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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빗소리 Jan 15. 2022

선 긋기 연습

# 선 긋기 연습



외지 출장에서 만나는 지인은 더 반갑다. 오랜만에 본 지형 선배가 화사한 웃음으로 나를 반겨주었다. 


"자기, 진짜 오랜만이다~"


사랑이 많은 지형 선배는 같은 학교에서 일할 때 나를 참 예뻐해 주셨다. 여전히 사랑 넘치는 모습으로 출장지에 늦게 도착한 나를 위해 이것저것 살뜰히 챙겨주시는 지형 선배의 모습에 나도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대화를 하다 갑자기 지형 선배가 물었다. 


"그런데 며칠 더 와야 하는데 말이야. 차 어떻게 하려고? 같이 타고 다닐래?"


순간 거절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 아이 등원 때문에 안될 것 같아요. 제가 늦을 수도 있어서요. 알아서 다니겠습니다."


실제로 아이 등원 때문에 아침이 바쁘기도 하지만, 내가 지형 선배와의 카풀을 원하면 얼마든지 부지런히 일어나 시간을 조정하는 방법도 있었다. 그런데 굳이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들었다. 이상했다. 나는 지형 선배를 좋아하는데. 왜 갑자기 거절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을까. 


지형 선배는 내가 자신에게 미안해서 거절하는 것이라 생각을 하신 것 같다. 이야기를 이어가며 2번이나 더 물어보셨다. 결국 삼세번의 거절을 거친 끝에 카풀 이야기는 마무리되었다. 끊임없이 되묻는 지형 선배의 질문이 곤란한 순간도 있었지만, 지형 선배의 성정을 알기에 고마운 마음이 더 컸다. 그러나 삼세번이나 선을 그으며 거절하는 나의 속내가 스스로도 궁금해졌다. 


출장지에서 돌아오는 내내 생각했다. 나는 지형 선배를 좋아한다. 아마도 지형 선배가 좀 어려운 업무 부탁을 한다 해도 나는 기꺼이 도와줄 것이다. 그만큼 지형 선배를 좋아하고 따르기에. 그런데 왜 함께 차를 타는 일은 안 되는 걸까. 어려운 일을 돕는 것과 차를 함께 타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 


차라는 특수한 공간에 대해 생각해보니 어쩐지 답이 나오는 것만 같았다. 차라는 좁고 고요한 공간. 그곳에서 누군가와 함께 있어야 한다면 끊임없이 이야기를 해야 할 것이다. 수다를 위한 수다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나는 다른 이의 차를 타는 일도, 내가 누군가를 태우는 일도 좋아하지 않는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제외하고 내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정말 친한 친구들과만 그 공간을 공유하고 싶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며 지형 선배와의 카풀을 왜 그렇게 거절했는지 알게 되었다. 나에게 있어 '함께 대화하고 싶은 마음'은 꽤 예민한 부분이라는 것을. 가십거리를 나누며 들어도 안 들어도 상관없을 법한 이야기들의 나열이 나를 얼마나 지치게 하는지를. 내가 정말 원하는 이야기들은 내 가슴 안에 맴도는 내 존재 근원에 대한 물음들이고,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들에 대한 순수한 기쁨이라는 것을. 나를 매우 슬프게 하는 고민과 아무리 생각해도 모호한 삶이란 녀석의 정체에 대해 함께 나누고 싶다는 것을. 


지형 선배와의 카풀을 거절하고 나는 3일 간 타 지역 출장을 다니며 혼자 사유하는 자유를 얻었다. 설사 냉정해 보일지라도 선 긋기가 스스로를 위해 좋은 선택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 긋기 연습이 더 필요한 분명한 이유를 얻었다. 




# 어떤 흔적


엄마와 함께 주말 아침을 보낸다는 건 참 감사한 일이다. 엄마께서 아직 건강하시고, 운전을 하실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함께 아침을 먹고 있는데, 라디오에서 마이클 런스 투 락의 '25 minutes'가 흘러나왔다. 


"이거 아빠가 좋아했잖아."


나의 말에 엄마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웃으셨다. 이제 그런 말 하는 것이 슬프기보다 애잔한 것을 보면 20여 년의 세월의 옷이 덧입혀졌기 때문일 것이다. 


"라디오에서 올드팝이 나오는데 익숙하다 싶으면 너네 아빠가 듣던 음악이더라."


엄마도 아빠와의 추억 한편을 내보이셨다. 그렇게 아빠가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아빠가 곁에 있는 듯 아침 식사 자리가 외롭지 않아 졌다. 자연스럽게 아빠가 좋아했던 LP와 전축 이야기로 옮겨가며 아빠와의 추억을 서로 나누었다. 아직 아빠를 기억하고 함께 추억을 아무렇지도 않게 나눌 수 있는 엄마가 살아계시다는 것이 기뻤다. 그리고 아빠가 부러웠다. 음악을 들으며 떠오르는 사람이 된다는 건 얼마나 낭만스러운 일인가. 


엄마와 서재를 정리하다 아빠가 사주셨던 시집을 발견했다. 


"엄마, 나 이거 아직 못 버렸잖아. 앞으로도 안 버릴 거지만. 나중에 호두 줄까 봐."


25년은 더 된 것 같은 책인데, 잘 보관해서인지 아직도 멀쩡하다. 그리고 그 안에는 아빠가 직접 써준 메시지도 적혀있다. 아마도 지금의 내 나이쯤 쓰셨던 메시지 같은데 글씨가 참 아름답다. 글씨를 참 잘 썼던 아빠. 사람의 글씨는 참 묘한 존재 같다. 이상하게도 글씨를 바라보면 꼭 그 사람의 사진을 바라본 것 같이 그 사람이 보인다. 그 사람의 여운, 분위기, 느낌들이 복잡하게 글씨에 어우러져 있다. 나는 아빠의 사진을 거의 보지 않지만, 아빠의 글씨는 가끔가다 들여다본다. 그 글씨가 꼭 아빠의 모습 같아서 바라보고 있는 것이 좋다. 


아빠는 나에게 음악으로, 글씨로 남아있다. 나는 음악 속에서, 글씨 속에서 아빠의 모습을 느낀다. 나는 나의 가족과 친구들에게 어떤 것들로 남아 있는 사람일까. 내가 듣는 음악들이, 내가 쓰는 글과 글씨들이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을 잘 담아낼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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