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레전드매거진 게재
[취재/글: 이준동]
국내 1세대 패션 디자이너인 박윤수는 박윤수는 어린 시절 어머니의 화장대에 놓인 ‘샤넬 No.5’, ‘크리스찬 디올’, 그리고 ‘지방시’ 등의 향수를 보고 만지며 자연스럽게 서양 문화를 접하게 됐다. 어머니의 화장대는 그가 새로운 세상을 경험할 수 있는 미지의 공간이었다.
유년기 박윤수의 눈에 비친 멋스럽고 우아한 어머니의 패션은 그를 자연스럽게 패션의 길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어느 순간 입으려 했던 옷과 어울리는 양말을 찾지 못해 학교에 가지 않으려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는 패션이 자신이 앞으로 몸담아야 할 분야라는 것을 직감했다.
1980년, 여성중앙에서 개최한 ‘중앙디자인 콘테스트’에서 은상을 수상하며 그는 정식으로 패션계에 입문한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내건 브랜드 ‘Park Youn Soo’(박윤수)로 1990년대부터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패션 전성기를 이끈 주역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 2012년 ‘박윤수’를 이을 또 하나의 브랜드 ‘BIG PARK’을 영국에서 론칭하며 그의 건재를 과시하기도 했다.
그는 2019년 ‘2019 F/W 서울 패션위크’를 마치며 통산 ‘60회 컬렉션’ 개최라는 경이로운 기록의 주인공이 되었다. 1989년 ‘서울 패션 아티스트 협의회’(SFAA) 컬렉션을 시작으로 한 길을 걸어온 그 스스로가 만든 자신만의 역사다.
대한민국 패션 디자이너 1세대의 주역인 박윤수를 만나 패션 디자이너로 살아온 40년의 역사와 그의 패션, 인생 이야기를 진솔하게 들어봤다.
[박윤수]
여러분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패션 디자이너 박윤수입니다. 이번 인터뷰를 준비하며 저 역시 대한민국의 패션의 역사를 되짚어 볼 수 있었고, 또 한국 패션 산업이 해결해 나가야 할 문제점에 대해 깊이 있게 되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일단 저 박윤수라는 한 사람으로 봤을 때 저는 시대의 흐름을 잘 탄 ‘행운아’였습니다. 제가 패션에 입문하던 시절은 ‘맞춤복’에서 ‘기성복’으로 패션 산업의 호황이 시작되던 시기였습니다. 맞춤복은 말 그대로 고객이 오면 그 고객의 몸에 맞춰 단 한 벌의 옷을 만들어 내는 것이죠, ‘나 하나만을 위한 단 한 벌의 옷’이라는 엄청난 매력을 가진 시장이었습니다.
‘기성복’은 말 그대로 치수가 맞으면 누구나 입을 수 있도록 제작된 옷입니다. 기성복의 등장으로 의류 산업도 대량 생산이 가능해졌죠. 대량 생산이 가능해졌다는 것은 그 산업이 커졌다는 의미입니다. ‘논노’라는 브랜드가 등장하면서 수많은 기성복 브랜드가 등장하며 대한민국 패션 산업은 순식간에 어마어마하게 성장합니다.
전문용어로 ‘작업 지시서’라 불리는 의류의 설계도면 역시 필요하지 않던 시절입니다. 고객의 치수를 재고 옷을 만들기 때문에 기준이 필요하지 않았죠. 하지만 기성복의 등장으로 각 치수별로 입을 수 있는 체형을 선별하고 그에 맞춰 옷을 생산해 낼 수 있는 설계도면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대한민국에서는 최초로 이 ‘작업 지시서’를 만들었던 세대로, 현재까지 작업 지시서가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는 초석을 다졌다고 생각합니다.
