싯다르타를 읽었다

상반기 독서모임을 돌아보며

by 새솔

지난 몇 달간의 독서 모임에서 우리는 물리학과 다양한 철학 이론을 차례로 읽어 왔다. 시작은 현대 물리학에서 비롯된 '양자 역학적 세계관'이었다. 카를로 로벨리의 글을 통해, 보이는 세계 뒤에 숨어 있는 상대적/관계적 실재의 신비를 엿보았고, 절대적이라 믿어온 존재와 인식의 경계를 재검토하게 되었다. 이어서 우리는 칸트의 초월적 관념론에 도전하듯, 인간 이성이 어떻게 세계를 구성하고 어떤 필연적 한계를 지니는지를 공부했다. 예리한 사유로 현상과 물자체를 가르는 칸트의 입장은, 우리에게 "알 수 없는 어떤 배후"에 대한 겸손한 태도를 가르쳐주었다.


그 다음 장으로 우리는 라캉과 바디우, 들뢰즈의 철학을 공부했다. 라캉의 욕망 이론과 주체의 분열 개념은, 우리가 '나'라 생각하는 존재가 사실은 분열적이며, 타자의 욕망에 의해 끊임없이 변형된다는 통찰을 던졌다. 바디우와 들뢰즈는 그런 주체를 '사건'과 '생성'의 흐름 속에서 재정립하며,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 태어나는 가능성으로 보았다. 욕망, 실재계, 사건, 생성 같은 개념들은 우리 일상의 잔잔한 수면 아래 숨어 있던 무의식적 진동들을 하나둘 일깨웠다.


그러다 마침내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읽기로 했다. 결과적으로, <싯다르타>는 그동안 다양한 책들을 통해 배워 온 개념들을 한 자리에 모아 조명해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양자 세계관이 말하는 '보이는 세계 뒤 숨은 진실'은 싯다르타가 강가에서 발견한 신비와 닮았고, 칸트가 제시한 '인식의 한계와 현상 너머'라는 문제는 싯다르타의 영적 갈증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또한 라캉적 시선으로 보면, 싯다르타의 고행과 방황은 욕망에 대한 극단적 부정과 긍정의 반복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바디우의 개념으로는 싯다르타가 마주한 깨달음을 '사건'으로 부를 수 있을 터다. 들뢰즈가 역설한 끊임없는 생성의 흐름 역시, 끊임없이 자기를 버리고 다시 태어나는 싯다르타의 여정과 공명한다.


이 글은 그러한 독서 모임의 마지막 시간에 대한 일종의 '사유의 결산'이다. 지금까지 탐구해온 여러 이론과 개념들을 종합하여, 싯다르타가 상징하는 깨달음과 자기 변형의 과정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양자역학에서 얻은 우주적 관계론과 칸트 철학이 지적한 인식의 한계, 라캉에서 이어지는 욕망과 주체의 분열, 그리고 들뢰즈·바디우의 존재론이 제시하는 생성과 사건의 철학. 이 모든 것들은 가닿는 지점은 다르면서도, 의외의 방식으로 서로 연결되고 있었다. 그 연결의 한가운데서, 강물에 비친 싯다르타의 모습이 어떻게 우리 자신의 존재 방식을 비추는지, 그 깨달음이 어떤 보편적 의미를 갖는지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양자역학과 관계적 실재: 보이는 세상과 보이지 않는 진실


