는 돌들의 자세가 나를 감동시키는 모양이다. 오늘따라 저녁 햇살이 좋아 지붕돌의 층급받침마다 다른 광량(光量)의 햇살이 들어앉아 생기를 더했다. 나는 아사달의 용모를 짐작할 수 없고, 그의 석예(石藝)를 헤아릴 수 없으나, 저 석가탑을 보면서 그에 대한 알 수 없는 연모에 휩싸인다. 신라 사람이고 천년 밖의 나도 이런데, 아사녀는 어떠했을꼬. 그러나 저 애인의 찢어지는 심정을 까맣게 모르는 채, 그는 마치 저 부처의 현신(顯身)인 탑을 쪼아내는데 전념한다. 피그말리온이 그랬듯, 그 또한 석가탑은 상상력이 만든 외물이 아니라 바로 저 돌 속에 들어있는 부처의 형상을 찾아내어 필요없는 돌들을 쪼아내 버리는 작업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석가탑을 만드는 아사달의 마음 속에 아사녀의 형상도 있었을까. 부처와 세상의 연인이 하나로 통합되는 무애와 원융의 '그리운 형상'이 그에게 들어 있었을까. 그렇다면 저 석가탑도 예사롭지 않다. 그것은 부처의 몸이자 곧 아사녀의 몸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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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달이 석가탑을 완성한 뒤 뒤늦게 아사녀가 찾아왔다는 얘기를 듣고 영지로 달려왔을 때 그는 연못의 푸른 물살 이외에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아사녀가 그랬듯이 그 또한 저 연못을 하염없이 보면서 앉아 있었으리라. 그러다 그도 같이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면 영락없는 로미오와 줄리엣이겠지만, 영지의 러브스토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이 천재 조각가는 그녀가 물에 뛰어들 때 디뎠던 바위를 옮겨 거기다 불상을 새긴다. 자신을 사모하다 죽어간 여인의 넋을 위로하는 뜻이었겠지만 그것에 더하여, 그 불상 속에서 그녀를 다시 한번 만나고 싶은 아사달의 마음이었으리라. 온통 자기를 위해 출렁이고 있는 영지 연못 가에서, 한 사내가 끝없이 정 위에 망치를 두드린다. 돌조각이 붙은 뺨으로 눈물이 흘러내렸을까. 이 백제의 피그말리온이 만들어냈다는 불상을 보았을 때 나는 이만저만 실망이 아니었다. 얼굴을 누군가가 뭉개버린 듯 아예 달걀처럼 변해있는 이상한 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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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이 불상이 천재 아사달이 만든 것일까. 석가탑을 만든 그 손이 이 돌에 정을 댄 것일까. 사실이라면, 이 작품은 얼굴 부분을 채 다 만들지 않고 미완의 상태로 둔 것일까. 아니면 후대의 누군가가 훼손을 한 것일까. 알 수 없다. 아사달 아사녀의 이야기는 저 영지라는 이름 만으로 이미 끝났고, 불상은 다른 사람이 제작한 것인데 누군가가 스토리를 극적으로 이끌기 위해 이것과 저것을 기워낸 것일까. 알 수 없다. 아사달이 저 불상을 만들었다면, 나는 미완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그는 아사녀를 채 만들어낼 수 없었다. 그러기에는 영지 연못에서 사른거리는 애인의 넋이 너무 처연했고, 돌 속에서 그 얼굴을 만나게 되면 그 또한 미친 그리움을 영지에다 내던져야할 지도 모를 일이었다. 석상을 만들던 그는 어느 날 정과 망치를 내던졌다. 그리곤 홀연히 백제로 떠났다. 돌 속에 얼굴을 내밀지 못하고 들어앉은 아사녀는, 영지 못에 비칠 아사달의 얼굴을 다시 천년 동안 기다려온 건지도 모른다./빈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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