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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종훈 Jul 11. 2021

2년 6개월 동안 절을 여행하고 그렸더니 책이 되었다.

처마 끝 풍경이 내게 물었다

관광객이 모두 빠져 나간 후 절에 남아 마당을 걸어본 일이 있나요? 절집의 모든 것이 더 편안하고 고요해지는 시간입니다. 천천히 마당을 걷다 보면 전각과 계단, 돌담, 탑의 구석구석에 요정처럼 숨어 있던 작고 귀한 것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강렬한 햇빛으로 보이지 않던 마애불의 표정이 드러나고, 석탑에 새겨진 비천상이 두드러집니다. 문 손잡이를 장식한 연꽃 문양이 선명해지고, 계단 옆 돌수반에 핀 연꽃이 더 붉어집니다. 비슷비슷해 보이는 사찰의 숨겨진 아름다움을 만나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 즐거움을 찾아 한 달에 한 번, 카메라와 그림 도구를 준비해서 사찰을 그리는 여행을 다닌지 어느새 2년 6개월이 지났습니다. 그리 열심히 다녔지만 이제 겨우 30여 곳을 다녀왔을 뿐입니다. 제 스스로 세운 목표가 사찰 드로잉 100곳인데 모두 채우려면 앞으로 6년 정도의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사찰은 유행에 따라 허물어지고 새로 짓는 공간이 아니기에 더 오랜 시간이 걸려도 그 자리에 그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으니 공간의 변화를 걱정할 일은 없어 좋습니다.     

절집의 시간은 느려서 참 좋습니다. 24시간이 부족하게 사는 제게 바빠서 잊고 있던 것들을 볼 수 있게 하고 들을 수 있게 합니다. 조급한 마음은 일주문을 통과하는 순간 사라지고 없습니다. 걸음은 자연스럽게 느려지고 평소 살펴 보지 않던 나무와 바위, 흙, 그리고 작은 벌레까지 눈에 들어옵니다. 새소리가 이렇게나 다양했는지, 풀벌레 소리가 얼마나 마음을 편하게 만드는지, 돌을 치고 흘러가는 냇물 소리가 얼마나 경쾌한지 알게 됩니다. 오늘 알게 된 것을 내일 절을 나서면 잊겠지만, 언제든 일주문을 들어서면 긴 잠을 자다 스르르 깨어난 것처럼 보고, 듣고, 느끼게 됩니다. 어쩌면 부처님이 부리는 마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무뎌졌던 감각이 모두 살아나면 그리고 싶은 대상이 너무 많아서 탈이지요.     


방에 앉아 정말로 까만 밤이 내려앉은 마당을 내다보고 있으면 우주에 나간 기분이 이런 것일까 상상하게 됩니다. 혼자만 불을 밝힌 우주선을 타고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요. 따뜻한 방바닥에 엎드려 사각사각 그림을 그리다 어느 순간 잠이 듭니다. 제가 사찰 드로잉에서 가장 좋아하는 순간이 바로 이 때입니다.     

답답한 일상에서 휴식이 필요할 때 여러분도 작은 노트와 펜을 준비해서 가까운 절을 찾아가세요. 아담한 공간에 앉아 눈에 들어오는 소소한 풍경을 관찰하고 그림으로 담아 보세요. 어쩌면 낮에도 우주를 여행하는 경험을 하게 될지 모릅니다.          

책은 7월 16일 출간되어 서점에 배포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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