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레전드매거진 게재
[취재/글: 이준동]
[사진: 김현철 제공]
[김현철]
김현철은 싱어송라이터이자 작사가, 작곡가, 그리고 음악 프로듀서다. 1989년 ‘춘천 가는 기차’가 수록된 1집 앨범 ‘김현철 Vol.1’를 발표하며 대중 앞에 첫선을 보인 그는 1993년 발매된 정규 3집 앨범 ‘횡계에서 돌아오는 저녁’의 수록곡 ‘달의 몰락’으로 대한민국 최고 가수의 반열에 그의 이름을 올리게 된다. 이후 그가 발표하는 곡들과 음악 스타일은 다른 많은 국내 가수들의 음악에도 직·간접적 영향을 가져다주게 된다.
가수이자 싱어송라이터인 그는 ‘이소라’ 등의 음반을 직접 프로듀싱해 히트시킨 제작자로도 그 실력을 인정받았다. 또 지금은 자신의 소속사인 ‘FE 엔터테인먼트’의 대표이사를 역임하며 연예기획사 경영인으로도 활발히 활동 중이다.
또한 현재 경희사이버대학교 실용음악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2013년부터 지난해까지는 MBC FM4U의 ‘오후의 발견’을 진행한 DJ이기도 한다. 현재 6개월 만에 동 채널로 복귀해 ‘김현철의 골든디스크’의 DJ를 맡아 청취자들에게 매일 아름다운 음악을 선사하고 있다.
초등학교 시절, 아버님의 사업상 이유로 온 가족이 사우디아라비아로 이민을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일하던 한국 근로자가 선물한 기타와 노래책 한 권으로 음악을 접하게 된 김현철. 사우디에서 귀국 후 의대 진학을 원하시는 부모님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음악인의 길을 선택해 대한민국 최고의 뮤지션이자 프로듀서 자리에 오른 그를 만나 음악과 함께 살아온 그의 지난 인생 이야기를 진솔하게 나눠봤다.
[가수 김현철]
여러분,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가수 김현철이라고 합니다. 먼저 이렇게 저의 이야기를 전해드릴 수 있는 인터뷰에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네요. 그리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모든 음악인과 예비 음악인 여러분 모두를 응원합니다.
저와 음악과의 인연을 얘기하려면 한참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요. 사실 저의 어머님께서는 어릴 때부터 제가 의과대학에 진학하길 원하셨어요. 제가 6살이 되던 해부터 어머님께서는 ‘의대에 가면 오케스트라도 있단다, 그러니 악기를 하나 배워야 한다’ 하시면서 저를 데리고 바이올린 학원에 가셨어요. 그렇게 바이올린을 시작하게 되었지만 그리 오래 배우지는 못했어요. 초등학교 저학년 때 아버님 사업상의 이유로 온 가족이 사우디아라비아로 이민을 가게 되기 때문이죠.
사우디에서 저희 가족은 4년 정도 생활했었어요. 저는 한국인학교에 다니며 학업을 이어갔지만 방과 후 딱히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늘 지루함의 연속이었죠. 그러던 어느 날 한 한국인 근로자분께서 기국을 하시며 저에게 기타와 노래책 한 권을 선물로 주셨어요. 80년대~90년대에는 기타만으로 연주하며 노래를 부를 수 있게끔 기타 코드가 적힌 악보집 같은 포크송 백과 같은 책이 유행했었죠.
당시 저는 기타에는 문외한이었지만 다행히 기타를 연습할 시간은 많았어요. 책에 나와있는 기본적인 코드들을 하나하나 연습해가다 보니 어느새 노래 한곡을 자연스럽게 연주할 수 있는 실력이 되었어요. 완전한 독학이었죠.. 그때는 책을 보고 있으니 책만 보면 다 배울 수 있는 거라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걸 어떻게 독학했나 싶을 정도로 신기한 일이죠. (웃음)
그렇게 사우디에서 기타를 붙잡고 살던 저는 4년 후 한국으로 귀국해 기타 학원이나 피아노 학원을 다닐 생각이었는데. 어머님께서는 의외로 저를 주산학원에 보내셨어요. (웃음) 당시에는 주산, 부기 학원이 동네마다 서너 곳씩은 꼭 있을 만큼 큰 유행이었거든요.
기타를 배우기 위해 학원을 다니지는 못했지만, 저는 초등학교 소풍 때나 행사가 있을 때마다 앞에 나가 기타를 연주했어요. 그랬더니 초등학교 6학년짜리가 기타를 친다고 학생들이랑 선생님들까지 신기해했어요. 그때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다 보니 자연스럽게 우쭐해지는 (웃음) 저 자신이 기분 좋아서 더 열심히 기타를 쳤죠.
