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는 무척 많다.
어떤 래퍼들은 사회에서 일어나는 이런저런 일들을 가사로 표현하곤 한다.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제도를 논하기도 하며 국민의 안전에 해가 될 수 있는 상황을 다루기도 한다. 이런 노래를 접한 사람들은 그동안 미처 알지 못했던 문제나 알고는 있었지만 적극적으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현황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직접적인 토론이 이뤄지는 것은 아니지만 이와 같은 노래는 래퍼와 청취자의 입장을 공유하는 매개가 된다. 이런 노래는 특정 사건이나 현상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며 세상을 보는 시야를 넓혀 준다.
한번 내가 래퍼가 됐다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사회적 이슈를 노래로 표현하는 상황을 생각해 보자. 어떤 문제를 선택해야 할까?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뉴스에서 자주 다뤄지고 있지만 좀처럼 개선되지 않는 옳지 못한 경향, 혹은 많은 사람이 걱정하는 일들을 찾아보도록 하자. 이런 것들이 다수의 공감을 이끌어 낸다.
많은 청소년이 용돈을 벌기 위해, 사회생활의 경험을 쌓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한다. 다양한 직종이 있지만 고객을 응대하는 일을 하는 경우가 많다. 편의점 관리, PC방 관리, 식당에서의 서빙 등 청소년들이 주로 택하는 이런 아르바이트는 사람을 상대하는 것도 주요 업무에 포함된다. 가게 운영이 잘되려면 언제나 손님들을 친절하게 대해야 한다. 물건을 진열하고, 가게를 청소하는 등 기본적인 일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감정노동자'가 되는 것이다. 손님 중에는 나이 어린 아르바이트생이라고 함부로 대하는 수준 낮은 사람도 있다. 기분이 상하는 행패를 당해도 아르바이트생은 영업에 해가 되지 않기 위해 감정을 억누르고 손님에게 상냥하게 굴 수밖에 없다. 소위 '진상'이라고 부르는 이런 손님을 경험해 본 학생들은 감정노동이 몸을 쓰는 것만큼 힘든 일임을 잘 알지 않을까 싶다.
제리케이가 2016년에 발표한 '콜센터'는 감정노동의 대표 직종인 전화 상담원들의 일상과 감정을 묘사한다. 이들은 고객이 매기는 만족도 점수가 업무 성적에 반영되기 때문에 어떤 일이 있어도 항상 나긋나긋한 태도를 유지한다. 이 사실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악용해 폭언과 욕설을 퍼붓거나 성희롱을 하는 파렴치한 사람들도 있다. 상담원들은 모욕을 겪어도 부드럽고 밝게 고객을 상대한다. '콜센터' 중 "전화해. 네가 화를 내도 난 웃을 수 있어. 잘못을 대신 사과하는 전문가."라는 가사는 그들의 힘겨운 직장 생활을 압축해 보여 준다. 전화 상담원뿐만 아니라 수많은 이가 고객의 만족을 위해 자신의 감정과는 무관하게 직장에서 정해 놓은 지침에 따라 행동한다. 따라서 '콜센터'는 우리의 얘기이기도 하다.
2016년 6월 '금융회사 감정노동자 보호법'이 시행됐지만 이름 그대로 금융권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법이다. 전화 상담원, 마트 판매원, 식당 종업원 등 다른 수많은 감정노동자는 여전히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실정이다. 나와 내 친구, 우리 부모님이 겪을 수 있는 문제임을 생각하면서 제도의 아쉬운 부분, 감정노동자들에 대한 배려를 바라는 가사를 쓰는 것도 좋을 듯하다.
