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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빗소리 Jan 23. 2022

참 예쁘게도 살았네

은이를 만나는 날이 가까워지면 기분 좋은 설레임과 떨림으로 며칠을 보내곤 한다. 은이를 무척 좋아하면서도 머나먼 거리로 인해 우리의 만남은 연중행사가 되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해 1월, 우리의 만남은 새해를 시작하는 중요한 의식이 된다. 지나온 한 해에 애쓴 서로를 다독여주고, 시작될 한 해를 살아갈 힘을 주는 의식. 오늘도 은이는 내게 줄 선물과 편지를 한 아름 들고 의식을 치르러 와주었다.


은이를 만나기까지 나는 꽤 추운 겨울을 지냈다. 많은 고민들과 부족한 능력, 점점 지쳐가는 정신력으로 하루하루를 버텼다. 매일 밤 잠들기 전 서재에서 은이의 편지를 꺼내 읽었다. 친구이지만 나를 무척 존경한다는 은이. 부산에서 날아온 편지는 하나도 안 괜찮은 나를 조금은 괜찮은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다. 내 헝클어진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잡아주며 내일은 더 잘할 수 있다고, 너는 여전히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친구라며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은이도 한참 바쁠 시기라 나의 힘듦을 얹으면 은이가 어려워질까 봐 차마 전화조차 하지 못했다. 힘든 날은 은이가 남겨준 글씨들을 오래도록 읽으며 이불처럼 덮었다. 그렇게 자고 나면 다음 날 아침 씩씩하게 출근을 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은이는 내 입에서 어떤 이야기들이 나올까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첫 복직 이후 나의 자존감은 바닥을 쳤다. 내가 느낀 나란 사람의 바닥과 고쳐지지 않는 문제들, 아무리 기도해도 같은 죄를 반복하는 어리석음을 이야기해주었다. 내가 느끼는 감정들을 최대한 정확히 전달해주고 싶어 한참 단어를 고르고 골똘히 생각하며 느릿느릿 전하는 이야기를 은이는 오래도록 말없이 들어주었다. 한참 뒤 입을 연 은이가 말했다.


“그러니까 너 참 예쁘게도 살았네. 올해는 더 힘들었는데도 잘 버텼다.”


“아니, 은이야. 그 이야기가 아니잖아.”


은이의 믿음은 대체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 때론 은이가 나보다 나를  믿는  같을 때가 있다.  믿음이 고맙기도 하지만, 때론 내가 그렇게 믿어주는 은이를 실망시킬까  무서워진다. 사랑하는 이를 실망시키는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니까.


울지 않으려 입술을  깨물었다. 나를 수도꼭지로 만드는  은이의 특기이다. 슬플 때는   우는데, 감동받을 때는 울어버린다. 그런  성격에 은이의 말은 너무 쥐약이다. 은이만 만나고 오면 퉁퉁 부은 얼굴로 엄마를 걱정시켜야 한다.


카페 창가에 앉아 함께 노을을 오랫동안 바라봤다. 은이는 내가 자신에게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그런 내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니 얼마나 가슴이 아픈지를 이야기해주었다. 이제라도 이야기해주어 고맙다는 말도. 은이의 마음을 알기에 시시콜콜 이야기해줄 수 없었다. 나를 아끼는 은이의 마음만큼이나 나도 은이를 아끼기에 내 힘듦을 그 여린 어깨에 얹어주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은이의 몇 마디 만으로도 나는 일 년 치 위로를 담뿍 받은 느낌이니까. 은이는 내게 그런 무게를

가진 사람이니까.


은이를 배웅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결국 울어버렸다. 엄마를 걱정시키지 않으려 했던 노력은 허사가 되었다. 그래도 또 한 해를 살아갈 넉넉한 사랑과 믿음으로 배가 불러왔다. 은이의 말과 글을 잊지 않으려 여러 번 되뇌었다. 보고 싶을 때마다, 힘들 때마다 또 꺼낼 수 있도록.


은이를 만나고 오는 밤은 생각이 많아져 글을 쓰지 않을 수 없다. 내가 괜찮은 삶을 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은이라는 친구를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내 삶은 내게 이미 괜찮다. 은이의 생일 때마다 매년 내가 은이에게 해주는 말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


은이야, 태어나줘서, 내 앞에 나타나 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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