현대 물리학, 특히 양자역학의 발견은 우리의 실재 관념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는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에서 관계론적 해석을 통해 세계를 새롭게 바라볼 것을 제안한다. 로벨리에 따르면 양자 세계에서 '사물'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은 없고 오직 관계만이 존재한다. 즉, 현실은 독립적이고 고정된 객체들의 집합이 아니라 상호 작용과 관계로 이루어진 그물망이다. 어떤 사실도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관찰자나 맥락에 상대적이며, '우리에게 실재적인 한 사실이 다른 존재에겐 실재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로벨리는 우리가 익숙하게 여겨온 ‘단단하고 확고한 사물로 이루어진 세계’라는 관념을 버리고, 만물은 서로에게 영향 주는 관계 속에서만 그 정체성을 갖는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양자역학적 실재관은 겉보기에 분리되고 실체적이며 영원해 보이는 현상이 사실은 일시적이며 상호 의존적이라는 깨달음을 안겨준다. 과학적 연구를 통해 고요한 확실성의 세계가 하나의 환영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이런 관계적 실재의 관점에서 볼 때, 싯다르타가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은 양자역학적 실재관과 닮은점이 있다. 싯다르타는 브라만의 아들로서 전통적인 종교 의례와 교리를 배우며 성장했지만, 그 표면적인 가르침만으로는 마음의 갈증이 해소되지 않는다. 그는 보이는 세상 너머의 진실을 찾아 나서기 위해 기존 신념체계를 떠나 사문이 된다. 이는 마치 고전 물리학의 확고한 세계상을 버리고, 보이지 않는 양자 세계의 진리를 탐구하는 과학자의 태도와도 같다. 수행 끝에 만난 고타마 부처의 가르침조차 직접적인 깨달음에 대한 갈증을 채워주지 못하자, 싯다르타는 다시금 스스로의 길을 찾아 나아간다. 이러한 끊임없는 의문 제기와 세계에 대한 재사유의 자세는 로벨리가 말한 과학적 탐구정신과 공명한다. 로벨리는 과학의 핵심을 "현존 질서를 두려움 없이 전복시키고 세계를 다시 생각해보는 힘"이라고 했다. 싯다르타 역시 안주하지 않고 거듭 자신의 세계를 전복시키면서 새로운 깨달음의 가능성에 자신을 내맡긴다.


싯다르타가 마침내 강가에서 얻은 깨달음의 내용은 모든 존재와 순간이 연결되어 하나라는 통찰이었다. 그는 강물의 흐름을 관조하며 시간의 환영을 넘어 과거-현재-미래가 모두 지금 여기에 있음을 체험한다. 이는 세상을 개별적 사건들의 연속으로 보는 통념을 넘어, 전체로서의 연결망으로 보는 시각이다.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상호 의존적 실재와 같이, 싯다르타는 자아와 세계, 개별 존재들 사이의 경계가 허상임을 깨닫는다. 강물 소리에서 우주의 모든 목소리가 어우러진 '옴'을 들었을 때, 그는 비로소 만물이 서로에게 비추어 있기에 존재한다는 진실을 직관한다. 마치 전자 한 개조차도 우주와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는 양자세계처럼, 싯다르타의 깨달음 속에서 '나'와 '타자', 주체와 객체의 구분은 녹아내리고 모든 것이 한 관계망의 일부로서 이해된다. 결국 싯다르타는 보이는 세상 이면의 실재를 목도하게 되는데, 그것은 양자 물리학이 밝혀낸 바와 같이 관계 속에서만 드러나는 유동적이고 상호 연관된 실재였다. 이러한 깨달음 앞에서 그의 마음에는 심오한 평안과 환희가 깃드는데, 그것은 개인적 차원을 넘어 우주적 연결성에 대한 경외였으며, 근대 과학이 도달한 통찰과도 상응하는 부분이 있다.


칸트의 초월적 관념론과 현상의 한계: 싯다르타의 인식 전환


싯다르타의 여정은 인간이 경험하고 인식할 수 있는 세계의 한계를 넘어서 궁극적 실재를 추구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는 철학자 칸트가 말한 초월적 관념론의 문제의식과 연결된다. 칸트는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를 '현상'이라고 부르고, 그것이 우리 의식의 형식에 의해 구성된 것이라 설명한다. 즉, 공간과 시간은 사물 그 자체의 속성이 아니라 우리 주관이 세계를 지각하는 방식일 뿐이며, 따라서 우리가 아는 것은 항상 우리 의식에 나타난 모습이다. 반면, '물자체', 곧 마음의 필터를 거치지 않은 궁극의 실재는 우리의 경험과 인식 밖에 존재한다. 인간 이성은 선천적 형식과 개념으로 세계를 이해하기에, 본질적인 실재는 우리에게 직접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칸트 철학의 핵심이다. 우리에게 나타나는 강과 나무, 별과 사람들은 결국 의식이 구성한 현상일 따름이며, 그 배후에 있는 실재의 참모습은 원리상 접근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통찰은 현실에 대한 겸손과 동시에, 인식의 한계를 자각하게 한다.


