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것

by 현요아



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지는 눈치를 가지기 어려워서 껴야 한다고 할 때 빠진다. 도망친다. 달린다. 숨는다. 사라진다. 자취를 감춘다. 영영 먼 곳으로 숨는다.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상상의 존재였던 것처럼 희미해진다. 그러면 내 안의 존재는 뜀박질 치면서 나는 여기 있는데 왜 나를 꽁꽁 숨기는 거야? 나는 이것도 잘 하고 저것도 잘 하고 사랑도 받을 수 있고 칭찬도 받을 수 있어! 라고 외치려 한다. 그의 입을 막는다. 입을 벌리지 않으면 원천적으로 말실수를 하지 않을 수 있다. 친구의 신의를 잃은 건 술을 마시고 나서 친구에게 울며 나를 잡아달라 기댔던 나약한 너의 울음 때문이었다고 다그친다. 그러면 그는 어제 오후 네시에 그랬던 것처럼 구석에 틀어박혀 공기놀이를 한다. 하나 다음은 둘을 건너 뛰고 셋이다. 셋을 성공하면 셋을 건너뛰고 넷이다.


마우스 쥔 사람을 누가 누가 빨리 대체하나 경쟁하는 시대에서 느리게 느리게 가는 소설을 읽었고 그 책을 읽으며 확실한 결론에 이르렀다. 독자는 과거에 찰나로만 머문다. 작가는 너무나 오래 머물러야 한다. 이야기를 짓고 가상의 누군가를 탄생시키는 순간 나는 과거에 갇힌다. 때로 미래로 현재로 멀리 나아갈 수 있겠지만 나는 그 장면에 계속 갇혀서 완벽하게 만족스럽지 않은 마침표를 짓지 않는다면 그 장면에서 탈출하지 못한다. 열심히 살지 않으면 인생의 후반전에서는 인생의 난도가 높아진다던데 그 사람은 자신의 후반전을 모른다.


술을 한 잔 두 잔 들이켜고 나면 헛소리가 나와서 금주를 이 년 넘게 하는데 구름이 걷히고 해가 밝고 앞에 놓인 오후가 길어서 작은 가게에 들어가 작은 잔에 사케를 가득 부어 들이켰다. 세 잔 정도를 마시고 나서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가볍게 나의 이야기를 꺼냈는데 그 이야기의 첫 자를 꺼내는 순간 그 얘기를 괜히 꺼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시 입을 다물기에 또한 분위기가 어색해진다는 사실도 함께 알고 있어 어쩔 수 없이 이야기를 이어 나가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저도 이름과 번호 바꾸고 숨고 지내고 있네요. 모두가 돈을 빌려 달라고 해요. 하물며 가족마저 돈을 빌려 달라고 해서 부모에게마저 번호를 숨겼답니다.


하하, 라고 웃었는데 나만 웃고 말았고 이 술집의 분위기고 노래고 쾌적한 공기고 모두 마음에 들었지만 내가 나를 용서하지 못하는 한 오늘이 마지막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술자리에서는 그냥 공통된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상상도 들었다. 딱 십오 분쯤 정도만, 마음속에 있는 얘기를 농담처럼 가볍게 꺼내놓으면 안 되나. 걔가 죽었어요. 걔가 떠났어요. 걔가 없어졌어요. 사기를 당했어요. 잘렸어요. 당장 월세가 없어서 빚을 졌는데 큰일이네요. 하고 함께 하하. 웃고 모두가 십오 분의 기억 상실증을 앓는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하하. 그런데 우리 무슨 말을 했었죠? 몰라요.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아요. 여기서 중요한 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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