환경오염과 지구온난화는 지구촌의 중대한 관심사다. 이를 증명하듯 미국 가수 트레이시 채프먼(Tracey Chapman)의 'The Rape of the World', '팝의 황제'(King of Pop)로 불리는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의 'Earth Song', 영국 애시드 재즈 밴드 자미로콰이(Jamiroquai)의 'Emergency on Planet Earth' 등 팝 음악계에서 환경문제를 다룬 노래가 여럿 출시됐다. 우리나라에서는 1992년부터 1995년까지 환경보호 메시지를 담은 컴필레이션 앨범 [내일은 늦으리]가 시리즈로 제작됐으며 같은 이름의 콘서트가 열리기도 했다.
힙합에서도 황폐해져 가는 지구를 돌아보자고 얘기하는 노래를 만날 수 있다. 윌아이앰(will.i.am)은 2007년 발표한 'S.O.S. (Mother Nature)'에서 세계 곳곳에서의 난개발로 숲을 잃어 가는 현실, 이산화탄소 농도 증가에 따른 지구온난화를 꼬집는다. 힙합으로 교육용 음악을 만드는 미국의 회사 리듬 라임 리절츠(Rhythm, Rhyme, Results)는 2009년 '미국항공우주국'(National Aeronautics and Space Administration: NASA)의 지원을 받아 만든 'Take AIM at Climate Change'를 통해 온난화에 따른 기후변화를 설명했다. 2013년 출시된 자이언티의 데뷔 앨범 수록곡으로, 양동근이 랩을 한 '지구온난화'는 익살스러운 표현을 동원해 무겁지 않게 온난화 현상을 지적한다.
지구온난화는 우리 삶을 위협하는 문제다. 극지방의 빙하가 계속해서 녹으면서 해수면이 상승하고 있고 이에 따라 몰디브, 투발루 같은 섬나라가 침수될 위기에 놓였다. 대기 상태와 바닷물의 움직임도 온난화에 영향을 받으면서 태풍, 홍수 등의 자연재해가 과거보다 자주 발생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이런 위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기후변화, 환경문제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기를 당부하는 노래도 필요하다.
이따금 뉴스를 통해 젊은 여성이 갓 낳은 아기를 몰래 버리거나 그대로 방치해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진다. 경찰청이 2011년부터 2015년까지 집계한 국내 영아 유기 범죄는 무려 609건이나 된다. 2016년에는 109건이 발생했다고 한다. 이제 막 세상 빛을 본 새 생명이 사흘에 한 명꼴로 버려지고 있는 상황이다. 오죽하면 '베이비박스'(baby box)까지 만들어졌을까?
당사자들 대부분은 미혼모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좋지 않아서, 아기를 키울 경제적 여건이 받쳐 주지 않아서 두려운 마음에 아기를 버리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 것이다. 그들이 느꼈을 불안감은 이해된다. 하지만 생명을 유기하는 것은 반인륜적인 행위이며 명백한 범죄다.
안타깝게도 미성년자가 영아를 유기했다는 뉴스 또한 꽤 자주 보도되고 있다. 10대 미혼모, 미혼부도 꾸준히 느는 추세다. 성에 대한 호기심은 크지만 피임에 대한 이해도가 낮은 데다가 임신을 하더라도 미성년자라는 신분 탓에 출산에 대한 준비가 여러모로 어려워 나타나는 결과다. 순간의 실수로, 한쪽의 일방적인 양육 기피에서 비롯되는 미혼모, 미혼부 증가는 심각한 사회문제 중 하나가 됐다. 이런 현상을 곱씹으면서 올바른 성적 가치관 확립과 생명에 대한 책임감을 논하는 가사도 생각해 보길 바란다.