칸트의 이러한 관념론적 틀 안에서 보면, 싯다르타가 겪는 좌절과 각성의 순간들은 현상계의 한계를 깨닫고 그것을 초월하려는 시도로 해석될 수 있다. 싯다르타는 젊은 시절부터 의례와 경전 공부를 통해 지식을 쌓았지만, 개념과 이론의 학습만으로는 참된 자아를 알 수 없음을 직감한다. 이는 개념 없는 경험은 공허하고, 경험 없는 개념은 맹목적이라는 칸트의 통찰을 떠올리게 한다. 그는 자기 자신과 세계를 직접적으로 체험하고자 집을 떠나고, 극단적인 고행을 통해 감각적 경험을 극도로 제한함으로써 의식의 깊은 층위를 탐색한다. 그러나 수년간의 고행 끝에도 그는 완전한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 이는 인간 이성이 지닌 구조만으로는 궁극적 실재에 닿을 수 없다는 한계를 보여준다. 결국 싯다르타는 경험(감각)과 이성(개념) 어느 한쪽에 치우친 길이 아닌 제3의 길을 찾아 나선다. 부처의 가르침조차도 언어와 가르침이라는 형식을 통해 전달되기에, 그것만으로는 자신이 구하는 바 '물자체의 진리'를 체득할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강가에서의 깨달음 순간, 싯다르타는 문득 시간의 흐름이 한 순간에 통합되는 경이를 경험한다. 과거에 만나고 헤어진 모든 이들, 즉 아버지, 연인 카말라, 친구 고빈다, 그리고 자신이었던 소년 싯다르타까지, 그 모든 모습이 한꺼번에 현재 속에 살아 있음을 본다. 그는 시간이라는 형식이 실은 마음이 만들어낸 틀에 불과하며, 만유의 참된 실재에는 과거와 미래의 구분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것은 칸트가 말한 선험적 시간의 틀을 초월하여, 마치 순수한 지성에 의한 직관을 얻은 것처럼 보인다. 물론 칸트 철학에서 인간은 '지적 직관'을 가질 수 없으며, 오직 현상을 통해서만 사물을 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싯다르타의 경우, 수년에 걸친 수행과 삶의 부침 끝에 찾아온 이 통합적 통찰은 일종의 영적 직관으로서 묘사된다. 현상계의 베일이 거두어지고 물자체의 광휘가 잠시 드러난 순간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논리와 개념으로 설명되기 어려운 역설적 상태인데, 모든 것이 변함없이 하나이면서도 끊임없이 흐르는 실재의 구조를 직접 느낀 것이다. 칸트의 틀로 본다면, 싯다르타는 이성의 한계를 존재의 체험으로 뛰어넘은 셈이다. 비록 철학적 엄밀함으로는 칸트가 경고한 인식의 벽을 인간이 완전히 벗어날 수 없겠지만, 문학 속 싯다르타의 체험은 어떻게 한 개인이 경험과 인식의 경계를 초월하여 보다 근원적인 실재와 만날 수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것은 현상의 강을 건너 저편 언덕의 진리를 목격하는 일이었고, 그로 인해 싯다르타의 내면에는 이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평화와 지혜가 자리하게 된다.


