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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빗소리 Feb 03. 2022

작가보다 '쓰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 무명작가여도 괜찮아


한 때 책을 내야겠다는 막연한 꿈을 가지고 있었다. 글쓰기를 시작하는 초보 작가라면 당연히 품을 수 있는, 어찌보면 흔한 꿈이었다. 그렇게 한 해 , 두 해,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지금의 나는 여전히 그 꿈을 품고 있는가.


요즘의 나는 평생 무명작가로 살아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종종한다. 이름을 내걸고 메이저의 세계로 발돋움하기에는 나는 아직 숨기고 싶은 세계가 많다. 나와 내 글을 사랑하는 독자들과만 공유하는 이 은밀한 세계가 많은 이에게 공개가 되고, 수많은 시선이 몰린다면 과연 나는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상상하는 순간 아득해져 버린다.


내 주변에 오프라인의 내 모습과 온라인의 모습을 동시에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사실 두 모습이 크게 다르지도 않고, 내 글이 지인들에게 모두 공개가 된다 해도 그다지 켕길 건 없지만 그냥 왜인지 밝히고 싶지 않다. 앞으로도 나는 이 공간을 웬만하면 오프라인의 지인들에게는 공개하지 않을 예정이다.


빗소리라는 필명 뒤에 숨어 사는 것이 좋다. 마치 또 다른 그림자를 얻은 기분이 든다. 나의 글을 사랑하는 이들과 이렇게 소곤소곤 대화하듯 조용히 살아가는 이 생활이 꽤 괜찮다. 더군다나 이렇게 나 같은 무명 작가들을 위한 플랫폼까지 있는 세상이라니……. 엄청난 재능을 가졌음에도 세상 어느 한 구석에서 무수히 머리를 쥐어 뜯으며 살았을 고흐를 생각하면 지금의 나는 얼마나 복이 넘쳐 흐르는 삶을 사는 건지.


무명 작가여도 괜찮다. 아니 사실 무명작가여서 더 좋다. 누군가의 눈치를 보지 않고, 좀더 자유로운 자기 표현을 하며 살아갈 수 있으니까 말이다. 누군가가 내 글을 읽고 같은 진동수로 흔들려준다는 것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 작가보다 '쓰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얼마 전 마티스의 전시회를 다녀왔다. 사실 전시회에 가기 전까지 마티스가 어떤 느낌의 그림을 그리는지에 대해서 간신히 알뿐 마티스라는 사람의 생애와 어떤 사유를 담아 그림을 그리는지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이번 전시회는 시작부터 말이 많았다고 한다. 우리가 대부분 아는 마티스의 유명 회화 작품이 아니라 판화 작품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나는 유명한 작품에 크게 관심이 없고, 그냥 어떤 그림이든 그 화가만의 특색을 느껴보는 걸 중요시 여기는 편이라 상관은 없었다. 


전시회에 가서야 마티스의 판화 작품이 어떠한 배경 속에서 나왔는지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마티스에게 생긴 질병에 의해서 예전처럼 회화 작품 활동을 이어갈 수 없자 그가 선택한 다른 방향의 경로가 판화였다. 그 부분에서 꽤 감명 받았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육신의 질병이 생기면 작품 활동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마티스의 열정은 질병 마저 뛰어 넘는 것이었다. 


음악과 미술 등 여러 예술 분야에서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은 주로 이런 구도자의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좋아하는 피아니스트는 백건우씨이다. 더 재기발랄한 피아니스트들도 많지만,  그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피아노를 치는 구도자이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어도 끊임 없이 성실하게 자신만의 길을 찾아가는 그의 모습이 좋다. 이번 마티스의 전시회를 보며 예전에는 크게 관심이 없던 마티스라는 작가가 좋아졌다. 그는 정말 미술에 미친 사람이었고, 숨지기 전까지도 열정을 불태우던 사람이었다. 수많은 장애물로도 막을 수 없는 그의 불타는 열정이 존경스러웠다.