‘기성복’의 등장 이전의 한국 패션 시장은 정말 작고 또 좁았습니다. 패션을 하는 디자이너조차 많지 않던 시절이었고, 패션은 ‘사치’라는 의식이 팽배하던 시절이라 패션에 대한 국민의 인식이 좋지 않았죠. 더욱이 남자가 패션을 한다는 것에 큰 오해가 있던 시절이기도 하죠. 아마 어떤 의미인지 많은 분들께서 아시겠지만, 성적 정체성까지 거론하며 남성 패션 디자이너를 공격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반면 패션을 하고자 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패션으로 성공할 수 있는 기회는 지금보다 많았던 것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든 패션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얻게되면 지금보다는 더 큰 성공의 길을 걸을 수 있는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취미, 직업이 되다]
저는 어린 시절 어머니의 화장대에 놓인 화장품과 향수를 마치 장난감처럼 보고 만지며 자연스럽게 서구 문화에 대한 감각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청소년기 시절에는 공상과학소설을 읽으며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동경과 상상력을 키우게 됩니다.
돌이켜보면 패션 역시 완성되기 전까지는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는 미지의 세계이죠. 하나의 옷이 완성되어야 비로소 보고 만지며 느낄 수 있는 존재이니 당시 제가 상상력을 키웠던 것이 지금 패션을 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저는 상상력을 키워나가며 아련하게 패션이라는 산업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이 일을 하겠다’보다는 ‘이 일을 즐기고 싶다’라는 취미거리 정도로 생각을 했어요.
그런 단순한 취미가 이제는 저와 40년이란 세월을 함께 한 ‘직업’이 되었고, 저는 취미를 직업으로 승화시킨 제 자신이 정말 행운아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행이나 집필, 문화예술 활동을 취미로 하며 이것을 업으로 삼으려 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죠. 그것을 깨닫는 순간 그 취미는 더 이상 직업으로 바뀔 수 없습니다. 그 취미 활동이 나의 삶에 자연스럽게 묻어나기를 기다리며 손을 놓지 않는다면 여러분 스스로도 인지 못하는 순간 직업으로 바뀌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취미를 직업으로 삼으려면 끊임없는 ‘마인드 컨트롤’로 현실과 이상의 경계가 서로 맞닿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며, 또 말 그대로 그 취미에 미쳐야만 가능합니다. 요리를 하는 셰프분들을 예를 들면 요리라는 것은 정말 힘들고 고된 일입니다. 또 수많은 사람들의 각자 다른 입맛의 중점을 찾는다는 것 자체가 어마어마하게 힘든 일이죠. 그 힘든 과정을 견뎌내고 대한민국 최고의 셰프가 될 수 있는 것은 그 과정을 즐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의 직업이라 생각하고 버텨내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저 역시 그래 왔습니다. 이 패션을 저의 일이 아닌 제가 아끼고 사랑하며 즐길 수 있는 취미로 생각했기에 40년이란 세월을 해올 수 있었지 않았나 생각해요. 그렇게 패션을 즐기며 살아가던 저는 중앙일보에서 개최한 ‘중앙 디자인 콘테스트’에서 수상을 하게 되며 정식으로 패션계에 입문을 하게 됩니다. 이 수상은 제가 패션 디자이너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초석을 마련해주었고, 저는 당대 최고 패션 디자이너 선배님들의 사이에 설 수 있게 됩니다. 선배님들 또한 저를 이끌어주시며 제가 성장해 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죠.
[NOW, AND THEN]
비단 패션뿐만이 아닌 모든 산업군이 누구나 도전해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바로 인터넷 덕분이죠. 이 인터넷은 방대한 자료와 정보를 제공하며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너무나 쉽고 빠르게 배울 수 있습니다.
전문기관에 들어가 기술적인 것을 차근차근 배워나가고, 또 선배들을 찾아다니며 어깨너머로 일을 배우던 시절은 지났죠. 이렇게 쉽게 찾은 정보의 가장 큰 병폐는 ‘끈기’를 잃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만약 패션에 관심이 있고 배우고자 하는 마음으로 인터넷에서 정보를 찾던 사람이 만약 패션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면 곧바로 포기하고 다른 일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 이유는 바로 아무리 새로운 일이라도 정보와 자료를 너무나 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이죠. 사람들은 그렇게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자기 입맛에 맞는 손쉬운 일을 찾을 때까지 떠돌이 생활을 합니다. 정말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은 정하지 않고 쉽게 손댈만한 일을 찾는 거죠.
