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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빗소리 Jun 09. 2023

심심하다는 건 소중한 감정이야


“심심하다는 건 소중한 감정이야.”              

 

어느 날 아이가 인형과 놀다가 한 혼잣말입니다. 설거지하며 듣다가 웃음이 났습니다. 제가 아이에게 자주 해주는 말이었는데, 그걸 자연스레 따라 하는 것이었거든요.     

          

저희 아이는 심심하다는 말을 참 자주 합니다. 정말 심심함을 느껴서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이 말은 영상을 보여달라는 잠재적 의미가 있습니다. 휴직 때까지는 영상을 안 보여주고 되도록 몸으로 놀아주는 원칙이 잘 지켜졌지만, 복직을 하며 아이가 아빠와 노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점점 영상을 보는 시간이 늘어났습니다. 저 또한 다시금 직장생활에 적응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 좀 많이 보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되면서도 체력이 안되어 내려놓을 때가 많았습니다.               


2년 정도가 지나고 이제야 어느 정도 직장생활에 적응되었다 생각이 드니 아이의 영상 보기를 방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무가 아직 여린 순일 때 가지치기를 해주면 좋을 텐데, 시간이 흘러 단단해지면 가지치기가 몇 배로 힘이 듭니다. 영상 보는 습관이 꼭 단단한 가지를 치는 것처럼 어렵게 느껴졌습니다.               

그래도 시도해 보자는 마음으로 아이가 심심하다 할 때마다 말해주었습니다.               

“심심하다는 건 좋은 감정이야.”     

“심심하니까 이런저런 것을 할 수 있는 마음의 힘이 생기잖아. 무엇을 하면 좋을지 스스로 생각해 봐.”               

아이가 스스로 무엇을 하고 싶다 하면 그대로 준비해 주지만, 대부분은 잘 생각이 안 난다 이야기해요. 그러면 이런저런 예시를 들어주고, 여러 놀이를 들이밀지만, 이미 영상이 가장 재미있는 아이에게는 많은 것들이 시시하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도 차근차근 여러 가지 놀이에 익숙해지도록 시도해 봅니다.               

며칠 전에는 드디어 물감 세트를 샀어요. 크레파스, 색연필, 사인펜 등 번지지 않는 도구들로 아이의 그림이 갇혀 있는 느낌이 들었어요. 색이 서로 섞이면 다양한 색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싶기도 했습니다. 일부러 가장 색이 적은 12색 물감을 사다가 분홍색과 하늘색, 살구색 같이 아이가 많이 쓰는 색을 직접 만들어 보게 했습니다. 물감에 물을 묻혀 마구 번지고 뻗어나가는 그림을 그려보게도 했습니다. 도구를 처음 써보는 아이라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었지만, 이렇게 스스로 실패해 가면서 도구를 어떻게 사용하면 가장 효율적인지 손의 감각을 스스로 느끼길 바랐습니다.        

       

아직 미술 학원에 보내지 않은 이유는 아이가 아직 틀에 얽매이지 않을 때 각종 도구를 가지고 자유롭게 자기표현을 하길 바라서였습니다. 아이의 그림과 도구 사용법은 정말 어디서부터 손 써야 할지 모를 정도로 자유분방하지만, 아직 자유분방함이 무제한 허락이 될 때 그 자유를 느끼길 바랍니다. 오늘은 아이와 그렇게 해와 나무, 꽃을 그리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얼마 전 조승연 씨가 어머니와 자녀교육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영상으로 보았습니다. 조승연 씨는 빈 시간에 혼자 의미를 만들어 갈 수 있는지를 가르치는 것이 자녀교육에서 참 중요한 것 같다며, 이를 문화자본이라 말했습니다. 문화자본은 부모와의 경험을 통해 만들어진다고요. 유럽에 갔을 때 유럽 사람들이 자신의 여가 시간을 다양하게 즐기는 것이 좋아 보였다는 이야기도 덧붙입니다. 자신 또한 어머니와 함께 여러 여가시간을 보내며, 자신이 역사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네요. 그러면서 역사 공부를 업으로 삼아 열심히 하는 사람도 있고, 역사에 재능이 있는 사람도 있지만, 여가 시간에 굳이 역사공부를 스스로 하며 재미를 느끼는 것이 가장 소중한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 재미있는 시간을 굳이 역사에 투자하는 거 자체가 소중한 습관인 것 같다고요.               


