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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빗소리 Jan 27. 2022

행복한 듯 웃고 있지만

# 잃었던 것들은 더 소중하다


나는 상당히 빠른 속도를 좋아한다. 운전은 목숨이 달린 문제라 항상 안전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규정 속도를 지키려 노력하지만, 안전이 보장되는 상황에서 속도를 즐길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속도를 무척 즐긴다. 스노보드가 그렇다. 눈 위에서 하는 운동은 내가 생각할 때 맨몸으로 가장 빠른 속도를 즐길 수 있는 활동이 아닐까 싶다.


하얀 벌판을 빠른 속도로 가르지를 때 폐부에 가득 차는 차가운 공기를 사랑한다. 날고 있는 듯한 자유로움도 큰 즐거움이다. 스노보드를 탈 때면 드넓은 공간에서의 완전한 자유를 느끼곤 한다. 단, 누군가에게 부딪히지 않고 유유히 빠져나갈 수 있는 기술이 습득될 경우에 말이다. 그런 기술을 얻기까지 꽤나 엉덩이와 무릎을 혹사하며 눈물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아이를 낳은 뒤 스노보드의 세계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무지 돌아오지 않는 몸 컨디션과 나 없으면 절대 안 되는 딸아이를 보며 스키장에 다니던 시절이 꿈 같이 느껴졌다. 그렇게 한 해 한 해를 보내고 4년이 지났다.


너무나 오랫동안 타지 않았기에 내 몸이 얼마나 기억할까 싶었는데, 보드를 타고 내려가는 순간 금세 균형을 맞추는 스스로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몸으로 배운 건 절대 잊을 수 없는 것인가 보다.


예전의 보드 생활과 달라진 점은 있다.


1. 남편과 나 둘 중 하나는 아이를 봐야 하니까 혼자 타야 한다. 홀로 타는 고독과 못 타는 아쉬움을 비교하면 당연히 고독을 선택한다.


2. 주어진 시간에 미친 듯이 타야 한다. 쉬엄쉬엄 타며 즐기던 예전과 달리 정말 전투 보드를 타야 주어진 시간을 알차게 쓸 수 있다. 예전에는 돈이 아까웠다면 지금은 시간이 아깝다.


남편이 아이를 데리고 들어간 심야 시간에 나는 다시금 홀로 보드를 끌고 나왔다. 주어진 시간 1시간. 미친 듯이 타야겠다는 생각에 부지런히 몸을 움직인다. 심야 시간에 스키장에 오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러 명의 남자들, 혼자인 남자, 가족, 연인들이다. 여자 혼자 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 심야 시간에 오는 여자는 둘 중에 하나가 아닐까. 나처럼 정말 스노보드를 좋아하는 아이 엄마나 스노보드를 너무 사랑해서 혼자 차를 끌고 온 아가씨이거나.


심야 시간의 슬로프는  혼자 타야 한다. 어쩌다 굳이 같이 타려는 사람이 붙어 버리면 공중에서  막히는 불편함을 겪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자 타는 여자들이 있다면 나는 묘한 동지애를 느끼며 슬며시 같이 슬로프를 타곤 한다.  마디도 나누지는 않지만 왠지 모를 호감이 불편함을 이긴다.


안 자랄 것 같던 아이는 어느새 쑥 자라 버렸고, 돌아올 수 없을 것 같던 스노보드의 세계로 나는 다시금 돌아왔다. 어제도 탄 듯 자연스럽게 예전의 나로 돌아온 것이 무척 감격스럽다. 앞으로 내가 스노보드를 탈 수 있는 시간은 얼마나 남았을까. 스노보드는 꽤 격렬한 스포츠이기에 십 년도 채 남지 않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도 욱신욱신한 무릎을 느끼며 이 글을 쓰고 있으니까. 언젠가는 스키로 전향해서 할머니가 될 때까지 스키장의 시간을 즐길 생각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노보드를 타던 몸의 감각을 오래도록 그리워할 것 같다. 끝은 모르지만, 그 끝을 준비하며 한 해 한 해 이 시간을 진심으로 즐겨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로 인해 소중한 취미를 잃게 된 것 같아 슬펐지만, 아이를 낳고도 여전히 스노보드를 신나게 탈 수 있는 스스로가 대견하게 느껴지는 밤이다. 모든 것은 잃어보는 순간 그 소중함이 배가 되는 법이다. 아이를 낳은 뒤 나는 잃었던 삶의 소중함을 다시금 천천히 배우고 있다. 마치 재활 치료하듯이. 예전보다 더 깊어지고 더 의미 있어진 모든 것이 참 사랑스럽다.




# 마음의 방부제


작년부터 부장을 맡은 뒤로 교내외에서 면접 위원으로 참여해야 하는 일이 많다. 그러다 보니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을 만나게 되고, 그들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게 된다.