프로이트와 라캉: 욕망, 주체의 분열과 실재계의 만남


싯다르타의 여정을 움직이는 심리적 원동력은 다름 아닌 욕망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간의 행동 뒤에는 의식하지 못하는 깊은 욕망과 무의식적 충동이 자리한다. 싯다르타 역시 처음에는 깨달음에 대한 강렬한 욕망으로 집을 떠난다. 이는 종교적 구도심처럼 보이지만, 프로이트의 시각에서 보면 자기 실현에 대한 원초적 욕구로도 해석될 수 있다. 한편, 그는 고행 생활에서조차 존재의 고통을 소멸시키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렇듯 욕망의 형태는 겉모습을 바꿔가며 그를 이끌었다. 한때 쾌락을 부정하는 욕망에 헌신했던 싯다르타는, 반대로 아름다운 카말라를 만나 쾌락을 긍정하는 욕망에 몸을 맡기기도 한다. 프로이트가 말한 쾌락 원칙과 현실 원칙 사이에서, 싯다르타는 극단을 오가며 자기 내면의 결핍을 채우려는 '시지프의 노동'을 반복한 셈이다. 그러나 어떤 극단에서도 그는 만족을 얻지 못하고, 결국 심연 같은 공허와 마주하게 된다. 욕망을 철저히 부정해도, 혹은 마음껏 충족시켜 보아도 채워지지 않는 결핍의 본질과 직면한 것이다. 이러한 체험은 주체를 깊은 균열 앞에 세운다. 프로이트가 말한 '환멸'의 순간, 즉 어느 쪽으로도 욕망이 충족되지 않을 때, 인간은 심리적 위기를 맞이한다. 싯다르타에게 그 위기는 강가에서 자살을 생각할 정도의 절망으로 찾아왔다.

이 지점에서 프로이트의 제자를 자처한 라캉의 이론은 싯다르타의 주체 해체와 재구성 과정을 분석하는 데 유용한 도구를 제공한다. 라캉은 주체를 욕망하는 존재로 규정하며, 인간의 욕망은 항상 타자의 욕망이라고 말했다. 요컨대 우리는 '타자가 우리에게 욕망하라고 부여한 그것'을 욕망한다는 것이다. 싯다르타의 초기 욕망은 아버지와 사회가 이상적으로 여기는 성자의 길에 대한 갈망이었고, 이후에는 고타마 부처라는 위대한 타자를 향한 동경과 그것을 넘어서고자 하는 욕망이었다. 카말라와의 사랑 속에서도 그는 그녀가 열어준 쾌락의 세계를 욕망했고, 상인으로 돈을 벌 때는 타인들이 중요시하는 부를 욕망하였다. 이렇게 싯다르타의 자아는 끊임없이 타인의 욕망과 부딪히고 그것을 내면화하며 분열되었다. 라캉이 말하는 상징계와 상상계 속에서 싯다르타는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자아상을 경험한 것이다. 브라만의 아들로서의 자아, 사문으로서의 자아, 애인과 부의 상징을 향유하는 자아... 이 모든 모습들은 사실 고정된 '진짜 자신'이 아니라, 상황과 욕망에 따라 형성된 가면들이었다. 라캉 이론대로라면 주체는 본래 분열적이며 완결된 실체가 아니다. 싯다르타가 겪은 자기 혐오와 환멸은 바로 이러한 분열된 주체의 붕괴를 의미한다. 그가 강가에서 느낀 절망은 모든 욕망과 동일시되었던 자아들이 무의미의 벽에 부딪혀 산산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라캉은 이러한 한계 상황에서 실재계와 마주치게 된다고 보는데, 이는 언어화될 수 없는 빈 공간이자 주체를 근원에서 뒤흔드는 불가능한 실재다.


