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브스턴스를 보았다

아브젝트의 자리에 선 늙음, 혹은 노화 공포의 거울

by 새솔


서브스턴스 : 아브젝트의 자리에 선 늙음, 혹은 노화 공포의 거울


코랄리 파르자 감독의 <서브스턴스>는 한때 ‘에어로빅 여왕’으로 군림하던 스파클(데미 무어)이 노화의 그림자를 감당하지 못하고 젊은 클론 ‘수’를 만들어내며 벌어지는 ‘엉망진창’의 파국을 그린다. 대충 줄거리만 들으면 뻔한 B급 호러처럼 보이지만,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마치 우리가 직면하는 모든 ‘노화 공포’가 한데 뒤엉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기이한 장면들과 마주하게 된다. 자꾸만 흘러내리는 살점과 뼈마디 사이로, ‘늙음이란 얼마나 추한 것인가’를 묻는 시선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이 시선의 주체가 누구인지 곰곰이 생각해보면, 꽤 섬뜩하다. 스파클을 늙었다며 내치는 방송사도, 점점 망가지는 몸을 혐오하는 스파클 본인도, 스크린 앞의 우리도 ‘노화’에 대한 어떤 공포와 거부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1. 내가 혐오하는 것은 누구인가


‘노화된 몸’을 혐오 대상, 즉 아브젝트(abject)로 정립한 이론가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말에 따르면, 혐오란 사실 우리 안에 내재된 공포를 바깥으로 밀어내는 행위다. <서브스턴스>에서 스파클이 바로 그 ‘밀어냄’을 실행한다. 자신에게서 분리된 듯한 또 다른 젊은 몸(클론 수)을 만들어내고, 그 몸에 매달린다. 처음에는 꽤 달콤해 보이는 이 공생(共生)이 곧 상호 착취로 이어지는 건 말 그대로 필연처럼 느껴진다. 모체가 가진 노쇠함과 젊은 클론이 원하는 쾌락이 서로 충돌할 때, 우리는 과연 어떤 방향으로 시선을 돌려야 할까?

특히 후반부에서 벌어지는 폭력 장면을 보고 있으면, “내가 혐오하는 것은 누구인가?”라는 의문이 불쑥 솟아난다. 노화한 자기 자신을 없애버리고 싶어 하지만, 동시에 노화를 두려워하도록 만든 사회적 욕망 역시 몸서리치게 불쾌하다. 노화된 스파클의 비명, 그리고 ‘젊음’이라는 환상을 놓지 못해 점차 괴물이 되어가는 수의 모습이 겹쳐질 때, 영화는 다소 날것의 방식으로 말한다. 우리 모두가 늙음을 숨기거나 지우고 싶어 하는 바로 그 지점이야말로, 이 끔찍한 파국의 시발점이라고.



2. 경계를 파괴하는 클론


최근 몇년 사이, 노년의 여성을 전면에 내세운 예술영화가 차츰 늘고 있다. 그러나 <서브스턴스>가 독특한 점은, ‘노인 여성’이라는 인물이 직접 젊은 육체를 복제해냄으로써, 통상적인 세대 구분을 영화 안에 이중으로 겹쳐 놓았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스파클(늙은 몸)과 수(젊은 몸)는 동시에 스파클의 ‘과거-현재-미래’를 뒤섞은 존재가 되고 만다. 둘이 분리되는 순간부터 이미 경계는 흐릿해지고, 자아와 타자가 혼재된 이상한 관계가 펼쳐진다.

이들의 파멸 과정을 보면, 문득 “내가 타자의 삶을 온전히 바꿀 수 없다”는 감각이 떠오른다. 스파클은 수를 완전히 통제할 수 없고, 수 역시 모체인 스파클을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 뒤늦게 “늙음을 인정하고 싶다”는 듯 행동해도 이미 늦었다. 각자의 몸을 부둥켜안지 못하고, 결국 둘 다 무너져내리는 것이다.

이 기묘한 동거에서 무엇이 참혹한가. 서로에게 시간을 할애하지도, 평등하게 나누지도 못한 채, 몸을 분해하고 재조립하려는 부질없는 욕망이 결국 재앙을 초래한다. 관객은 한 생명(혹은 한 인격)이 서로에게 파고드는 잔혹한 침투 과정을 고스란히 지켜보게 된다. 자칫 “과도한 고어”로만 보일 수도 있지만, 실은 이 잔혹함이야말로 우리 사회가 극도로 혐오하는 늙음과 육체의 변화가 ‘어떻게 은폐되고 왜곡되는지’를 폭로하는 장치다.


3. 젊음으로 귀결되는 미디어의 스펙터클


스파클에게 있어 젊은 시절은 성공과 스포트라이트 그 자체였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방송사에게 내쳐지자마자 ‘노화한 몸’으로는 더 이상 이 무대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고 단정한다. 결국 그녀가 손을 뻗은 대상이 바로 ‘서브스턴스’라는 기묘한 약물이다. 여기서 영화가 노골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젊음의 스펙터클이다. 카메라는 클론 수의 몸을 집요하게 훑으며, “이것이 바로 더 자극적이고 시장성이 높은 몸”이라고 말해버린다. 안방 너머에서 이 광경을 즐기는 시청자, 실제로는 유사한 자극에 길들여진 우리 일상, 그 모든 것이 스파클을 더욱더 궁지로 몰아넣는다.