그렇게 중학교에 진학한 저는 교회에서 만난 친구들과 함께 밴드 비슷한 연주 동아리를 만들어 활동했어요. 고등학교 때는 ‘아침 향기’라는 우리만의 그룹을 정식으로 결성해 교내 공연도 하고 외부 콘서트도 하며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하기도 했죠. 하지만 제가 의대에 진학하시길 원하셨던 어머님께서는 제가 음악을 못하게 기타를 파손시키실 만큼 완강히 반대하셨어요. 그나마 음악을 하면서 공부도 열심히 해서 성적이 항상 상위권을 유지했기에 엄청 크게 혼나지는 않았던 기억이 있어요. (웃음)
그렇게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입시를 치른 날, 저는 홀가분한 마음을 안고 ‘김수철’ 선배님의 공연을 보러 갔습니다. 이 공연에 게스트로 참가한 그룹 중에 ‘어떤 날’이라는 그룹이 있었어요. 공연을 보고 집으로 가는 길에 지하철에서 ‘어떤 날’의 베이시스트이자 보컬이셨던 ‘조동익’ 선배님의 뒷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저는 순간 얼음이 되어버렸고 기억을 잃었는데 다시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제가 조동익 선배님 앞에 서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거예요. (웃음)
그런 얼어붙은 제 모습이 귀여우셨는지 선배님은 “집 전화번호라도 알려드릴까요?”하시며 연락처를 저에게 전해주셨어요.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정말 꿈만 같던 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맺어진 동익 이형과의 인연으로 저는 프로 뮤지션 분들의 세계에 들어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동익이형과 저는 다른 노래의 편곡 일을 늘려가며 조금씩 유명세를 타던 순간이었죠.
[김현철, 그리고 좌절]
그렇게 음악가의 길에 발을 막 들여놓았던 1990년 5월 5일, 저는 남산 1호 터널을 운전하고 가던 중 갑자기 정신이 혼미해지고 몸이 마비되는 증상을 느꼈어요. 증상을 느끼고 차를 세울 겨를도 없이 정신을 잃고 차는 질주를 하다가 큰 사고로 이어지게 됩니다. 교통사고가 먼저 난 게 아니라 뇌경색이 먼저 오고 정신을 잃어 교통사고로 이어졌던 거예요.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죠. 뇌경색이나 사고도 아찔하지만 그 꿈 많던 어린아이가 겨우 꿈을 향해 한 발짝 다가서려는 순간 생긴 일이라 더욱 아찔합니다. 하고 싶은 것도 많고 해야 할 것도 많은 그런 나이였죠. 그런데 지금 나이 때로 그때를 돌아보면 참 아찔하고 안타까웠다고 말씀드릴 수 있지만 사실 그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어요. (웃음) 너무 어렸었기에 이게 안타깝다 어쩐다 생각도 안 들고 그냥 무덤덤하게 지나갔던 것 같아요.
사실 그때 저는 버클리 음대로 유학을 갈 계획을 세우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뇌경색과 사고를 당하고 보니 유학은 힘들 거 같다 스스로 결정을 내렸어요. 그때까지 무덤덤하던 마음이 조금 쓰리긴 했어요. (웃음)
1989년 가을 이미 1집 앨범을 발표했던 저는 3년의 공백을 가진 후 1992년 1집을 함께했던 회사와 재계약하며 2집 앨범을 발표하게 됩니다.
[김현철, 스타의 반열에 오르다]
3년이란 공백 기간 때문이었는지 2집은 저나 회사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말 그대로 저조한 성적을 거두게 됩니다. 다시 1년을 준비해 1993년 3집을 발표했는데 거기서 ‘달의 몰락’이 너무나 많은 분들께서 사랑해주시는 곡이 되었어요. 3집의 인기에 힘입어 제1집까지 덩달아 역주행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래도 2집은 역주행이 안되더라고요. (웃음)
그때가 스물다섯인가 그랬는데 완전 애가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을 만끽하게 된 거죠. 제가 봐도 그때의 저는 정신을 못 차렸습니다. (웃음) 노래 하나가 히트를 치니까 잘난 거 하나 없는 놈이 어느 날 ‘스타’가 되어 있더라고요. 어디 가서 자기가 이 세상 물정 다 아는 것처럼 얘기하기 일쑤였고, 아이러닉 하게도 그때가 제 스스로에게는 가장 창피했던 순간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부디 오늘의 인터뷰를 30년이 지난 80이 되어서 감히 다시 읽을 수 있는 좋은 인터뷰가 되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가수로 활동을 하며 많은 인터뷰를 했는데 그때의 인터뷰는 다시 꺼내 읽기조차 창피할 정도예요. 그렇게 3집으로 정점을 찍은 저는 4집, 5집 앨범을 발표하며 활동을 이어갔고 올해 10집 앨범을 발표하며 데뷔 30주년이 되어버렸네요. 세월 참 빠릅니다.
[김현철, 감성파?]