실제로 싯다르타는 강가에서 자기 자신의 완전한 해체를 경험한다. 더 이상 스스로를 브라만도 아니고, 구도자도 아니며, 쾌락을 탐하는 인간도 아닌 '무(無)' 에 가까운 존재로 느끼며, 그는 삶을 포기하려 한다. 이때 들려온 신비한 '옴'의 소리는 마치 허무의 심연 속에서 울린 실재계의 목소리처럼 그를 일깨운다. 그것은 어떤 특정한 가르침이나 개념이 아닌, 의미 이전의 순수한 울림이었다. 라캉의 관점에서 보면, 싯다르타는 이 순간 기표의 그물망(상징계)이 거두어진 맨얼굴의 실재를 접한 것일 수 있다. 깨달음의 직접적 계기는 언어가 아니라 소리 그 자체였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말로 규정되지 않은 '옴'의 진동은 싯다르타의 무의식을 흔들었고, 그는 깊은 잠에 빠져들어 마치 자궁 속 태아처럼 새로운 상태로 거듭난다. 깨어났을 때, 그의 의식은 이전과 달라져 있었다. 이것은 주체의 재구성에 해당한다. 욕망과 동일시되었던 옛 자아들은 죽었고, 이제 싯다르타는 욕망의 근원을 간파한 한층 자유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라캉 이론에서 실재계와의 조우는 주체에게 큰 변화를 일으키는데, 싯다르타에게도 그러했다.


새로이 깨어난 싯다르타는 과거의 자신들을 포함하면서도 초월한 통합적 자아를 획득한다. 더 이상 결핍에 쫓겨 방황하는 욕망의 포로가 아니라, 결핍 그 자체를 껴안음으로써 평온에 이른 주체가 된 것이다. 라캉의 표현대로 하자면, 그는 마침내 상징적 자아와 내적 욕망의 균열을 메우는 접착제를 발견한 셈이다. 싯다르타에게 그 접착제는 만유에 대한 사랑과 일체감이었다. 그는 세상의 모든 것들을 이해하고 용서하며 사랑하게 된다. 어린 시절 그토록 흠모했던 부처의 미소와 같은 평안이 그의 얼굴에 드리워진다. 라캉과 비교하자면, 싯다르타는 상징계의 법과 금지(아버지의 법)를 거부하고 자신의 길을 갔으며, 결국 실재계에 닿는 열반을 얻었다는 점에서, 부처가 추구한 깨달음과 라캉이 말하는 실재계는 서로 다른 언어로 말해진 같은 궁극을 가리킨다. 싯다르타가 '열반'이라고 부른 것을 라캉은 '실재계'라고 불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싯다르타는 자기 파괴의 위기를 지나 참된 자기를 재건함으로써, 더 이상 분열되지 않는 온전한 주체로서 강가에 서 있게 되었다.


들뢰즈와 바디우: 생성의 철학과 사건으로서의 깨달음


싯다르타의 삶은 끊임없는 '변화와 생성(becoming)'의 연속이었다. 이는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의 생성 철학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들뢰즈는 존재를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끝없이 변화하고 생성하는 흐름으로 파악한다. 우리 자신조차도 완결된 ‘나’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능성 사이를 지나가는 하나의 문턱에 불과하다. 들뢰즈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아란 두 다수성 사이에 놓인 하나의 문지방, 하나의 생성일 뿐이다. 싯다르타는 끊임없이 자신을 버리고 새로 태어나는 탈주를 반복한다. 브라만의 아들이었던 그는 구도자의 '생성'을 선택했고, 구도자에서 다시 세속인의 '생성'으로 나아가 부와 사랑을 경험했다. 그리고 다시 모든 것을 버리고 강물의 제자가 되는 '생성'을 통해 새로운 존재로 변모한다. 이러한 연속적 자기 변용은 들뢰즈 철학의 진수를 보여준다. 들뢰즈에 따르면 생성이란 어떤 정해진 출발점과 도착점이 있는 과정이 아니다. 싯다르타의 여정도 목표지향적이라기보다 삶 그 자체가 전개되는 하나의 흐름이었다. 그는 특정 교단의 교리를 따라 깨달음에 도달한 것이 아니라, 삶의 우여곡절 속에서 자신도 예상치 못한 모습들로 변모하며 진리를 향해 갔다. 그 과정에서 그는 아무도 아닐 때에야 비로소 모든 것과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역설을 몸소 체현했다. 들뢰즈가 <천개의 고원>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싯다르타도 자기를 해체하여 '무명(無名)의 존재'로 내려놓았기에 만유를 사랑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강물 소리를 들으며 자신을 그 흐름과 동일시했을 때, 그는 자아의 경계를 허물고 모든 존재와 함께 생성하는 자아로 변혁된 것이다.


