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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의 이름으로
사람을 구속하는 것

by 현요아


그래, 나는 어쩌면 완치하기 어려운 병을 가지고 있을지 몰라. 충동적으로 어떤 일을 벌였다가도 금세 가라앉는 기분 때문에 모두 다 내팽개치고 도망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니까. 누군가는 쉽게 일컫는 우울증과 조울증과 불안증을 사이좋게 하나씩 골고루 진단받은 나는 이 병이 나를 설명하는 명료한 단어라고 여겨왔어. 그래서 책에 들어갈 작가 소개를 쓸 때도 구구절절 어떤 일을 했는지 말하지 않고 삼 년 전쯤 진단받은 병명을 대신 적었어. 그 편이 내 성격과 앞으로의 성격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거든. 그만 약을 끊고 싶은데 아직 끊을 때가 아니라며 받아 든 약은 이전보다 조금 더 늘어 있었어. 집에 돌아와 검색해 보니 불안하거나 초조해서 잠에 잘 들지 못할 때 먹는 약이라더라. 부작용으로는 낮에도 조금 많이 졸릴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래서인지 이 글을 적는 도중에 금세 잠에 빠질지도 모르겠다는 짐작을 해. 얼마 쓰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슬슬 몽롱하거든.


그래도 이번에는 잠에 지지 않겠다는 강한 다짐이 나를 이 글의 말미까지 데려다 놓겠지. 더는 나를 병명으로 규정짓고 싶지 않아. 양극성 장애는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고, 범불안장애는 어떤 성향을 지니고 있다는 이야기를 더는 듣고 싶지 않아. 여기서는 말할 수 없는 불안하면서 곧은 생각이 다시는 이대로 둥둥 떠오르지 않도록 막아주는 방법이 약이라는 걸 잘 알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 약에 이전처럼 온통 기대고 싶지 않아. 약은 그저 뇌에게 주는 영양제처럼 먹는 거라고 생각하고, 그 어떤 결정이나 선택이 병 때문에 이루어졌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래. 내가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통보한 것부터 사람들과 함께 글을 쓰는 온라인 수업을 길게 그만두어야겠다는 결정을 한 것도 모두 나의 이성적인 관념이 장기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게 하기 위해 힘을 실은 것뿐이야. 조증에 올라간 탓에 충동적인 일을 벌였다고 빠르게 단언해 버리면 이 병을 미워할 수밖에 없으니까. 이 병이 내 선택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것처럼 느껴지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아.


저마다 특별한 상황이 생겼든 그렇지 않든 간에 문득 기분이 좋아질 때가 있고 그러지 않을 때가 있잖아. 그런데 나는 이 병을 알고 난 후로 나의 오르내리는 기분에 모두 이름을 붙여. 조증이 왔구나, 울증이 왔구나. 불안증이 왔구나, 트라우마가 번졌구나. 그렇게 알아차리고 인정하고 나아지려 한다면 훨씬 괜찮은 쪽으로 나아갈 수 있을 텐데, 나는 아쉽게 정의하는 데서 멈춰. 또 왔구나, 밀어내고 싶었는데, 멀어지고 싶었는데, 어김없이 다시 나를 찾아왔구나. 그러면 다시금 이 병을 미워하게 되는 거야. 싫어하는 친구와 계속해서 같은 반에 뭉쳐 다니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배가 고픈 점심시간에 속이 안 좋다는 거짓말을 하고 얼굴을 감싼 채 누워서 그저 시간이 하염없이 흘러 하교시간까지 닿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는 이 병과 최대한 말을 섞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선생님께 한 달 치의 약을 달라고 했더니 추이를 바라봐야 한다면서 삼주도 길다고 하시는 거야. 언젠가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 설산의 통나무 집에서 꼬박 일 년을 보낼 계획을 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이 약들 없이 나는 그 통나무집에서 살 수 있을까 싶은 물음이 들더라. 물론 그때는 약과 완전히 이별했을 거라는 상상을 덧입혀서 기분이 조금 나아지기는 했지만 말이야.


암 투병 중이라고 그 사람의 일상과 생각이 전부 암과 관련된 것은 아니듯이, 당뇨를 치료 중인 사람이 당뇨를 빼놓고서는 그 사람을 설명할 수 없다는 이야기는 말도 안 되듯이 나는 이제 이 병과 작별을 고할래. 병을 앓는다는 사실을 숨기는 게 아니라, 그저 잘 관리하고 있음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쪽을 택할래. 잠에 빠지지 않고 이 글을 무사히 마무리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엄청난 성취를 이뤘다는 자신감을 누릴래. 새롭게 추가된 약은 나를 나른하게 만들었지만, 나는 그 나른함을 졸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편안함으로 인식해 이 글을 천천히 썼던 것처럼, 이대로의 속도와 이대로의 방향으로 느리게 걸어갈래. 내게는 남들이 말하는 천천히도 빠르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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