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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빗소리 Jan 25. 2022

딱 한 발자국

# 애증의 관계


흔히들 내가 글을 쓴다 하면 오해하는 것이 있다. 내가 글쓰기를 좋아하고, 글을 쓸 때마다 무척 행복할 거라는 생각이다. 일부는 맞는 말이긴 하다. 나는 내 손으로 글자를 쓴 이후부터 어떤 방식으로든 글쓰기를 꾸준히 해왔다. 생각이 생각으로 꼬리를 무는 사유의 습관은 자연스럽게 글쓰기로 이어졌고, 생각이 머리에 찰랑찰랑 거려 흘러넘칠 때쯤에는 글이라는 그릇에 받아 담았다. 그렇게 글쓰기는 나의 삶에 필연으로 맞닿기 시작했다.


나와 글의 관계는 그다지 애틋하지도 낭만적이지도 않다. 굳이 생각해보자면 애증의 관계라 말할 수 있다. 머릿속에서 통통 굴러다니는 글감에 살을 붙이며 생각하는 것도 재미있고, 한 편의 글이 완성되어 생각이 눈에 보이는 구체물로 변한 모습을 관찰하는 것도 꽤 흥미진진한 일이지만, 글이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은 지난하고 고통스럽기 짝이 없다. 마치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듯 머릿속에서 기억이라는 실을 하나하나 뽑아 직조하는 과정은 시간이 오래 걸리고, 썼다 지웠다 하며 글자들의 조합을 퍼즐처럼 끼워 맞춰보며 가장 적합한 짝이 맞을 때까지 반복해야 한다. 짧으면 1시간, 길면 몇 시간 혹은 며칠로 이어지는 글쓰기의 과정은 오랫동안 앉아 있느라 아픈 허리를 달래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설사 애증의 관계라 해도 글쓰기에 대한 나의 깊은 짝사랑은 정리할 수 없는 감정이다. 아마도 나는 글과 그렇게 오래도록 지지고 볶고 사랑하며 늙어갈 것 같다. 무형의 존재이지만 글은 꼭 나의 가족 같다. 사랑해도 미워해도 그저 함께 모든 걸 덮고 가야 하는 나의 핏줄 같은 존재. 그런 존재가 또 하나 있어 감사해야 할까. 한 가지는 확실하다. 글쓰기가 있어 나의 삶은 훨씬 더 다채롭고 깊어졌다는 것.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 존중, 그 귀한 경험


은이를 처음 만난 때를 떠올려 본다. 먼저 친해진 친구 혜령이는 나에게 꼭 소개해주고 싶은 친구가 있다 했다. 자신의 오랜 친구인데, 나와 영혼이 꼭 닮았다고 했다. 나를 만나면 자꾸만 그 친구가 떠오른다고. 아마도 둘이 만나면 너무 비슷해서 서로 신기해할 거라 말했다.


혜령이의 소개로 은이를 만난 자리에서 며칠 동안 나를 만날 생각에 엄청 떨렸다는 은이의 이야기를 듣고 그 순수한 마음에 깜짝 놀랐다. 혜령이가 해주는 이야기들 속의 내가 좋아서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는 은이의 말을 들으며, 우정에 있어서 진심인 사람이구나 싶어 호감이 생겼다. 나 또한 친구들 한 명 한 명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진심을 다하는 편인데, 은이는 참 남달랐다. 우정에도 재능이라는 게 필요하다면 은이는 정말 우정 올림픽 선수로 뽑혀야 하지 않을까. 그만큼 은이는 사람 귀한 줄 아는 사람이다.


언젠가 은이가 말했다.

“있잖아. 살면서 누군가에게 제대로 된 존중을 받는다는 게 얼마나 귀한 경험인지 몰라. 그걸 한 번도 안 겪어보고 죽는 사람도 있을 수 있어. 그러니까 네가 누군가에게 그런 존중을 받았다면 정말 감사하게 생각해야 해.”


은이는 정말 그 말 그대로 살았다. 혜령이도 멀리 살아 잘 챙기지 못하는 혜령이 어머니 식당의 조용한 단골이 되어 어머님의 숨은 조력자가 되기도 하고, 이제 갓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풋내기 작가로서 자주 좌절하는 나를 위해 내 글 속 문장들이 담긴 엽서를 시리즈로 만들어 안겨주기도 했다. 엊그제 은이를 만난 뒤로 계속 손목이 아파서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문득 깨닫고 웃음이 나왔다. 은이가 선물해준 책이 너무 많아서 하루 종일 들고 다니다 손목에 무리가 간 것이다. 우정에 있어서는 종잡을 수 없는 은이의 파격적 행보는 자주 나를, 친구들을 감동으로 깜짝 놀라게 하고, 한 사람의 진심이 가진 힘이 얼마나 큰지를 알게 한다.