특히 작품 후반, 괴물이 된 몸이 방송 무대에 난입하는 장면은 묘하게도 ‘착취와 잔혹성’을 한데 묶어 보여준다. 우리가 그토록 미화하던(아니면 믿어 의심치 않던) “젊음과 활력이 곧 아름다움”이라는 논리가 어떻게 삐뚤어져버릴 수 있는지, 도무지 외면할 수 없을 정도로 적나라하게 펼쳐지기 때문이다.


4. 늙음과 젊음의 클리셰, 파멸의 자리에서


그러니 결국 질문은 이렇게 바뀐다. “왜 ‘늙음’을 인간이 제거해야 할 결함처럼 느끼도록 만들었을까?” 스파클이 행한 모든 광적 행동에 책임이 없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그 이면에 깔린 사회적 시선과 미디어 구조 역시 만만치 않은 가담자다. 노화한 여성 연예인은 마치 폐기물 취급을 받으며, 자신이 용도 폐기됐음을 뼈저리게 인식한다. 젊은 육체를 가진 수가 그 자리를 대신 들어서는 순간, 스파클이 발 디딜 곳은 이미 한참 전에 사라져버린 상태가 된다.

영화가 보여주는 파국은 “이 지경까지 오기 전에 다른 길은 없었을까?”를 묻는다. 길이 없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스파클에게도 대안은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늙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유도하는 거대한 문화적 공조 속에서, 사람들은 그 문을 쉽사리 발견하지 못한다. <서브스턴스>가 불편할 정도로 신체 파괴 장면을 부각하는 것은, 우리가 ‘젊음’이 아니면 안 된다고 외치면서도 실은 그 뒤편에서 얼마나 많은 삶이 부서져가는지를 마주하도록 하는 전략일지도 모른다.


5. 존재의 흔적이 사라지고 난 뒤


영화 마지막에 괴물이 된 몸이 피를 사방에 쏟아내며 무대와 관중을 전부 오염시키는 장면은, 우리가 애써 보지 않으려 했던 노화를 강제로 들이밀어 “진짜 추한 건 누구인가?”라고 되묻는 장면처럼 보인다. 스파클은 사라지고, 노화에 대한 공포와 혐오, 그것을 부추겨온 체계가 뒤늦게 제 손을 피로 물들인다. 그리고 그 잔혹한 흔적이 딱히 해결되지 않은 채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관객으로서는 어쩔 수 없이 씁쓸해진다. 늘 흥행 논리와 시청률을 중시하는 미디어와, 오래된 몸은 더 이상 쓸모없다고 여기는 대중의 시선 속에서, 더 나은 생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런 불편함 덕분에 우리는 끝내 다음 질문에 닿게 된다. “늙음이 추해지는 까닭은 과연 그 몸의 문제일까, 아니면 우리가 그 몸을 바라보는 태도에 있는 걸까?”

<서브스턴스>는 흥행 요소로서의 선정성과 폭력을 잔뜩 두르고 있지만, 실은 아주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명백히 찾아올 노화를 부정하고 밀쳐내는 게 과연 최선인지, 그로 인해 사라지는 것은 무엇인지. 우리는 이미 영화 속 스파클의 모습에서, 혹은 괴물이 된 클론 수의 모습에서, 그 답의 한 단면을 엿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6. 존재가 남긴 흔적에 대하여


“늙지 않는 인간은 없다.”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기에, 우리가 무시한 문장일 수 있다. <서브스턴스>는 이 당연함을 더없이 끔찍한 방식으로 되짚어보도록 강요한다. 노화가 밀고 들어오는 통증과 잔혹함은 어느새 한 인간을 스스로 혐오하도록 만들고, 그리고 그 공포를 스크린 밖으로도 번지게 한다. 어쩌면 불편한 작품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한편으론, 이렇게까지 극단적 표현으로 질주해야만 비로소 우리가 노화와 젊음에 관한 통념이 얼마나 파괴적이었는지 깨닫게 되는 것 아닐까.

늙음을 혐오하는 사회, 자기 자신을 파괴해버리는 개인, 그리고 오염된 무대 위에서 터져나오는 피의 바다. 이 지독한 장면들은 오히려 우리가 노화를 다시 사유하는 법을 가르쳐준다. 몸이 흘려보내는 흔적들이, 어느 날 우리 모두가 맞닥뜨려야 할 질문 앞에서 미리 꺼내놓은 경고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한 줄 평

“우리가 늙음을 외면하는 방식이 만들어낸 처참한 일그러짐. 몸을 덮어버린 욕망의 파편 속에서, 누구도 무사하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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