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 20km를 걸으며 깨닫게 된 것에 대하여
“Beach Side Walk”라는 행사에 참여했다.
이런 행사가 있는지도 몰랐는데 우연히 들어선 서던 비치에서 행사 천막을 발견하고는 덜컥 신청해 버렸다.
주변 사람들이 제각기 다른 옷차림에 붙이고 있는 똑같은 스티커를 보고 나서였다.
‘나도 저 스티커를 달고 걷고 싶다.’
단지 그 이유뿐이었다.
‘참가비 1000엔, 12시 30분에 이곳에서 다 같이 출발, 목적지인 에노시마까지 약 9km를 쓰레기를 주으면서 걷는다’
오케이. 하루에 2만 보는 걸어야 제대로 된 여행이라고 생각하는 내게 안성맞춤 코스였다.
빈 스티커에는 써야 할 공간이 세 군데 있었다.
출발지인 지가사키, 목적지인 에노시마를 한자로 적고 내 이름도 가타카나로 적었다.
마지막 남은 곳(메시지)에는 그 순간 떠오른 문장을 적었다.
“ここで幸せを(여기서 행복을)“
아마도 뒤에 생략된 말은 “찾고 싶다“였을 것이다. 우연히 참가한 행사곤 너무 거창한 욕심이었다.
어쨌거나 이 길을 다 걸은 뒤엔 행복을 찾을 수 있길 바라며 걷기 시작했다.
줄지어 걷는 무리 속에 외국인인 내가 있다는 사실이 조금은 새삼스러웠지만, 이 길을 걷는 순간에는 나도 이들과 다른 게 하나 없는 똑같은 사람일 뿐이었다.
모든 게 낯선 이곳에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기분 좋은 소속감이었다.
제각기 다른 스티커 속 메시지를 보는 것도 재미였다.
대부분은 ”걷자!“, ”힘냅시다!“ 류의 메시지였고
나이대에 맞게 어미나 이모지의 유무만 달랐는데
그중에서도 눈에 띠는 메시지들이 있었다.
”10년 만에 바다입니다“ 라든가
“맥주 한 잔을 위하여“ 라든가
”많이 먹고 싶어서 걸어야 해요“ 같은 유머러스한 메시지도 있었고
눈에 보이는 쓰레기란 쓰레기는 모두 수집하는 귀여운 아이의 등 뒤엔
”쓰레기는 모두 내 거! “ 가 꼬물꼬물 한 글씨로 적혀 있었다.
예정에도 없던 에노시마까지 9km 길을 걸으며
수십 명의 스티커 속 메시지를 읽었고,
수십 번 마음이 웃었고
그중 반의 반만큼 그들의 대화 내용을 알아들었고
걸어도 걸어도 자꾸 새로운 곳이 펼쳐지는 바닷길 위에서
감사하단 말을 자꾸만 되뇌는 내가 있었다.
내가 지금 이곳에 있다는 게,
가져올까 말까 계속 고민하다 가져온 기모 트레이닝 바지를 유용하게 입고 있다는 게,
바닷바람에 내 머리가 이리저리 자유롭게 휘날려고 괜찮다는 게,
낯선 사람들에게서 친근한 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게,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내 가방 뒤에 붙어 있는 메시지는 사실
뒷말이 필요하지 않았던 거 아니었을까.
생략된 말을 찾을 필요도 없었다.
그저 이 길을 걷는 내가, 내 가방을 본 당신이,
우리 모두가 여기서 행복을 느낄 것이라는 일종의 주문 아니었을까.
그 사실을 9km 여정의 끝자락에서야 어슴푸레 알게 되었다.
다시 같은 길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걸으면 2시간,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1시간. 굳이 대중교통을 탈 이유가 없었다.
똑같은 길을 돌아가며 일몰의 해변을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도 있었다.
실제로 늦은 점심을 먹고 나니 주변 하늘이 온통 핑크 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일몰 타임이 시작된 것이었다.
자, 아름다운 태양을 벗 삼아 다시 걸어보자.
나는 다시 온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추워도 너무 추웠다. 순식간에 일몰이 끝나 바닷바람은 더 거세게 추위를 머금고 내 온몸에 부딪혔다.
이대로 계속 갈 수 있을까. 오른쪽 발바닥은 이미 아파오기 시작했고, 칼바람이 지나간 자리엔 아마도 감기가 들어찰 것 같은 불안한 예감도 번졌다.
30분쯤 지나자 결국 완전한 밤이 되었다.
가로등 하나 없는 바닷길이었다.
두려웠고 무엇보다 외로웠다.
주위를 둘러보니 옷을 벗은 채 보드를 들고 걷던 서핑맨들도,
바다 앞에서 사진을 찍던 커플 무리들도 다 사라지고 남은 사람은 나뿐이었다.
이 길을 나 혼자 1시간 반을 더 걸어야 한다.
혹시 위험한 일이 생기면 어떡하지?
발을 헛디뎌 쥐도 새도 모르게 이 세상에 사라지면 어쩌지?
불안한 걱정을 하는 내게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에노시마를 다 벗어나 다시 익숙한 해변가로 들어서자
바닷바람이 더는 거세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마치 낮에 만났던 나를 기억이라도 하는 듯 따뜻하고 부드럽게 안아주는 바람이었다. 그 순간, 다시 이 길을 걸을 수 있는 용기와 함께 바닷길을 걸었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지금 그 사람들은 무얼 하고 있을까, 그 상상을 하며 밤의 해변 길을 계속 걷고 걸었다.
파도소리,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 소리,
반대쪽 도로에서 들리는 폭주족 오토바이 소리.
내 위로는 별이 쏟아질 듯 반짝이고
옆 바다의 풍경도 계속 바뀐다.
가끔 멀리서 달려오는 사람을 지나치기도 하는데
모두 머리에 후레시를 달고 달리느라 얼굴을 제대로 보지는 못한다.
낮에 많은 이들과 함께 걸었던 이 길을
이젠 나 혼자서 걷고 있다.
내 주변에는 자연뿐이다.
누군가와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더라도
그 시간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
결국엔 혼자인 채로 돌아와
저보다 훨씬 커다란 세상을
어쨌거나 계속 걸을 수밖에 없는 것.
그게 아마도 나의, 인간의 길일 거라고 생각했다.
눈앞에 길은 좀처럼 끝날 것 같지 않았고
그게 조금은 내게 위안이 되었다.
자, 내일은 또 어떤 길을 걸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