내가 우정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그건 아마도 은이에게 배운 것이 아닐까. 그런 의미로 혜령이의 말은 틀렸다. 나와 은이는 영혼이 닮은 게 아니었다. 은이는 어설프기 짝이 없는 내가 한참 배워야 할 친구였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어떻게 사람을 사랑해야 할지 배울 수 있는 친구가 곁에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은이를 생각하면 마음에 감사가 차오른다.


우정에 있어 남다른 사람이 되고 싶다. 사람 귀한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를 만나는 모든 사람이 존중을 경험했으면 좋겠다. 그런데 아직 멀었다. 더딘 나의 성장을 보면 초조해지지만 은이라는 목표가 곁에 있으니 좀 더 차분하게 마음먹으려 한다.



# 약할 때의 강함


친구를 위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생각이 들 때 무척 무력감을 느낀다. 그런데 그렇게 내가 가장 무기력하게 느껴질 때 가장 많이 기도하게 되는 것 같다.  생각해보면 내가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이 기도인데 말이다. 교감선생님은 그랬다. 이래도 저래도 어찌 안되면 팔자라고. 그 말에 이렇게 대답하고 싶었다. 이래도 저래도 반드시 되게 하는 게 하나님의 섭리라고. 하나님은 나를 위해 늘 내게 맞는 최고의 환경을 세팅해주셨다. 3월에는 몰라도 12월 즈음에는 항상 깨달았다. 올해도 그 축복 속에 살았다는 것을. 하나님은 내가 간절히 기도하는 나의 친구를 위해서도 가장 좋은 환경을 만드실 거라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평안해진다. 가장 무력할 때의 기도는 가장 강력하다.



# 딱 한 발자국


중요한 결정을 앞에 두고 있다. 몇 주 동안 오래도록 기도하며 조언을 구하고 고민해온 문제이다.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린 상태이지만, 아직은 조용히 있고 싶다. 정말 중요한 일에는 말을 아끼게 된다.


사실 좀 두렵다. 후회하게 될까 봐. 힘들어서 시간을 1월로 돌리고 싶어지면 어쩌지. 그런 생각들이 덮쳐올 때면 아찔해지지만, 애써 나를 다독여본다.


특별히 잘하는 건 없지만, 그래도 그나마 내게 있는 재능이 있다면 아마도 두려워도 한 발자국 내디뎌 보는 무모한 용기가 아닐까 싶다. 나는 내 스스로를 주어진 그릇만큼 채우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공기처럼 말이다. 그릇이 커지면 당장은 힘들어도 어느 순간 그만큼을 채우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한다. 그러기에 가끔씩 더 큰 그릇으로 나아가는 한 발자국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한 발자국이 그렇게 무섭다.


무서워도 아마도 내가 아는 나는 한 발자국을 결국 뗄 것이다. 그리고 후회할 것이고, 아마도 어떤 밤은 눈시울이 붉어져서 쉬이 잠 못 들겠지. 그걸 다 알면서도 결국 한 발자국을 떼는 내 마음을 나도 도무지 모르겠다.




# 일은 적당히, 사람에겐 최선을


업무로 조언을 구해야  일이 있어서 오랜만에 후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6년 전  학년 부장을 시작할  함께 일한 후배이다. 그때 당시 28살이었던 후배는 처음 해보는 업무들에 많이 힘들어했고, 나는 밥을 자주 사주며 괜찮다고 잘할  있다며 응원을 해주곤 했다. 함께 일하면서도  일머리가 있는 똘똘이 스머프 같다 생각하곤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6년이 지난 지금은 날아다니는 후배를 보며 이제 내가 조언을 구해야  처지가 되었다.


오랜만에 건 전화인 데다 업무에 대한 질문이라 성가셨을 텐데도 후배는 하나부터 열까지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다정하게도 알려주었다. 통화가 끝날 무렵 무척 고마워하는 내게 후배가 말했다.


“선배, 나 선배가 올해 그 업무 하며 잘 해낼 거 알아요. 그 학교 사람들은 행복하겠어요. 선배 같은 사람과 같이 일하고.”


그 말이 너무 따뜻해서 저녁 내내 잊히지가 않았다. 설거지를 하다가 생각나고, 아이를 씻기다가도 생각이 났다. 내가 밥 사줘가며 위로하던 막내가 이제 거꾸로 밥 같은 위로를 내게 떠먹이고 있었다. 세월이 흐르고 변해가는 우리의 관계가 참 재밌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올해 나는 어떤 사람들과 함께 일하게 될까. 올해 맡을 업무로 내가 미칠 선한 영향력은 무엇일까. 아직 아무것도 알 수 없지만, 6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한 가지는 ‘일은 구멍 안 날 정도로 적당히, 사람에게는 최선을’이다. 올해 12월에 이 글을 다시 읽으며, 올 한 해도 보람 있게 살았다며 뿌듯해 했으면 좋겠다. 그런 상상은 언제 해도 행복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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