인종차별에 대해서도 고민해 봤으면 한다. 외국으로 건너간 한국 이민자 대다수가 인종차별 때문에 힘들었다고 얘기한다. 갈라진 틈을 뜻하는 'chink'를 서양인에 비해 작은 동양인의 눈에 빗대 비하할 목적으로 쓰는 사례가 여전히 많다. 주문받은 음료를 담은 컵에 손님의 이름이나 이니셜을 적는 것이 관례인 스타벅스(Starbucks)의 몇몇 매장이 한인 고객의 컵에 이름 대신 찢어진 눈 모양의 이모티콘을 그려 줬다는 소식도 종종 들려온다. 에픽 하이의 타블로는 1980년대 후반 캐나다로 이민을 가서 처음 등교했을 때 그곳 아이들한테 나무에 묶인 채 맞은 경험을 방송에서 털어놓은 적이 있다. 재미교포 래퍼 스내키 챈은 2016년에 낸 'Boom'에서 인종차별을 당한 기억을 언급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사람을 포함한 동양인에 대한 인종차별은 현재 진행 중인 슬픈 사실이다.
부끄럽게도 우리 역시 외국인을 상대로 인종차별을 저지르고 있다. 가끔 뉴스에서는 외국인 노동자에게 터무니없이 임금을 적게 주거나 상습적으로 임금 지불을 미루는 일부 회사의 괘씸한 행태가 보도되곤 한다. 상하 관계를 앞세워 외국인 노동자에게 폭력이나 성추행을 일삼는 악덕 업주도 있다. 많은 학원과 학교가 원어민 교사를 뽑을 때 백인을 선호한다. 회화 수업에서 흑인 선생님을 만난 학생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중국요리, 중국집 배달원 등을 일컬을 때 많은 사람이 무심코 쓰는 '짱깨'3)도 중국인을 낮잡아 보는 사고에서 기인한 인종차별적 표현이다. 이처럼 한국에서도 외국인을 향한 인종차별이 적잖게 일어나고 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한국으로 건너오는 외국인 노동자가 늘어났고 1990년대부터는 한국인과 결혼하는 외국인이 많아짐에 따라 다문화가정도 증가했다. 국제적인 행사 개최, 한류 열풍 등으로 국가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유학생도 매년 증가하는 중이다. 국내에 체류하는 외국인 수는 2016년 200만 명을 넘겼을 만큼 많다. 외국인을 일상생활에서 마주하는 시대가 됐지만 우리나라보다 경제력이 떨어지는 나라에서 왔다고 무시하거나 오랜 세월 우리를 단일민족이라고 여겨 온 탓에 혈통을 중시하며 무작정 외국인을 배척하는 경우가 곳곳에 존재한다. 외국인 인구는 하루가 다르게 느는 데 반해 그들에 대한 인식은 더디게 성장하는 실정이다.
국내에서 활약하는 외국인 운동선수나 아이들(idol) 그룹에 속한 외국인 가수는 많은 사람에게 아낌없는 환호를 받는다. 반면에 어떤 외국인은 하찮은 일을 한다고, 중요한 인물이 아니라고 괄시를 당하곤 한다. 인종차별뿐만 아니라 신분에 따른 차별까지 가해지는 현상은 더더욱 안타깝기만 하다. 우리나라도 다문화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상황이기에 외국인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고 동등하게 대하자는 가사도 절실해 보인다.
우리 주변에는 제시한 쟁점들 외에도 특정 계층을 불편하게 하거나 공익에 해가 되는 문제가 많다. 성적 소수자를 향한 편견, 외모지상주의, 여성혐오와 남성혐오 같은 이성 간의 증오, 사교육 과열, 청년실업률 증가, 지역감정, 소득 양극화, 기회의 불평등을 초래하는 특권층의 권력 남용 등 누군가는 거북함을 느낄 좋지 않은 일들이 도처에 자리해 있다. 꼭 래퍼가 됐다고 가정하지 않더라도 나, 또는 나와 가까운 사람이 겪고 있거나 언젠가 겪을 수 있는 일인 만큼 한번 깊게 생각해 봤으면 한다.
7월 중순에 <힙합은 어떻게 힙하게 됐을까?> 2쇄가 나왔다. 어쩌다 보니 책은 얼마 전에 받게 됐다. 2쇄 나온 기념으로 책에 실으려다가 어렵고, 무거운 내용이라서 통편집을 당한 꼭지 하나를 올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