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저녁노을이 거실 안쪽까지 길게 스며드는 시간이었어요. 아무 생각 없이 소파에 몸을 파묻고 있다가, 문득 벽에 걸린 달력을 바라보니 가슴 한쪽이 덜컥 내려앉더군요. 벌써 올해도 두 달이 지나가고 있다니, “시간 정말 빠르다”는 혼잣말이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새어 나왔습니다.
하지만 사실, 이 말은 우리 삶에서 가장 흔하고도 서글픈 클리셰잖아요.
얼마 전 친구와 통화하다가 그 집 딸이 벌써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말도 안 돼, 걔 돌잔치 때 내가 가서 뷔페 먹은 게 엊그제 같은데!"라며 손사래를 쳤죠.
하지만 전화를 끊고 돌아보니 제 삶도 딱 그 모양이었습니다. 언제 이렇게 흘렀는지, 회사에선 어느덧 ‘은퇴’라는 농담 섞인 이야기가 오가고, 정들었던 차의 계기판 숫자는 벌써 8년의 세월을 조용히 증명하고 있더군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간이 빨라진 게 아니라, 어쩌면 내가 내 삶에서 잠시 ‘부재중’이었던 건 아닐까 하고요. 우리는 참 열심히 삽니다. 아침마다 쏟아지는 메시지에 답하고, 회의실에서 치열하게 숫자를 다투고, 퇴근길 지하철에 몸을 싣고 나면 녹초가 되죠. 그렇게 하루를 ‘해치우듯’ 살다 보면, 주말은 밀린 잠과 의미 없는 약속으로 금세 흘러가 버립니다.
그러다 어느 날, 거울 앞에 서면 낯선 눈동자가 묻습니다.
“너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거니?”
예전에 성경에서 “세월을 아끼라”는 구절을 읽었을 땐, 그저 시간을 쪼개 더 많이 일하라는 채찍질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아요. 그것은 ‘속도’의 문제가 아니라, ‘의식’의 문제라는 것을요. 시간을 아낀다는 것은 일정을 빽빽하게 채우는 기술이 아니라, 내가 왜 이 선택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떳떳하게 답하며 사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비전’도 그렇습니다. 비전은 결코 거창한 구호가 아니더군요. 오히려 아주 사소하고 조용한, ‘오늘의 기준’에 가깝습니다. 무엇에 내 에너지를 쏟을지, 그리고 무엇을 단호하게 거절할지 결정해 주는 마음의 이정표 같은 것이죠. 이 기준이 없으면 우리는 남의 속도에 등 떠밀려, 그저 헉헉대며 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전에 제가 쓴 글(리더인 당신이 떠난 뒤, 그곳에는 무엇이 남아 있습니까)에서처럼, 삶은 바통을 이어받아 달리는 릴레이 경주와 닮았습니다. 앞선 세대에게서 삶의 태도를 배우고, 우리 역시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넘겨주게 될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얼마나 빨리 들어왔느냐가 아니라 어떤 방향으로 달렸는지, 그리고 내 바통에 어떤 가치를 묻혀두었는가입니다. 그것이 결국 우리가 남길 유일한 흔적이겠죠.
시간은 오늘도 무심하게 흐릅니다. 하지만 그 흐름 속에 의미를 채워 넣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의 몫이죠.
바쁜 하루 속에서도 잠시 멈춰 서서, 내 삶의 방향을 확인하는 것—그것이 흐르는 세월 속에서 나를 잃지 않는 유일한 방법 아닐까요.
오늘 밤, 잠들기 전에 내 마음의 이정표를 한 번 쓱 닦아보고 싶어 집니다.
당신의 오늘 하루는,
당신이 원했던 그 방향을 향하고 있었나요? - BizMan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