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제 원대리 자작나무숲
강원도 인제에 눈이 내린다는 일기 예보는 가슴을 들뜨게 했다. 1년여를 기다려온 시간이었다. 자작나무숲은 계절마다 하얀 자작나무를 둘러싼 다양한 색들로 다양한 아름다움을 보여주지만 세상의 모든 것이 눈으로 덮인 겨울이 단연 최고의 순간임이라고 나는 늘 생각하고 있다.
홍천에서 인제 방향의 44번 국도는 하얀 꿈속처럼 짙은 안개 속으로 길이 나 있었다. 안개 너머의 풍경도 온통 설국이었다. 가야할 거리도 멀고, 주말이면 늘 막히는 도로라는 악명을 기억하고 새벽길을 골랐는데 정작 내 이마를 누르는 것은 실체가 없는 것이었다. 우리 삶이 항상 이렇다. 하루하루 나아가는 생에서 걸음을 멈춰 세우는 것은 물리적인 장애나 불행이 아니라 예측하지 못했던 불확실성, 불안감이다. 온통 하얀 들판 위에 올해 하고자 했으나 시작조차 하지 못한 일들이 나무처럼 불쑥불쑥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산림 감시 초소를 지나 조금씩 자작나무가 보이기 시작했다. 원대임로를 따라 서서히 오르막길로 오르다보니 흰 눈으로 덮힌 숲 속 풍경은 내가 선 위치를 잊게 만드는 것 같은 안개 속에 들어선 기분이다. 이른 아침부터 서두른 탐방객들의 감탄사와 두런거리는 대화, 카메라 셔터소리가 깊은 생각으로 빠져드는 것은 방해했지만 싸늘한 공기가 머리 속까지 들어오는 것 같아 상쾌했다. 일부러 아무도 걷지 않은 숲 속 눈길을 걸어본다. 뽀드득하는 하는 소리가 좋았다. 조금 더 험해지는 3코스 탐방로로 접어드니 등에 땀이 맺힌다. 길이 험해지고 힘들어지니 사람들의 대화가 줄어 모두 묵묵히 눈 앞 자신의 발걸음에 집중하고 있다. 짧은 길에서도 여유로움을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만든다. 길이 늘 인생의 여정에 비유되는 이유가 새삼스럽다.
3코스가 끝나고 탐방로 1코스가 시작되는 부분에 다다르니 해마다 기다리던 그 순간이 눈 앞에 펼쳐진다. 나무와 눈이 구분되지 않는 순간이다. 속삭이는 자작나무숲이라는 이름처럼 빽빽한 자작나무 사이에 서 있으면 바람결에 속삭이는 나무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나무 사이사이에 앉거나 기대서 그 소리에 귀기울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도 모두 자작나무처럼 곧고 따뜻해 보였다. 숲길 중간 중간 누군가가 쌓은 돌탑이 눈에 덮힌 채 웅크리고 있고 노부부가 그 위에 작은 돌을 하나 얹었다. 짧은 순간이지만 경건하고 엄숙한 공기가 자리를 채웠다. 누구를 위한 기도였는지 궁금해졌다. 나도 작은 돌을 하나 주워 가까이 어느 돌탑에 올리며 잠시 눈을 감았다. 특별히 빌 것도 없으면서 무엇이든 빌어보고 싶어졌다.
탐방객이 적은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바람 소리에 집중했다. 눈으로 덮힌 자작나무숲은 하늘과 땅, 나무의 경계가 없었다. 모든 것이 백색인 순간을 만나는 자리이고, 그것은 마음을 다스리고 새로운 각오로 시작하는 무(無)의 순간이기도 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자리를 서둘러 하얗게 비워둔다. 생각도 잠시 멈추는 시간이 있어야하지 않을까?
3킬로미터 정도의 원정임도를 따라 천천히 내려오며 계속 뒤를 돌아본다. 다시 일년 후에나 만나게 될 하얀 숲의 이야기가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생각을 정리하고 새로운 그림으로 채우는 11월과 12월, 눈이 내린 다음날 자작나무숲으로 가벼운 산책 어떠세요?
- 원대리 자작나무숲 가는 길: 서울에서 서울양양고속도로를 타고 동홍천IC에서 나와 44번 국도를 타고 인제방향으로 올라가다 38대교 부근에서 이정표를 보고 우회전해서 올라가면 입구를 쉽게 찾아갈 수 있다. (강원 인제군 인제읍 원남로 760 (Tel) 033-460-80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