어제 본 면접 대상자 중 한 명이 기억에 남는다. 면접의 질문에 모두 막힘 없이 대답하는 듯 보였으나 질문마다 왠지 모르게 진짜 답을 말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구렁이 담 넘어가듯 술술 넘어가는 듯하나 마음에 와닿는 이야기는 하나도 없었다.


명퇴를 한, 아주 오랜 경력을 가진 선생님이었는데도 왜 내 마음에 닿는 이야기는 들을 수 없었을까. 운전하고 오는 내내 그분에 대한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내가 교직생활을 하면서 가장 무서워하는 게 있다면 언젠가 내가 닳고 닳아 순수함을 모두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가 무미건조해지는 순간이 온다면 어떡하지. 마치 수업을 다 안다는 식으로 술렁술렁해버리면 어쩌지.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쿵 내려앉는다.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쉬운 길이 있어도 자신의 순수함을 잃을까 봐 가지 않는다는 소연 선생님의 말이 멋지게 느껴졌다. 나는 쉬운 길이 있으면 갈 것 같은데. 생각해보니 그렇다. 순수함을 잃지 않으려는 자체가 이미 어렵게 살겠다는 선언 같은 것이니까.


나이가 들면 늙는 게 자연스럽듯 경험이 쌓이면 순수함을 잃는 것도 자연스럽다. 그런데 그걸 잃지 않으려 마음먹는다면 그건 얼마나 큰 반대의 힘을 요구하는 것인가.


요즘 읽고 있는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조르바는 세상 모든 것을 바라볼 때 마치 매일 처음 본 것처럼 여기려 한다. 그건 순수함을 지킬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일 테지만, 아주 의식적인 노력이 많이 필요한 일이다. 그 문장을 읽으며 내가 살려는 삶의 방식이 얼마나 어려운 길인지를 새삼 뼈저리게 느꼈다.


그래도 같은 마음을 가진 친구가 옆에 있어서 얼마나 감사하고 힘이 되는 일인지. 혼자는 어렵겠지만 함께 연대한다면 조금은 덜 어려운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내 순수함에 방부제를 치고 싶다. 가장 좋은 방부제는 오늘이 처음인 것처럼, 내일 곧 죽을 것처럼 사는 마음이 아닐까. 오늘 처음 보는 아이들인 듯, 내일은 못 볼 얼굴들인듯한 마음으로 제자들을 대하고 싶다. 내가 언제까지 그 순수함을 지킬 수 있을지 알 수 없으나 적어도 노력하는 내 모습은 스스로에게 좋은 자아상을 깊게 심어주는 것일 거라 믿는다.




#  행복한 듯 웃고 있지만


행복한 듯 웃고 있지만, 아니 자주 행복을 순간순간 느끼기도 하지만, 꽤 많은 시간을 자주 외로움, 불행과 우울을 느끼고 슬픔을 겪는다. 이런 고백이 부끄럽지 않다. 인간 모두에게 삶이란 건 결코 쉽지 않은 무게감으로 다가가는 것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았지만 근원적인 내 고독과 슬픔은 오로지 나만의 것임을 실감한다.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이 있다 해도 온전히 혼자 감당해야 하는 감정의 그늘들이 있다. 그때 나는 삶이란 건 결국 고독한 것이란 사실을 깨닫는다.


나는 내 삶을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는다. 다만 내가 행복을 가장하지 않고, 나의 어두운 면을 부끄럽지 않아 한다는 것에 만족한다. 내가 SNS를 하지 않고, 글을 쓰는 큰 이유이다. 적어도 글에는 내 어둠을 담을 수 있으니.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다. 작은 순간순간들에 많이 웃고 조그만 것들에 행복을 느끼며, 가슴을 내려앉게 하는 삶의 불행과 슬픔들에 좌절한다. 나는 그저 하나의 온전한 삶을 모두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부러운 사람도 없다. 삶은 모두에게 무거운 것이니까. 가끔 나를 부러워하는 사람들을 만나곤 하는데, 마음속으로 생각한다. 내 마음 저변의 슬픔을 알게 된다면 그래도 나를 부러워할까?


혹여라도 힘든 친구가 있다면 이런 나의 고백을 읽고 힘을 내었으면 좋겠다. 굳이 이야기 하지 않겠지만, 내게도 감내해야 할 불행과 좌절이 있다고. 그냥 삶은 모두 그런 것이려니 헤헤 웃고 넘어가지만 하루도 쉬운 날은 없다고.


밥 딜런의 외할머니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네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친절해라. 그들 모두는 각자의 힘든 싸움을 하는 중이니까.


서로 말할 수 없지만 우리는 모두 힘든 싸움을 하는 중이다. 그러니 서로를 안쓰러워하며 사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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