들뢰즈의 생성철학이 싯다르타의 과정을 조명해준다면, 바디우의 존재론은 싯다르타가 얻은 결과, 곧 새로운 존재 양식을 이해하는 틀을 제공한다. 바디우에게 존재(being)란 일종의 주어진 상황 속에 수(數)로서 질서 지어진 다수성이다. 그러나 진리의 탄생은 이 평범한 존재 질서에 균열을 내는 사건(event)을 통해 이루어진다. 바디우는 진리란 사건 이후 그 사건에 충실하게 따르는 실천이 상황 속에서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싯다르타가 강가에서 맞이한 깨달음의 순간은 바로 이러한 사건으로 볼 수 있다. 그 사건은 기존의 삶의 방향과 의미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는 점에서 탈구성적인 진리의 출현이었다. 강물 소리 속 '옴'의 체험은 싯다르타 개인의 역사에서는 물론이고, 우리가 흔히 아는 어떤 종교적 교리의 연장선에서도 설명될 수 없는 돌발적인 초월이었다. 바디우가 말하듯, 그 사건은 기존의 언어와 지식으로는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 것이었고, 그렇기에 '내재적인 단절'을 일으켰다. 깨달음의 사건 이전까지 싯다르타를 규정하던 모든 정체성과 가치들은 더 이상 절대적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되었다. 마치 어둠 속 번개가 치듯, 순간의 깨달음이 그의 존재를 관통하여 새로운 빛을 던진 것이다.


사건 이후 중요한 것은 그 사건에 얼마나 충실히 응답하며 살아가느냐이다. 바디우 이론에 따르면 진리는 그 사건에 충실한 주체들에 의해 현실 속에서 전개되는 과정이다. 싯다르타는 깨달음을 얻은 후 강을 떠나지 않고 뱃사공으로 머물며, 조용히 그러나 확고하게 자신이 얻은 진리를 삶 속에서 실천한다. 그는 번쩍이는 논쟁이나 가르침을 설파하지 않는다. 대신 강물이 가르쳐준 진리를 가슴에 품고 매일같이 강을 건너는 사람들을 태우며 살아간다. 이는 싯다르타가 깨달음의 사건에 끝까지 충실하고자 함을 보여준다. 바디우의 말처럼 진리는 어디 멀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 이후 상황 속에서 이어지는 충실한 행위들 그 자체다. 싯다르타의 미소 어린 침묵과 자애로운 태도는 그가 얻은 통찰, 즉 모든 존재에 대한 사랑과 일체감에 대한 변함없는 충실의 표현이다. 그렇게 그는 진리의 주체가 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바디우가 진리는 개인이나 집단에 속하지 않고 보편적이라고 한 것인데, 싯다르타의 진리 역시 특정 종파나 계층에 한정되지 않고 만인에게 열려 있었다. 오랜 친구 고빈다가 마지막에 찾아와 그의 눈빛 속에서 똑같은 진리를 깨닫게 되는 대목은, 진리의 보편성과 전달 가능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깨달음이라는 사건이 싯다르타 개인을 넘어, 다른 이의 삶에도 변혁을 일으킬 수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는 진리는 하나의 사건으로 시작해, 다수의 주체들에게 공유되며 지속되는 과정이라는 바디우의 주장과도 맥을 같이 한다.