이것이 지금과 예전을 놓고 볼 때 가장 큰 차이입니다. 제가 패션을 시작하던 때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 가지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향해 달려갔습니다. 고난과 역경을 헤치고 정상의 자리에 오르는 사람들이 많았죠. 그렇게 힘들게 얻은 명성은 오래 지속됐습니다. 그분들이 세상을 떠나도 그 명성은 사람들 사이에 여전히 존재하죠.
그 당시 사람들이 기대할 수 있는 지원이란 것은 가족이나 친구의 도움 정도였습니다. 요즘처럼 정부에서 청년 취업을 지원해주거나 창업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 등은 꿈도 못 꾸던 시절이었죠. 스스로 자금 마련을 하고 공부를 하며 사업을 해야 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런 일련의 과정이 그 사람의 기본을 만들고 초석을 다져냈죠. 요즘은 무엇을 하기 너무나 쉬운 세상일 것입니다. 그 이면에는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노력하는 시간이 없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죠.
물론 지금의 청년 모두가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청년들이 자신의 노력과 시간을 허비하는 일이 없도록 차근차근 초석을 다지며 한 가지 목표를 향해 쉽게 포기하지 않고 끈기 있게 달려 나갔으면 하는 마음을 전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사람들이 무언가를 포기할 때는 그 일에 대한 자신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자신감을 갖게 해주는 것이 바로 기본기입니다. 이 기본기가 잘 갖춰져 있으면 자신감이 생기고, 이 자신감은 자신이 원하는 분야를 기선 제압할 수 있는 힘을 가져다줍니다. 탄탄한 기본기로 이미 기선 제압을 한 분야를 포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이미 그 분야를 나의 것으로 만들어냈다는 자신감이 충만한 그 사람은 그 분야에서 성공할 수밖에 없는 조건을 갖추게 되죠. 지금의 대한민국 청년들 역시 그런 기본기와 자신감, 그리고 역량을 갖춰 나가시길 진심으로 기원하고 또 응원합니다.
[박윤수, 그리고 패션]
사실 이 ‘패션’이라는 분야는 명확한 정답을 가지고 있는 분야가 아닙니다. 각자 자기가 가진 개성과 아이디어를 기초로 ‘의상’이라는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내는 예술적인 분야이기에 좋고 나쁨을 따질 수는 없기 때문이죠. ‘샤넬’이 전 세계적인 패션 브랜드라고 해서 이 세상 사람 모두가 샤넬을 좋아하는 것은 아닐 거예요.
이 ‘샤넬’이라는 브랜드 가치를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입니다. 10만 명이 하나의 브랜드를 좋아하고 20만 명은 다른 브랜드를 좋아한다고 해서 20만 명의 사랑을 받는 브랜드가 우위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죠. 이런 수치는 아마 비즈니스 측면에서 분석해 그 가치를 가늠한다면 충분히 설득력 있게 들리겠지만, 디자이너 입장에서는 그런 수치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특정한 다수를 위한 유니폼을 만드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런 존재로 남아서도 안 되죠. 물론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너무나 행복한 일임에는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 대중의 사랑을 목표로 만들어진 옷들은 심한 말로 ‘소모품’ 정도밖에 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패션에 뛰어들었던 당시의 대한민국 패션 산업을 이끌고 계셨던 선배님들 역시 누가 봐도 경악할 정도의 전율과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작품들을 만들어내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아부으셨습니다.
제가 입문했을 때 혹자들은 ‘저런 핏덩어리랑 내가 같이 일을 해야 하냐’며 저 때문에 자존심 구겨진다고 얘기하신 분들도 계셨습니다. 당시 저는 신인 아이돌 같은 존재였죠.
“윤수 너는 날아다니는 먼지만 봐도 아이디어가 떠오르지?”라며 저의 신선한 아이디어를 진심으로 칭찬해주시는 분도 계셨어요. 선배님들은 창의성의 고갈을 토로하는 분들도 많이 계셨습니다. 그런 선배님들께 콜라보를 제안드렸어요. 선배님들이 가지고 계신 ‘존재감’에 저의 ‘신선함’을 더해 작품들을 만들어냈고, 이런 일련의 과정으로 대한민국 패션 산업은 성장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왔던 게 80년대고요, 90년대 들어서며 본격적으로 패션 산업 성장을 위해 앞에서 움직일 수 있는 역량이 생겼습니다. 뉴욕, 파리, 밀란, 런던, 도쿄 이 5곳에서 열리는 ‘컬렉션’이 세계 패션 시장을 선도했죠. 이 컬렉션은 바이어들이 미리 선주문해 판매 물량을 미리 확보할 수 있는 ‘마켓’의 역할을 해냅니다. 또 1~2년 이후의 패션 산업의 변화를 미리 예견하고 대비할 수 있는 역할을 해내는 중요한 행사입니다.
