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슴풍뎅이

한 때는 꿈이었던...

by Eco archivist

초록이 점점 짙어지는 5월, 숲의 채도가 높아질수록 나의 시선은 유독 다른 색채를 쫓는다. 차분한 무광의 아이보리색 벨벳을 두른 듯한 그 오묘한 질감을.

여기저기 들려오는 목격담이 하나둘 늘어날 때마다 알 수 없는 조바심이 인다. 그 고운 빛깔이 유한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나의 오랜 ‘꿈의 곤충’, 사슴풍뎅이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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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감이나 사진으로만 동경하던 시절, 나는 이 녀석을 만나려면 강원도의 깊은 원시림이나 인적이 닿지 않는 결계 너머의 숲을 헤매야만 할 줄 알았다. 그만큼 이국적이고 비현실적인 외모였으니까.

하지만 그 간절했던 첫 만남은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른, 아주 건조하고 삭막한 풍경 속에서 이루어졌다. 산과 가까운 지역이었지만 무심코 걷던 길바닥에 툭 하고 떨어져 있던 수컷 한 마리. 보도블록 위에 덩그러니 놓인 녀석을 주워 들고 나는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내 오랜 꿈의 등장이 이렇게나 허무하고, 또 이렇게나 갑작스럽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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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그저 우연인 줄 알았다. 하지만 녀석들을 알면 알수록, 그것이 녀석들의 치열한 삶의 방식 때문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사슴풍뎅이는 나무 위에서 활동하다가 바닥으로 잘 떨어진다.

단순히 발을 헛디뎌서가 아니다. 녀석들의 그 유난히 긴 앞다리는 암컷과 수액 터를 차지하기 위한 ‘전투 병기’다. 나무 위에서 긴 팔을 휘두르며 치열하게 영역 다툼을 벌이다 보면, 엉겨 붙은 채 균형을 잃고 추락하는 일이 다반사다. 승자도 패자도 없는 공중낙하인 셈이다. 문제는 녀석들이 떨어진 곳이 하필이면 사람들이 오가는 길목일 때다.

개체 수가 제법 많은 지역의 등산로를 걷다 보면, 차마 다시 날아오르지 못하고 등산화 발밑에서 생을 마감한 흔적들이 보이기도 한다. 가장 뜨겁게 싸우던 시절에, 가장 처참한 모습으로 바닥에 납작하게 붙어 있는 녀석들을 볼 때면 그 화려함이 오히려 더 서글프게 다가온다.

그래서 5월의 숲길을 걸을 때는 발밑을 살피게 된다. 혹시라도 녀석을 밟게 될까 봐, 혹은 누군가에게 밟힌 녀석을 보게 될까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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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살아남은 녀석을 손에 올려보면, 그 자태는 과연 명불허전이다. 우리나라 갑충 중 외모 으뜸을 꼽자면 단연 사슴풍뎅이다. 뻔한 광택이 흐르는 딱딱한 갑옷 대신, 빛을 부드럽게 머금는 무광의 아이보리색 등판은 가히 예술적이다.

수컷의 그 기형적으로 긴 앞다리마저 조형미가 넘친다. 경쟁자가 나타나면 그 긴 팔로 상대를 껴안듯 들어 올리는데, 그 모습이 마치 레슬링 선수를 연상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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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녀석, 알고 보니 얼굴값만 하는 게 아니다. 화려한 갑옷 속에 거위벌레 뺨치는 섬세한 모성애를 숨기고 있다. 보통 장수풍뎅이나 사슴벌레는 썩은 나무나 발효 톱밥 속에 무심하게 알을 낳고 끝이다. 하지만 사슴풍뎅이 암컷은 다르다.

이들이 속한 무리(Dicranocephalus)의 암컷들은 알을 낳을 때 '요람'을 만든다. 신선한 나뭇잎을 가져다가 돌돌 말거나 뭉쳐서 그 안에 알을 하나씩 소중히 낳고 땅에 묻는다. 잎이 발효되면서 생기는 열과 영양분을 애벌레에게 선물하려는 것이다. 덩치는 산만 한 녀석이 잎사귀 만두를 빚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면 웃음이 나면서도 묘한 감동이 인다.

그래서 이들을 사육해 본 사람들은 안다. 다른 갑충들처럼 톱밥만 채워주면 알을 잘 낳지 않는다는 것을. 사육통 안에 참나무 잎이나 다른 활엽수 잎을 넉넉히 넣어줘야 비로소 암컷은 안심하고 산란을 시작한다. 까다롭다면 까다로운 이 습성은 사실 자식을 위해 최고의 환경을 만들어주려는 어미의 고집인 셈이다.

이 녀석을 만나는 일은 시간과의 싸움이다. 갓 우화한 녀석들의 몸을 덮고 있는 그 따스한 아이보리색 가루는 활동하면서 금세 벗겨지고 만다.

늦게 가면 반질반질해진 검은 등판만 보게 될 뿐이다. 가장 빛나는 시절의 모습을, 바닥에 으깨진 모습이 아닌 살아 숨 쉬는 모습으로 마주하고 싶어 5월이 되면 달력을 보며 발을 동동 구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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