들뢰즈와 바디우의 관점에서, 싯다르타는 생성 중의 존재이자 사건의 주체로 떠오른다. 들뢰즈의 철학이 그에게 끊임없이 변화하며 스스로를 창조하는 생명의 시를 부여했다면, 바디우의 철학은 그의 깨달음을 역사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진리의 불씨로 자리매김한다. 싯다르타가 도달한 새로운 존재 방식, 요컨대 욕망과 두려움에 예속되지 않고 매 순간 존재 그 자체로 충만한 삶은 결국 우리 모두가 도달할 수 있는 존재의 가능한 모드로 제시된다. 그것은 정념과 분열에 찢긴 주체가 아니라, 생성의 흐름에 몸을 맡긴 주체, 그리고 진리의 사건에 응답하는 주체로 살아가는 길이다. 싯다르타는 그렇게 삶 그 자체가 철학이 된 인간의 전형이 되었다.


삶과 사유의 합일 – 싯다르타가 던지는 통합적 통찰


헤세의 싯다르타는 한 인간의 내밀한 체험담이면서 동시에 동서양의 철학적 지혜가 합류하는 합창곡과도 같다. 양자역학의 시선은 싯다르타의 깨달음을 통해 만물의 관계성과 실재의 역설을 포착하게 하고, 칸트의 관념론은 그의 여정에서 인간 인식의 한계와 그것을 뛰어넘는 길을 성찰하게 한다. 프로이트와 라캉의 정신분석적 틀은 싯다르타의 고뇌를 욕망과 주체의 문제로 해명해주며, 들뢰즈와 바디우의 사유는 그의 변모와 깨달음을 생성과 사건의 드라마로 떠올리게 한다. 이처럼 서로 다른 철학적 관점들이 하나의 소설 속에서 자연스럽게 만나며, 싯다르타의 경험은 다층적인 의미의 스펙트럼을 얻는다. 이러한 통섭은 독자로 하여금 한 가지 렌즈에 머무르지 않고 보다 풍부하고 입체적인 이해에 이르도록 돕는다.


결국 싯다르타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단순하지 않다. 존재란 무엇인가?, 실재란 무엇이며 우리는 어떻게 접촉할 수 있는가?, 앎의 경계 너머에 무엇이 있는가?, 진정한 자기란 어떻게 발견되는가?와 같은 물음들이 그의 이야기 곳곳에서 제기된다. 그리고 그의 삶 자체가 그러한 물음에 대한 하나의 응답이자 모범으로 제시된다. 싯다르타는 스스로 체득한 진리를 통해 지혜로운 침묵의 경지에 이른다. 강물처럼 유장한 그의 미소는 마치 모든 철학적 사유를 하나로 녹여낸 직관의 증표처럼 느껴진다. 로벨리가 스스로를 독립적 실체가 아닌 거대한 관계망의 일부로 보는 것의 (두려움이 아니라) 경이로움을 말하고 있듯이, 싯다르타는 자신이 전체 우주의 일부임을 알고 나서야 비로소 깊은 안도와 환희를 얻는다. 그리고 칸트가 가르쳐준 겸허함대로, 말로 다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조용히 미소 지을 뿐이다.


이처럼 싯다르타의 깨달음은 양자 물리학에서 철학적 존재론까지 폭넓은 개념들과 연결되며 다성적(多聲的) 의미를 드러낸다. 이는 위대한 문학이 갖는 힘이자, 위대한 철학이 추구하는 이상과 맞닿아 있다. 삶과 사유의 합일, 즉 경험을 통해 철학하고 철학을 통해 다시 삶을 이해하는 순환이야말로 싯다르타가 몸소 보여준 것이었다. 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도 스스로의 삶에서 이러한 깨달음을 향한 여정을 계속하라고 속삭이는 듯하다. '나'라는 작은 세계를 넘어 거대한 실재의 강물에 자신을 띄울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나, 진정한 실재와 마주할 수 있을지 모른다. 싯다르타가 들려준 강의 노래는 지금 이 순간도 우리 가슴속 어딘가에서 은은히 울리고 있다. 그것은 깨달음의 노래요, 존재의 시(詩)로서, 듣는 이마다 각기 다른 철학적 화음을 자아내며 영원히 흐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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