제 음악을 가장 냉철하게 평가해주시는 분들이 바로 대중들이신데요, 가끔 김현철은 ‘감성파 음악가’라는 평을 해주시곤 해요. 정말 한편으로는 쑥스러우면서도, 또 저 스스스로에게 자랑스러운 칭찬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감성이라는 것은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감성이 느껴지는 것뿐이지, 저희 입장에서는 감성을 말 자체가 느끼는 사람이 느끼는 거지 하는 사람은 못 느껴요.
음악을 하는 사람들은 그냥 내가 좋아하는 노래, 내가 좋아하는 가사를 쓰는 것뿐인 거 같아요. 그 곡이 감성적이라 평가받을 수 있는 것은 감성이 풍부한 대중들의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1집부터 9집까지 아홉 개의 앨범에 대한 평도 천차만별입니다. 판매량은 높은데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 앨범이 있는가 하면, 전혀 기대도 안 하고 판매량이 부진하면서 대중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좋은 곡이다라고 평가받는 앨범이 있어요. 앨범이란 게 잘되면 잘 되는대로, 또 안되면 안 되는대로 나름대로의 문제와 이유가 있더라고요. (웃음)
[김현철, 30년과 10집]
사실 10집 앨범을 발표한다는 것이 설레기는 하지만, 절대 30년이란 세월을 음악만 해서 그 세월을 돌아보는 감회 같은 건 절대 없어요. 그저 지금도 음악을 할 수 있는 매일매일이 감사할 뿐입니다. 사실 9집에서 이번 10집까지 13년이란 공백기간이 있었어요. 제 팬분들 마저도 13년이란 공백기간이 있었는지 모르시는 분들도 많이 계세요. (웃음) 공백기간이 길었던 만큼 정말 재미있게 작업했던 것 같아요. 지금 이렇게 어렵게 찾은 음악의 재미만큼은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어요.
그리고 항상 앨범 작업할 때마다 느끼는 건 ‘욕심’이 있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제가 솔직히 1집 때는 무슨 욕심이 있었겠어요. (웃음) 그런데 1집에서 2집, 2집에서 3집 거득할수록 결과가 좋아지다 보니 저도 모르게 ‘노림수’라는 걸 찾게 돼요. 노림수라고 해봤자 뭐 특별한 건 아니고요, 사실 대중들에게 가장 어필할 수 있는 타이틀곡을 정한다는 것부터가 노림수라 볼 수 있겠죠. 이번 10집 앨범은 그런 노림수 없이 대중들에게 선보이려 노력했어요.
이 노래 좋아하시는 분들은 이 노래 들으시면 되고, 저 노래 좋아하시는 분들은 저 노래 들으시면 되고. (웃음) 저는 그저 제가 하고 싶은 음악 마음껏 만들어 여러분께 들려드리자 하는 마음으로 준비했어요.
[김현철, 마지막 메시지]
데뷔전과 지금의 가장 큰 차이점이요? 가장 큰 차이점은 30년 전에는 제가 주류였는데, 지금은 제가 비주류라는 거? (웃음) 사실 요즘은 시장 자체가 우리 세대가 하는 음악에 포커스를 주지 않잖아요. 그리고 그건 인정하고 있어요. 저뿐만 아니라 저와 비슷한 세대의 가수분들은 아마 거의 공감하고 인정할 거예요. 우리가 아무리 ‘그게 아닐 거야’ 해도 이미 그 시장은 그렇게 되어 있을 뿐이고, 우리만 부정하는 것 밖에 안되죠.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이 시장에 대한 ‘부정과 긍정’이 아니라, ‘어떻게 우리의 음악으로 지금 세대와 공감할 수 있을까’가 아닐까요?
여러 가지 답을 생각해 봤는데 답은 단 하나예요. “열심히 꾸준히 음악 하자”
요즘은 BTS 시대라 하잖아요. 사실 저는 죽었다 깨어나도 BTS 같은 음악은 절대 못할 거고요. (웃음) 지금까지 만들어온 나만의 음악 세계를 조금씩 더 넓혀가는 노력을 하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해요.
나만의 음악 세계를 넓혀간다는 것이 쉽지만을 않을 거라는 걸 잘 알아요. 음악은 내가 만들고 나 혼자 들을 때나 ‘내 노래’지, 대중에게 공개되고 난 후로는 ‘대중들의 노래’가 됩니다. 이 노래의 모든 평가는 대중들의 몫이 되는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제가 30년 전에 발표한 ‘춘천 가는 기차’를 소녀시대 태연이 다시 리메이크해준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오래된 저의 노래를 요즘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 준 것만으로도 저에게는 큰 영광이라 생각하죠. 이번 10집 앨범 역시 마마무, 옥상달빛, 그리고 죠지 등 젊은 친구들과 작업하며 함께 호흡을 맞출 수 있어 너무 즐겁고 행복한 작업이었습니다. 이렇게 전(前) 세대와 후(後) 세대가 함께 공감하는 기회가 더욱 많아지길 진심으로 바라는 말씀을 마지막으로 전하며 이번 인터뷰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