그 영상을 보면서 제 마음속에서 아이에게 어렴풋이 심어주고 싶었던 것이 바로 문화자본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저는 아이가 여가시간을 자연과 세상을 느끼며 교감하도록 가르치고 싶었고, 그런 습관들이 아이가 커서도 굳이 스마트폰이 아니어도 즐겁게 살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줄 거라 믿습니다. 그런 시간들 속에서 자신이 무엇을 할 때 가장 행복한지 적성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여전히 아이는 영상을 좋아하고, 가장 재미있는 것을 영상 속에서 찾아내지만, 지금의 제 미미한 걸음이 언젠가는 뿌리를 내리고 잎을 뻗으며 꽃을 피울 수 있을 거라 믿고 걸어가 봅니다. 문화자본은 오직 부모만이 전수해 줄 수 있는 것이니까요. 살 붙여가며 살아가는 시간 속에서 함께 나누는 대화 속에서, 주고받는 놀이 속에서 아이에게 전해지는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생각해 봅니다.               


남편과도 이 부분을 함께 공유하고, 뜻을 함께 모으면 좋겠지만, 아이가 6세가 될 때까지도 도저히 합의가 되지 않습니다. 자신이 아이를 봐야 할 시간이 되면 덥석 영상부터 들이밀고, 쉬기를 반복하는 남편의 행동 때문에 수없이 많이 갈등하고 힘들었지만, 도저히 해결되지 않는 평행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남편에게 저는 알 수 없는 이야기만 늘어놓는 이상주의자였거든요. 아이를 낳고 이 문제로 너무 스트레스를 받다가 저의 스트레스 상황에도 속절없이 흘러가는 아이의 시간을 바라보며 합의할 수 있는 건 합의하고, 합의할 수 없는 것들은 시간과 더불어 흘려보내자 마음을 먹었습니다. 스트레스 관리도 육아의 중요한 꼭지라는 것을 깨달았거든요. 물론 저에게도 남편이 이해할 수 없는 지긋지긋한 부분이 있겠죠. 예를 들면 아이와 놀아주기를 최우선순위로 두는 습관 때문에 청소와 각종 집안일을 후순위로 두어 집안일이 자주 쌓이는 것을 보면요. 서로의 참을 수 없는 부분은 시냇물처럼 시간에 흘려보내고, 좋은 부분만 바라보며 아이의 지금에 집중하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야 할 방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런 생각에 도달하기까지 오래 걸렸습니다. 하지만 아이 곁에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아주는 것이 엄마가 해줄 수 있는 최고의 미덕임을 깨달은 뒤부터는 스트레스 상황을 관리하기 시작했어요.               


글을 쓸 때마다 조심스럽습니다. 제가 잘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이렇게 살고 싶다 생각하며 노력하는 것일 뿐인데, 마치 내가 잘하고 있는 것처럼 꾸며지고 있지 않을까. 저희 아이는 영상을 여전히 잘 보고 있고, 저도 그저 체력이 되는 만큼만 여러 가지 놀이를 시도하는 것뿐이니까요. 제 글에 저의 부족함도 잔뜩 묻어나길, 그래서 이 글을 읽고 저처럼 그런 일로 고민했던 분들이 함께 공감하고 위로를 받을 수 있길 바랍니다.               

한 사람이 오고, 한 사람이 갑니다. 세상이 그렇습니다. 부모로서 가기 전 할 수 있는 일은 아이에게 최대한 내가 살아가며 체득한 삶의 지혜들을 젖을 물리듯 영혼의 젖줄을 통해 가르치는 일일 것입니다. 육아에 정답은 없고, 세상에 같은 아이도 없겠죠. 70억 명이 사는 지구에서는 육아의 방식도 수십억 개일 것입니다. 많은 종류의 나무가 서로 어우러져 살아가는 숲이 아름다운 것처럼 끊임없이 발전하려는 마음이 있는 엄마의 육아는 어떤 종류이든 아름다운 거라 생각해요. 저도 그 몇십억 분의 1을 담당하고 있고요. 끊임없이 발전하려는 마음을 단서로 두는 이유는 발전하는 마음 없이 흘러가는 육아는 그만큼 고인 물이 되어 위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도 계속 배워가는 육아를 할 때 또 다른 아름다운 육아의 방식이 탄생하는 것 아닐까요?               


점점 고집이 세지고 자아를 세워가는 아이와 함께 저의 한숨과 당황스러움도 깊어져 가고 있어요. 그러나 내일도 새 아침이 오고, 새 아침처럼 또 새롭게 아이에 대해 배우려는 마음이 돋아날 것을 믿기에 너무 두려워하지 않으려 합니다. 아이를 낳고 매일 새로운 고민으로 곤혹스러워하는 세상의 엄마들을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서로 존경하며 조금은 더 푸근하게 육아를 해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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