나는 작가로서 살고 싶다기 보다 사실 '쓰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글에 대한 특별한 목적이 없다. 그저 '글을 쓰는 행위' 자체를 무척 사랑한다. 내 안에 떠다니는 사유를 글자로 변환하여 남겨놓고 싶고, 그 형태화된 사유들을 오래도록 읽으며 순간의 사유를 추억하고 싶다. 매일 매일 내 하루의 작은 경험들을 글로 남기고 있다. 브런치에 올리는 글은 그중 1/10도 안되지만. 


삶은 살아가는 것보다 해석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믿는다. 내게 인식되는 하루의 많은 경험들을 그저 살아가는 것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유라는 체에 한 번 걸러서 해석을 입혀 놓는 과정이 꽤 중요하다. 다음 번에 비슷한 경험을 할 때 좀 더 지혜롭게 대처할 수 있는 준비가 되기도 하고, 새로운 경험이 생길 때 용기를 낼 수 있는 기반이 되기도 한다. 나의 글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이 아니라 내 스스로의 마음을 단단하게 다져주는 존재이다. 


나는 오늘도 끊임 없이 글을 쓴다. 쓰는 것이 좋아서 멈출 수 없는 마음으로. 내 몸과 마음의 크고 작은 아픔들이 때때로 그 길을 가로막는다 해도 그 아픔 그대로 글을 써본다. 매일 글을 쓸 수 있어 나는 진심으로 행복하다. 




#  당신을 위해 기도합니다


오래 전 함께 일한 동료 교사에게 오랜만에 연락이 왔다. 자세한 전문을 밝힐 수는 없지만 대강의 내용은 이렇다.


“너무 힘이 드는데, 갑자기 선생님 생각이 났습니다. 선생님이 나를 위해 기도해주었으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매일 죽고 싶습니다. 염치 없는 부탁이지만, 저를 위해 기도해주세요.”


저녁을 먹다가 받은 연락에 깜짝 놀랐다. 더이상 밥 생각이 없어질만큼. 꽤 강인한 분이었는데, 대체 무슨 일이 그의 삶에 광풍을 일으키기에 죽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을까.


그분은 내가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계셨다. 그리고 기도 부탁을 하면 꼭 들어주리란 것도. 기도 부탁을 받은 이후에는 기도 시간에도, 하루 중 생각이 날 때마다 문득 문득 간절히 기도했다. 무엇이 그분을 아프게 하는지 알 수 없으나 제발 그분의 마음을 지켜달라고.


사실 나는 가끔 이런 연락을 종종 받는다. 정말 힘들고 어려운 순간을 보내는 누군가가 기도 부탁을 할 때가 있다. 때론 전혀 친하지 않았던 이가 내 생각이 났다며 연락을 할 때도 있다. 이런 연락을 받을 때마다 그런 중요한 순간에 나를 떠올려 주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마음이 든다. 꼭 기도해야 한다는 책임감 또한 든다.


나를 위해, 친구들을 위해, 그리고 이렇게 기도를 부탁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지만, 우리의 삶이 우리가 기대하고 소망하는 대로 되지 않을 거란 사실을 알고 있다. 다만 내가 확실히 아는 것은 기도하며 하나님의 섭리를 기대하고 소망할 때 좀 더 건강한 마음으로 이 고난을 지혜롭게 받아들일 수 있고, 고난이 모두 지나갔을 때에도 강포한 마음이 아닌 좀 더 아름답게 성장한 마음을 갖게 될 거라는 것이다.


그분을 위해 기도한다. 그분이 겪는 고난이 그분을 무너뜨리는 장애물이 되지 않길. 이 풍랑 이겨내어 더 넓고 근사한 바다로 흘러가는 길이 열리길. 마침내 풍랑이 지나가 자리에 더 맑고 잔잔한 바다를 느낄 수 있길. 기도하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기대들을 마음껏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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