이 ‘컬렉션’이란 시스템을 한국에서도 구축하기 위해 SFAA(서울 패션 아티스트 협의회)를 중심으로 12명의 당대 최고의 패션 디자이너들이 모여 국내 ‘컬렉션’을 탄생시키게 됩니다. 저는 그 12명 중 막내로 시작해 10년간 협회 회장직까지 맡은 제 패션 인생을 더욱 성장하게 만들어준 의미 있는 단체였습니다.
2010년 SFAA는 공식적으로 해체하게 됩니다. 많은 비용이 들어가는 컬렉션을 매년 개최하기 위해 스폰서 기업을 찾거나, 디자이너 자비로 행사를 열기도 했는데 경영난을 이겨내지 못한 것이죠. 그 후 서울시가 이 사업을 이어받아 ‘서울 패션 위크’라는 행사를 2010년부터 개최하게 됩니다.
[마지막 메시지]
저는 이때를 위기가 아닌 기회로 생각하고 ‘박윤수’ 브랜드보다 좀 더 대중적으로 사랑받을 수 있는 브랜드를 기획하게 됩니다.
2010년 브랜드 리뉴얼을 통해 ‘빅팍’(BIG PARK)이라는 브랜드를 만들어냈고, 2012년 영국 런던에서 공식 론칭하게 됩니다. 해외에서, 특히 세계 패션 시장을 선도하는 ‘런던’에서 인정받아 국내에서 역 론칭하는 방법을 택했던 것이죠.
‘박윤수’라는 브랜드가 국내에서 근간을 이루고 있는 ‘본부’의 역할을 한다면, 이 ‘빅팍’은 실전에 투입된 ‘전투조’의 역할을 하는 것이죠. 하나의 브랜드가 세계 무대에서 인정받으려면 오랜 시간, 그리고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고객이라는 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이 쉽지만은 않기 때문이죠.
또 최근 저는 제 작품의 완성도를 더욱 높이기 위해, 영국에서 미술과 상업미술을 공부한 두 딸과 함께 ‘줄라이 칼럼’(July Column)이라는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제가 스케치 아이디어나 주제를 던져주면 두 딸이 그 아이디어를 형상화한 그림과 패턴을 만들어줍니다. 저는 그 패턴과 그림으로 옷을 만들어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이죠.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은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매사에 ‘예스’라는 긍정적인 마인드로 살아가시길 진심으로 당부드립니다. ‘예스’(YES)는 모든 일이 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묘약(妙藥) 같은 작용을 합니다.
반대로 ‘노’(NO)는 잘 될 일도 망쳐버리는 사약(死藥) 같은 존재죠. 무엇이 안되더라도 긍정적인 마인드로 ‘이 정도로 끝난 게 다행이다’다 생각하면 그 실패는 더 이상 ‘실패’가 나닌 성공으로 향한 하나의 ‘과정’으로 승화될 것입니다.
부정적인 시각은 부정적인 일을 만들어내고, 긍정적인 사고는 긍정적인 일을 가져다줍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어떤 분야에서 무슨 일을 하건 짧은 시간에 성공하려는 욕심을 버리고, 느려도 기본에 충실한 삶을 산다면 그 성공은 반드시 여러분 곁에 오래도록 남아있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이것이 인생을 즐기며 멋지게 살아가는 최고의 여정이라 생각합니다.
너무 드리고 싶은 말씀이 많아 두서없이 저의 이야기만 펼친 것 아닐까 조금은 두려운 마음이지만, 이 글을 끝까지 읽어주신 여러분 모두의 가정에 평화와 행복이 깃드시길 진심으로 기원하며 이번 인터뷰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